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맹약

20화: 배신의 대가
하늘을 가득 뒤덮은 시커먼 폭풍우는 영종도 남단의 거칠고 사나운 검은 바다를 사정없이 집어삼킬 듯 덮치고 있었다.
성난 집채만 한 파도가 낡은 콘크리트 선착장을 매섭게 때릴 때마다, 차가운 하얀 포말과 비린 바닷물 빗방울이 허공으로 거칠게 흩날려 뺨을 찔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낡은 노란 우비를 눌러쓴 최진상은 수십 억의 달러와 현금이 가득 들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가죽 가방을 양팔로 꽉 움켜쥔 채, 선착장 끝자락에서 구두 굽을 짓밟으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3년 동안 금성그룹 기획실장으로 세상을 쥐락پ락하던 그의 오만하고 단정하던 얼굴은 차가운 빗물 &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에 젖어 비참하게 일그러졌고, 뱀처럼 차갑던 눈동자는 벼랑 끝에 몰린 비참한 쥐새끼처럼 극도의 공포와 초조함으로 사시나무 떨듯 잘게 떨리고 있었다.
사방에는 최진상이 마지막 돈줄을 털어 고용한 직속 개인 경호원 7~8명이 비옷을 눌러쓴 채 권총과 삼단봉을 쥐고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저 멀리 어두운 파도 너머에서 등대를 완전히 끈 낡은 밀항 목선 한 대가 엔진 소리를 죽인 채 서서히 선착장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최진상의 눈에 구원의 한 줄기 빛이 스쳤다.
“온다…… 드디어 왔어…….”
최진상이 마른침을 삼키며 배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번쩍-!
선착장 진입로 방향에서 세 대의 검은색 카니발 차량이 굉음을 내며 미끄러져 들어왔다. 차량의 하이빔 전조등이 일제히 켜지며 백색의 눈 부신 광선이 최진상과 경호원들의 시야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뭐, 뭐야!”
경호원들이 눈을 가리며 당황하는 사이, 카니발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철혈단’ 대원들이 빗속으로 쏟아져 나왔다.
“가라! 전부 쓸어버려!”
임창수의 매서운 고함과 함께 기습이 시작되었다.
경호원들이 총을 뽑으려 했으나, 박마동이 먼저 거대한 바위처럼 들이닥쳤다. 마동의 쇠망치가 첫 번째 경호원의 손목을 후려쳐 총을 날려버렸고, 이어 그의 거대한 왼손이 경호원의 안면을 쥐고 그대로 콘크리트 바닥에 메쳐버렸다. 콰직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경호원이 기절했다.
동시에 창수는 빗속을 미끄러지듯 파고들어 예리한 나이프로 경호원들의 허벅지와 손목의 힘줄을 기민하게 베어 나갔다. 순식간에 선착장은 피비린내와 경호원들의 끔찍한 비명으로 가득 찼다. 단 1분 만에 최진상이 믿었던 최후의 방어선은 진흙과 핏물 바닥 위로 참혹하게 구겨져 내렸다.
“이, 이럴 수가…….”
선착장 바로 앞까지 도달했던 밀항 목선의 선장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그는 최진상의 절규 섞인 외침을 무시한 채, 즉시 디젤 엔진을 역회전시켜 배의 기수를 돌렸다. 목선은 검은 파도 너머 어둠 속으로 굉음을 내며 야속하게 달아나 버렸다.
“야! 거기 서! 나 태우고 가란 말이야!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최진상은 진흙투성이가 된 가방을 안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절망적으로 소리쳤지만, 배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때, 거센 빗소리를 뚫고 선착장 진입로에서부터 둔탁하고도 일정한 금속성 마찰음이 들려왔다.
탁-. 탁-. 탁-.
지팡이가 콘크리트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최진상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전조등 불빛을 등지고,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절뚝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낡은 검은색 오버코트 깃을 세우고, 깊은 눈동자 속에 푸른 불꽃을 품은 사내. 강태형이었다.
3년의 피 묻은 세월을 돌고 돌아 마주한 지옥 같은 재회였다.
태형은 최진상의 코앞에 멈춰 섰다. 그의 얼굴은 폭우에 젖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진상아.”
태형의 나직한 목소리에 최진상은 가방을 내팽개치고 바닥을 기어 태형의 구두 끝을 붙잡았다. 콧물과 눈물, 빗물이 뒤섞인 그의 얼굴은 추잡하기 그지없었다.
“태, 태형아! 내 의형제 태형아! 내가 잘못했다! 보육원 시절부터 우린 형제였잖아! 이거 다 오만수 회장이 시켜서 한 짓이야! 난 그냥 그 노인네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내가 가진 돈 다 줄게! 이 가방 안에 수십 억이 들어있어! 이거 다 가질 테니 제발 살려만 줘!”
최진상은 비열하게 목숨을 구걸하며 책임을 오만수에게 전가했다. 하지만 그의 소매 안쪽에서 차가운 단검 한 자루가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나오는 것을, 태형의 날카로운 눈은 놓치지 않았다.
최진상이 살기 어린 비명과 함께 태형의 허벅지를 향해 단검을 찔러왔다.
“죽어라, 이 병신 새끼야!”
태형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들고 있던 지팡이를 짧게 쥐고 구자명의 손목을 박살 냈던 그 궤적으로 최진상의 손목을 매섭게 내려쳤다.
빡-!
“끄아악!”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허공으로 날아가 바다로 떨어졌다. 최진상은 부러진 손목을 움켜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태형은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가만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절뚝거리는 오른쪽 다리를 끌어, 주저앉아 신음하는 최진상의 오른쪽 무릎 위로 다가갔다.
“태, 태형아? 안 돼…… 하지 마…… 제발!”
태형은 최진상의 눈물 어린 비굴한 구걸을 차갑게 묵살했다. 그는 잃어버려 감각이 둔한 자신의 오른쪽 다리 대신, 멀쩡한 왼쪽 다리에 모든 신체 무게 중심을 단단히 실었다. 그리고 묵직한 가죽 구두 굽으로 최진상의 오른쪽 무릎 뼈의 정중앙 관절을 온 체중을 한 번에 실어 가차 없이 내리찍으며 짓밟아 뭉개버렸다.
우드득-! 바스락! 콰직-!
“아아아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이이익! 살려줘, 제발!”
폭풍우 치며 포효하는 거친 서해 바다를 찢어발길 듯한 극도의 고통 서린 비명이 차가운 선착장 사방에 끔찍하게 메아리쳤다. 살점이 터지고 뼈마디가 조각나는 참혹한 감각이 발끝을 타고 전해졌지만, 태형의 석상 같은 표정에는 미세한 동정 한 자락조차 깃들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심판은 아직 절반밖에 끝나지 않았다. 태형은 천천히 몸을 돌려 피투성이가 되어 뒤틀린 최진상의 반대편 왼쪽 무릎 관절 위로 다시 무거운 가죽 구두를 무자비하게 올렸다.
“제발! 태형아! 살려줘! 살려……!”
콰직-! 우드득!
두 번째 가혹한 뼈 조각나는 파열음과 함께, 최진상의 왼쪽 무릎마저 반대 방향으로 기괴하게 꺾여 완전히 조각나 바스러졌다.
최진상은 진흙바닥에 처박힌 채 사지를 비틀며 비참하게 울부짖었다. 3년 전 자신이 강태형에게 가했던 그 잔혹한 폭력이, 뼈가 으스러지는 극도의 고통과 절망이 되어 자신의 두 다리에 고스란히 새겨진 것이었다.
태형은 진흙을 기어 다니며 오열하는 배신자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너를 죽이는 건 너무 과분한 자비다, 진상아.”
태형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아 소름 돋도록 서늘했다.
“평생 다리를 절며 차가운 감옥 벽을 바라봐라. 그리고 네가 짓밟았던 나와 내 부하들의 고통을 매일 밤 뼈저리게 되새기며 대가를 치러라.”
사실 태형은 사적인 살인으로 스스로 범죄자가 되는 어리석은 길을 택하지 않았다. 소희의 도움으로 최진상이 저지른 노 영감 살인교사 혐의, 사설 카지노 불법 운영 및 뇌물 장부의 모든 실물 데이터 파일은 이미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와 경찰청 외사과에 전송된 상태였다.
우우우웅-.
멀리 선착장 진입로 너머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폭풍우를 뚫고 붉은 불빛과 함께 몰려오고 있었다. 최진상의 체포를 위해 출동한 검찰 수사관들과 경찰차들의 행렬이었다.
태형은 바닥에 뒹굴고 있던 자신의 지팡이를 들어 올려 고쳐 잡았다. 그리고 비참하게 오열하는 최진상을 내버려 둔 채, 지팡이로 바닥을 딛으며 몸을 돌렸다.
“철수한다.”
태형의 명령에 창수와 마동, 그리고 철혈단 대원들은 신속하게 카니발 차량에 나누어 탑승했다. 세 대의 카니발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오는 경찰차들의 전조등 불빛을 피해, 선착장 반대편의 어두운 해안도로를 따라 유유히 빠져나갔다.
선착장 바닥에는 무릎이 으스러진 채 진흙 범벅이 되어 울부짖는 최진상 위로 차가운 경찰의 서치라이트 불빛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배신자의 화려했던 왕국은 이렇게 처참하고도 비참하게 종말을 고했다.
폭우를 뚫고 달리는 카니발 뒷좌석.
태형은 창틀에 턱을 괸 채, 창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 너머로 저 멀리 어둠 속에 우뚝 솟은 서울 강남의 금성그룹 빌딩이 있는 하늘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무릎 위에 놓인 검은 가죽 수첩이 차 안의 어두운 조명 아래 희미하게 빛났다.
옆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정리하던 연소희가 뺨의 핏자국을 쓸어내리며 슬며시 미소를 지은 채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의 태형을 바라보았다.
“최진상은 이제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한 채 감옥 벽을 보며 기어 다녀야 할 거예요. 3년 전 당신의 다리를 부러뜨린 배신의 1차 복수는 완벽하게 집행되었네요.”
옆에서 묵묵히 앉아 피 묻은 주먹을 털어내던 임창수와 박마동의 시선도 태형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태형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흔들리는 차창 밖으로 번쩍이는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식지 않은 거대하고 서늘한 복수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이제 겨우 주인의 명령에 꼬리를 흔들던 사냥개 한 마리를 치웠을 뿐이다.”
태형이 검은 가죽 수첩을 움켜쥐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우리를 사지로 몬 진짜 몸통 오만수 회장. 그리고 그를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정재계 카르텔은 아직 강남의 그 화려한 펜트하우스 뒤에서 건재하게 이 밤을 지배하고 있지.”
오만수 회장. 그리고 금성그룹이 구축해 놓은 거대한 정재계 카르텔.
최진상의 파멸은 거대한 복수극의 끝이 아닌, 진짜 흑막을 무너뜨리기 위한 위대한 전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태형은 지팡이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배신자의 무릎을 꺾은 복수귀들의 차량 행렬은, 이제 더 거대한 거인 오만수의 심장을 겨냥하며 어두운 서울의 심장부를 향해 비장하게 질주해 나갔다. 마침내 2막, ‘철혈의 기반 구축’을 향한 새로운 피의 전쟁터가 그들 앞에 거대하게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