철혈의 맹약

30화: 사선을 넘어
사랑방 내부의 분위기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한 살얼음판 같았다.
한명은행 오정필 이사는 총구 앞바람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자신의 가죽 서류 가방을 조심스럽게 태형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여, 여기 있네! 내 서류 가방 안에 한명은행 강남지점의 차명 금고 열쇠와 함께, 해외 신탁 계좌 송금을 전결할 수 있는 법인 인감, 그리고 실물 보안 USB와 하드웨어 OTP 키가 들어있네! 제발 내 목숨만은 살려주게! 난 그저 돈을 보관하고 세탁해 준 대가로 수수료만 받아 챙겼을 뿐일세!”
태형은 정훈에게 눈짓했다. 정훈이 신속하게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틀림없습니다. 오만수 회장의 비자금 백업 장부와 실물 보안 매체들입니다.”
태형은 차가운 눈빛으로 오정필을 바라보다가, 이어 김도윤 비서실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김도윤은 총구 앞에서도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김 비서실장. 오만수 회장에게 전해라. 그의 금고는 열렸고, 그가 쌓아 올린 화려한 탑은 밑바닥부터 무너져 내릴 거라고.”
김도윤의 입가에 엷고 씁쓸한 냉소가 감돌았다.
“강태형 형님. 이걸로 회장님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금성그룹은 대기업입니다. 정재계 법조계에 깔린 끈만 수백 개입니다. 당신이 이 돈줄을 쥐어도, 결국 국가 권력이 당신을 짓밟을 겁니다.”
“그전에 오만수의 숨통을 먼저 끊어놓으면 될 일이다.”
태형이 지팡이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원의 소나무 숲 방향에서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무전기에서 지지직거리는 다급한 임창수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형님! 빅토르 최가 미끼인 걸 눈치챘습니다! 지금 그놈이 안채로 가고 있습니다! 당장 대피하십시오!
쿵-! 쾅!
안채 복도 초입에서 경호원들의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문들이 연달아 부서지는 굉음이 백운각 전체를 뒤흔들었다.
사신 빅토르 최가 돌아온 것이었다.
“정훈아, 나간다!”
태형이 소리치자, 정훈은 즉시 오정필의 가방을 품에 안고 사랑방 뒷면의 툇마루 창문을 걷어찼다. 기와지붕 아래로 비 내리는 마당이 드러났다.
그 찰나, 사랑방의 두꺼운 미닫이문이 종이 장처럼 찢겨 나가며 빅토르 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오른손에는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이 들려 있었고, 두 눈에는 사냥감을 놓친 사냥개의 극도에 달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픽, 픽, 픽-!
소름 끼치는 가벼운 격발음과 함께 태형이 방금 서 있던 대리석 바닥에 구멍이 뚫리며 돌가루가 튀었다.
“막아!”
정훈이 반사적으로 품속의 총을 꺼내 빅토르 최를 향해 대응 사격을 가했다.
탕, 탕-!
총성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사이, 빅토르 최는 믿기지 않는 반사 신경으로 몸을 날려 기둥 뒤로 숨었다. 정훈은 그 틈을 타 태형의 팔을 부축하고 툇마루 밖 빗속으로 몸을 던졌다.
두 사람이 진흙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순간, 빅토르 최가 창문 틈새로 다시 한번 총구를 겨누었다.
그때, 정원 담장 너머에서 은색 스타렉스 차량이 백운각의 정문 나무 기둥을 거칠게 들이받으며 마당 안마당까지 돌진해 들어왔다. 운전석의 임창수가 창문을 열고 공중을 향해 가스총과 연막탄을 마구 쏘아댔다.
쉬이이익-!
자욱한 백색 연기가 백운각 마당을 순식간에 뒤덮으며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형님! 타십시오!”
슬라이딩 도어가 열리며 박마동이 거구의 몸을 내밀어 태형과 정훈을 차 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두 사람이 차 안으로 탑승하자마자, 창수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아 차를 후진시켰다.
피비린내 나는 연막 속에서 빅토르 최가 연기 너머로 스타렉스의 타이어를 조준해 세 발의 총탄을 정확하게 날렸다.
깡, 깡-!
총탄 중 한 발이 뒷바퀴 휠에 맞았으나, 다행히 펑크는 면했다. 스타렉스는 굉음을 지르며 백운각의 부서진 정문을 빠져나와 빗길 도로 위로 폭풍처럼 도망쳤다.
백운각의 무너진 문가에 선 빅토르 최는, 빗물에 젖은 권총을 내린 채 서서히 멀어지는 스타렉스의 붉은 후미등을 묵묵히 응시했다.
그의 뒤로 헐떡이며 방에서 나온 김도윤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다가왔다.
“놓쳤군.”
“……가방을 빼앗겼다.”
빅토르 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거친 목소리에 차가운 살기가 묻어났다.
“하지만 상처를 입혔지. 다음번엔 반드시 숨통을 끊는다.”
빅토르 최는 바닥에 떨어진 태형의 지팡이 끝에 묻어 있던 강철 침 조각을 주워 올렸다.
빗길을 질주하는 스타렉스 안.
태형은 젖은 옷을 털어내며 정훈이 확보한 가방을 단단히 쥐었다. 비록 아슬아슬한 사선을 넘나든 탈출이었지만, 그들의 손에는 마침내 오만수를 파멸로 이끌 거대한 비자금의 실쇠가 들려 있었다.
태형의 깊은 눈 속에 차갑고 서늘한 승리의 빛이 어렸다. 이제 오만수의 목을 죄기 위한 철혈단의 진짜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