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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의 맹약21화

철혈의 맹약

철혈의 맹약

21화: 어둠 속의 둥지

빗방울이 가늘어진 서울의 밤거리는 네온사인 불빛을 머금어 도로마다 오색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영종도 선착장을 빠져나온 검은색 카니발 차량은 단속 카메라를 교묘히 피하는 우회로만을 골라 달려 강북의 한적한 변두리 공업지대에 멈춰 섰다. 오래된 철공소와 자재 창고들이 밀집해 있어 밤이 되면 사람의 발길이 완전히 끊기는 곳이었다.

차량의 시동이 꺼지자, 강태형이 절뚝거리는 다리로 문을 열고 내렸다. 철 지팡이가 바닥의 고인 빗물을 짚을 때마다 툭, 툭 하는 나직한 파열음이 조용한 밤공기를 흔들었다.

“여기입니다, 형님.”

박마동이 앞장서며 굳게 닫혀 있던 낡은 셔터문을 위로 들어 올렸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드러난 내부 공간은 겉보기에는 오래된 기계 부품이 쌓인 폐창고였지만,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연소희가 미리 손을 써둔 비밀 사무실이 나타났다. 방음벽이 꼼꼼히 쳐진 넓은 공간에 수십 대의 모니터와 고성능 서버 장비들이 웅웅거리며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연소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익숙한 걸음으로 중앙 제어석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곳은 예전 아버님이 사설 정보망을 구축할 때 쓰던 안전가옥 중 하나예요. 금성그룹의 감시망은 물론이고, 경찰의 통신 추적에서도 완전히 차단된 곳이죠. 최진상이 몰락했으니 금성그룹 내부도 지금쯤 한바탕 뒤집어졌을 거예요.”

모니터 화면 가득히 금성그룹의 내부 조직도와 실시간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뉴스 화면에는 ‘금성그룹 기획실장 최진상, 뇌물 수수 및 살인교사 혐의로 체포’라는 헤드라인이 붉은 글씨로 번쩍이고 있었다.

태형은 모니터 화면 속에서 휠체어에 탄 채 양 무릎에 붕대를 감고 들것에 실려 가는 최진상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때 의형제라 부르며 목숨을 맡겼던 사내의 비참한 말로였지만, 태형의 눈동자에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오만수는 움직였나?”

태형의 질문에 소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화면을 전환했다.

“예상대로예요. 사건이 터진 지 불과 두 시간 만에 금성그룹 법무팀은 최진상의 모든 행위를 ‘개인의 일탈’로 규정하고 꼬리 자르기에 나섰어요. 오만수 회장과의 연관성을 증명할 만한 직접적인 물증은 기획실 서버가 통째로 포맷되면서 일단 막힌 상태고요. 역시 노련해요.”

옆에 서 있던 임창수가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 손가락 사이로 가볍게 돌리며 혀를 찼다.

“쳇, 늙은 구렁이 같은 영감탱이. 자기 오른팔이 잘려 나갔는데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이거지?”

“오만수에게 최진상은 애초에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사냥개에 불과했으니까.”

태형이 지팡이를 짚은 채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며 차갑게 말했다.

“진상이가 가졌던 권력과 이권은 결국 오만수의 통제 아래 있던 것들이다. 진상이가 사라진 지금, 그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밑바닥 놈들이 먼저 요동칠 거다.”

태형의 말이 맞았다. 금성그룹은 겉으로는 합법적인 대기업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그 거대한 몸집을 유지하는 자금의 원천은 여전히 지하 세계의 불법 이권들이었다.

“그럼 첫 번째 타깃은 어디로 잡을까요, 형님?”

박마동이 거구의 몸을 앞으로 숙이며 물었다. 그의 두꺼운 주먹이 가볍게 쥐어질 때마다 뼈마디가 우둑거리며 위압적인 소리를 냈다.

태형은 품에서 오래된 가죽 수첩을 꺼냈다. 수첩 안에는 3년 전 자신이 감옥에 가기 전, 금성파의 자금 흐름을 기록해 두었던 비밀 장부의 일부가 적혀 있었다. 태형의 손가락이 수첩의 한 구절을 짚었다.

“‘금성 캐피탈’. 겉으로는 합법적인 소액 대출 업체지만, 실제로는 정재계 인사들의 비자금 세탁과 명동 사채시장의 지하 자금을 끌어다 쓰는 오만수의 사설 금고다. 그리고 그곳을 관리하는 놈이 바로…….”

“독사, 강희찬이군요.”

소희가 태형의 말을 이어받으며 모니터에 한 사내의 프로필을 띄웠다. 날카로운 눈매에 뺨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강희찬. 최진상의 직속 수하이자 금성 캐피탈의 실질적 대표예요. 최진상이 쓰러진 지금, 검찰 수사가 자신에게 뻗어오기 전에 장부를 정리하고 자금을 빼돌리려 움직일 게 뻔해요.”

태형은 모니터 속 강희찬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강희찬이 쥐고 있는 비자금 장부와 현금 수송 경로를 파악해라. 오만수의 목을 죄기 위해서는 우선 그 노인의 숨통을 불어넣는 돈줄부터 말려 죽여야 한다.”

“알겠습니다. 바로 움직이죠.”

창수가 나이프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눈에는 오랜만에 느끼는 전율과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태형은 지팡이를 단단히 쥐고 방의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3년 동안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오직 복수만을 위해 갈고 닦았던 칼날이, 이제 서서히 검은 집을 나와 세상을 향해 겨눠지고 있었다.

“철혈단의 첫 번째 움직임이다. 자비는 없다. 놈들의 손과 발을 하나씩 잘라내고, 마지막엔 오만수의 심장을 취한다.”

어두운 사무실 안, 태형의 나직한 선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모니터의 푸른 빛에 비친 사내들의 얼굴에는 피할 수 없는 피바람이 예고되어 있었다. 본격적인 복수의 2막이 마침내 그 서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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