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맹약

22화: 핏빛 추적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가 서울 강남의 화려한 빌딩 숲을 뿌옇게 흐려놓고 있었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논현동의 한 골목길 모퉁이에 시동을 끈 채 서 있는 낡은 은색 스타렉스 차량 안. 운전석의 임창수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백미러를 주시하고 있었고, 조수석의 박마동은 우람한 양팔을 낀 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뒷좌석의 강태형은 어둠 속에서 지팡이 머리를 만지며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스피커를 통해 연소희의 나직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금성 캐피탈 지하 주차장에서 검은색 카니발 두 대가 출발했어요. 내비게이션 경로상 강희찬의 사설 금고가 있는 양재동 창고로 향하는 게 확실해요. 뒤차에 강희찬의 오른팔인 배태식이가 타고 있어요.”
화면으로 전송된 주행 경로를 확인한 태형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배태식이라…….”
배태식은 강희찬의 행동대장이자 사채업계에서 채무자들의 피눈물을 짜내기로 악명 높은 해결사였다. 강희찬이 가장 신뢰하는 사냥개 중 한 마리이기도 했다.
“우리가 가로챈다.”
태형의 짤막한 명령에 창수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며 시동을 걸었다. 웅웅거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스타렉스가 빗길을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양재동 외곽의 어두운 이면도로. 가로등마저 듬성듬성 켜져 있어 음침한 기운이 감도는 왕복 2차선 도로에 검은색 카니발 두 대가 빗길을 뚫고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최진상의 몰락으로 조직이 어수선해진 틈을 타, 강희찬이 비자금 현금과 이중 장부를 서둘러 빼돌리는 중이었다.
카니발 뒤차 안, 조수석에 앉은 배태식은 초조한 듯 연신 손톱을 깨물며 운전사를 재촉하고 있었다.
“더 밟아. 기획실 최 실장 저 꼴 난 거 못 봤어? 검찰 새끼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고. 강 사장님이 장부부터 안전하게 옮기라고 신신당부하셨다.”
그때였다.
쿵-!
굉음과 함께 뒤차의 후미를 들이받는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배태식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가 안전벨트에 걸려 튕겨 나갔다.
“아씨! 뭐야! 어떤 새끼야!”
배태식이 머리를 움켜쥐며 백미러를 보았다. 낡은 은색 스타렉스 한 대가 전조등을 끈 채 그들의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스타렉스는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다시 한번 엔진 굉음을 내며 카니발의 옆구리를 거칠게 들이받았다.
깡-! 콰콰쾅!
카니발이 비틀거리며 빗길에 미끄러져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멈춰 섰다. 앞서 달리던 선두 카니발 역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춰 섰고, 안에서 덩치 큰 깡패들이 연장을 들고 쏟아져 나왔다.
“이 미친 새끼들이 눈이 삐었나!”
배태식이 문을 열고 내리며 허리춤에서 삼단봉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스타렉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내린 인물들을 본 배태식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너…… 너희들……!”
전조등의 불빛을 등지고 서서히 다가오는 거구의 박마동과, 손가락 사이로 예리한 은빛 칼날을 놀리는 임창수. 그리고 그 뒤에서 빗방울을 맞으며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걸어 나오는 사내.
강태형이었다.
“강, 강태형……? 네놈이 감옥에서 어떻게……!”
배태식은 귀신이라도 본 듯 비명을 질렀다. 3년 전 태형이 음모에 빠져 몰락할 때, 그를 짓밟았던 하부 조직원 중 하나가 바로 배태식이었다.
태형은 대답 대신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이 신호였다.
“마동아, 정리해라.”
“예, 형님.”
박마동이 야수 같은 표정으로 포효하며 앞으로 돌진했다. 배태식의 부하 셋이 동시에 사시미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으나, 마동은 가볍게 몸을 피해 첫 번째 놈의 손목을 낚아채 그대로 꺾어버렸다.
뼛가루가 부서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칼이 떨어졌고, 마동은 놈의 멱살을 잡아 옆에 있던 카니발 창문에 들이받았다. 와장창 창문이 박살 나며 깡패가 핏방울을 뿌리며 쓰러졌다.
동시에 임창수는 바람처럼 빗속을 가르며 배태식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랜만이다, 태식아? 그동안 많이 컸네?”
“이 개새끼가!”
배태식이 악을 쓰며 삼단봉을 휘둘렀으나, 창수의 움직임이 한 수 위였다. 창수는 삼단봉의 궤적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배태식의 오른팔 손목을 예리하게 그어버렸다.
스윽-!
“끄아악!”
손목의 힘줄이 끊어지며 삼단봉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창수는 멈추지 않고 배태식의 턱을 무릎으로 가격한 뒤, 쓰러지는 그의 머리를 걷어차 진흙바닥에 처박아버렸다.
단 2분도 걸리지 않은 참상이었다. 빗물과 피가 섞여 도로 위로 붉게 흘러내렸다.
태형은 진흙바닥에서 신음하는 배태식의 앞으로 절뚝거리며 다가갔다. 차가운 빗방울이 태형의 이마를 타고 내려와 턱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태형은 지팡이 끝으로 배태식의 부러진 손목을 지그시 눌렀다.
“아아악! 태형 형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전 그냥 강희찬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최진상과 똑같은 변명. 비겁한 사냥개들의 공통된 최후였다.
태형은 얼굴 하나 붉히지 않은 채 나직하게 물었다.
“강희찬이 어디 있나.”
“그, 그것은…….”
배태식이 망설이자, 태형은 지팡이에 힘을 더 실었다. 비명이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양재동 본사 빌딩…… 5층 특별 집무실에 있습니다! 지금 장부 정리하고 해외로 튈 준비를 하고 있어요! 진짜입니다!”
태형은 지팡이를 뗐다. 그리고 창수에게 눈짓했다. 창수가 카니발 뒷좌석 문을 열고 가죽 가방 두 개를 꺼내왔다. 가방을 열자 오만 원권 뭉치들과 함께 두꺼운 비밀 장부 파일들이 가득 차 있었다.
“가져가라.”
태형이 지팡이를 짚으며 스타렉스로 몸을 돌렸다.
“강희찬이 둥지를 떠나기 전에 숨통을 끊는다. 양재동으로 간다.”
어둠 속에서 스타렉스의 전조등이 다시 한번 번쩍였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양재동을 향해, 철혈단의 핏빛 추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