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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 차원 통로 관리인입니다5화

홍대 앞 차원 통로 관리인입니다

홍대 앞 차원 통로 관리인입니다

5화: 초록빛을 따라온 성녀

지하실 문 아래로 새어 나오던 초록빛은 시간이 갈수록 짙어졌다.

한결은 카운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밤새 용사와 마왕 사이에 서 있었던 다리가 아직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떡볶이값을 치른 뒤 남은 지폐부터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은 돈을 셀 때가 아니었다.

[정령계 발신 신호 오류.]

[예정 도착 경로 재탐색 중.]

"재탐색이면 길을 잃었다는 말 아닌가요?"

시스템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지하실 쪽에서 유리병을 굴린 듯한 맑은 소리가 났다. 초록빛이 문틈을 밀어 올리자 낡은 바닥까지 얇게 흔들렸다.

201호 문이 열렸다. 카이안은 대검을 들지 않았지만 허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잠에서 막 깬 얼굴인데도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이번에는 어떤 적인가."

"손님일 수도 있어요. 검은 방에 두고 오셨죠?"

"규칙이니 두고 왔다."

카이안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빈손을 보였다. 한결은 그 대답이 조금 안심되면서도 이상하게 웃겼다. 대검을 두고 오는 일에 이렇게 큰 결심이 필요할 줄은 몰랐다.

202호 문도 조용히 열렸다. 벨제아는 후드 위로 왕관 장식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한 손에는 어제 산 초코 우유가 들려 있었다.

"초록빛은 마계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나를 의심하지 마라."

"아직 아무도 의심 안 했는데요."

"그렇다면 앞으로도 하지 마라."

한결은 지하실 열쇠를 움켜쥐었다. 새 손님이 무엇이든 통로가 이렇게 흔들리면 골목까지 문제가 번질 수 있다. 그는 앞장서 계단을 내려갔다.


석판 위의 문양은 평소의 푸른빛 대신 초록빛으로 뒤집혀 있었다.

빛은 원형 문양을 따라 돌지 않았다. 바닥을 벗어나 벽을 타고 기어올랐다. 지하실 작은 창문 너머 골목의 가로수까지 잎을 흔들었다.

한결이 난간을 붙잡자 손등 문양이 싸늘해졌다. 손끝에 닿은 진동이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경고. 도착 좌표 고정 실패.]

[지상 개방 가능성 증가.]

"지상으로 열린다는 게 골목에 문이 난다는 뜻이에요?"

대답할 시간도 없었다.

초록빛 한가운데가 찢어지듯 벌어졌다. 바람과 풀 냄새가 쏟아져 나왔다. 이어 누군가가 휘청이며 바닥에 떨어졌다.

연한 금발에 뾰족한 귀를 가진 여자가 한쪽 무릎을 짚었다. 흰 망토에는 풀잎과 이슬이 잔뜩 묻어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에는 작은 꽃잎이 끼어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눈은 숲의 가장 맑은 부분처럼 초록이었다.

"성소에 도착한 것이 맞습니까?"

한결은 잠깐 대답을 잊었다.

"여긴 홍대예요."

"홍대가 어느 숲의 이름입니까?"

카이안이 낮게 말했다.

"엘프다."

벨제아는 초코 우유 빨대를 뺀 뒤 덧붙였다.

"길치 엘프처럼 보이는군."

여자는 화들짝 일어섰다.

"저는 아리엘입니다. 정령계 성소의 길잡이이자 성녀입니다. 길치가 아닙니다. 단지 푸른 나무가 많은 방향을 따라왔을 뿐입니다."

한결은 지하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가로수를 떠올렸다. 홍대 골목에도 나무는 있었지만 성소로 착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방향 감각이 조금 위험한 것 같은데요."

아리엘이 반박하려는 순간 석판 위에서 작은 불빛 열두 개가 튀어나왔다.

콩알만 한 초록 불빛들은 날개도 없이 공중을 폴짝폴짝 뛰었다. 몇 개는 아리엘의 망토 주변을 돌다가 지하실 창문 틈으로 사라졌다. 나머지는 계단을 향해 쏜살같이 올라갔다.

아리엘의 얼굴이 하얘졌다.

"잠깐. 그 아이들은 안 됩니다."

"뭐가 안 되는데요?"

"도시의 빛을 따라가면 길을 잃습니다."

한결은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 말은 너무 늦게 하지 마세요!"


정령들은 이미 골목을 장악하고 있었다.

초록 불빛 하나가 카페 간판 위에 내려앉자 하얀 글자가 잎사귀 모양으로 흔들렸다. 다른 하나는 화분의 흙을 뒤집어쓰고 전봇대 위로 올라갔다. 이른 출근길의 행인 몇 명이 걸음을 멈추고 휴대폰을 들었다.

한결은 식은땀이 났다.

"촬영하지 마세요! 조명 고장입니다!"

누가 봐도 조명 고장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너무 피곤한 얼굴의 청년이 진지하게 외치는 모습을 보고 잠깐 망설였다.

카이안이 골목 입구에 섰다. 그는 팔을 벌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을 뿐이다.

"이 길은 지나갈 수 없다."

"왜요?"

"바닥이 위험하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카이안의 목소리는 왕국의 성문을 닫는 기사처럼 단호했다. 행인들은 서로 얼굴을 보더니 다른 골목으로 돌아갔다.

벨제아는 팔짱을 끼고 간판 위 정령을 노려봤다.

"내가 검은 안개로 덮으면 조용해질 텐데."

"능력 사용 금지요."

"너의 규칙은 정말 많군."

"규칙 없으면 지금쯤 다들 영상 찍고 있어요."

아리엘은 손을 꼭 모은 채 정령들을 쫓았다. 발걸음은 빨랐지만 눈동자는 흔들렸다.

"정령들은 겁을 먹으면 빛나는 곳으로 모입니다. 제 목소리를 들으면 돌아올 텐데 이곳의 소리가 너무 많아요. 쇳소리와 사람들 마음 소리가 서로 겹쳐요."

한결은 휴대폰을 꺼냈다. 지도 앱 화면에는 가느다란 골목과 작은 공원 표시가 빽빽했다.

"조용한 나무 있는 데로 데려가면 되죠? 물이 있고 흙도 있는 곳."

아리엘이 화면을 들여다봤다.

"이 얇은 판이 길을 보여 줍니까?"

"네. 파란 점이 저고요."

"그 작은 점이 그대라니 너무 납작합니다."

"지금은 납작한 저를 따라와요. 저쪽에 화단 있어요. 카이안 씨는 계속 사람 막아 주세요. 벨제아 씨는 빛나는 걸 싫어하는 정령이 있으면 초코바로 유인해 볼래요?"

벨제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령이 당분을 좋아하나?"

"모르겠는데요. 그래도 간판 빛보다 낫겠죠."

벨제아는 한참 초코바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포장을 뜯어 반으로 쪼갰다.

"내 귀한 비상식량을. 이 빚은 기억해 두겠다."

"나중에 푸딩으로 갚을게요."

아리엘은 두 손을 들어 가슴 앞에 모았다. 입술 사이에서 아주 낮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말이라기보다 바람에 스치는 잎사귀 소리에 가까웠다.

한결은 휴대폰 손전등을 켜서 골목 끝 화단을 비췄다. 아리엘의 노래가 닿을 때마다 정령들이 하나씩 고개를 돌렸다. 벨제아가 초코바 조각을 손가락 위에서 흔들자 작은 정령 둘이 호기심 어린 빛을 내며 따라왔다.

"정말 오네요."

"내 간식의 위대함을 의심했나."

그때 가장 큰 정령 하나가 건물 벽을 타고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다른 정령보다 두 배쯤 컸다. 녀석은 초록 실 같은 빛을 입에 물고 있었다.

아리엘이 숨을 들이켰다.

"저건 제가 보낸 길잡이 실입니다."

"그럼 잘된 거 아니에요?"

"성소로 이어진 실이 아니에요. 제가 아는 정령계의 길도 아닙니다."

큰 정령은 지하실 쪽으로 달려갔다.

한결은 휴대폰을 꽉 쥐었다. 길을 잃은 건 손님 한 명이 아니었다. 통로를 타고 온 길 자체가 어딘가에서 비틀린 모양이었다.


큰 정령은 스테이 이계 지하실 문 앞에서 멈췄다.

문 아래 초록빛이 정령의 입에 문 실과 닿을 듯 말 듯 흔들렸다. 아리엘이 한 발 앞으로 나가 손을 뻗었다.

"이리 오렴. 돌아가자."

정령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초록 실이 팽팽해지자 지하실에서 낮은 진동이 올라왔다.

[통로 안정도 저하 감지.]

한결은 아리엘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억지로 데려가면 또 흔들리는 거 아니에요?"

아리엘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은 길을 강요받으면 빛을 찢습니다. 저는 길잡이인데도 이 아이들을 낯선 곳으로 끌고 왔어요."

그 말 끝이 낮아졌다. 아리엘은 망토 끝에 묻은 풀잎을 내려다봤다. 성소로 가야 했던 사람이 낯선 도시의 골목에서 길을 잃은 정령들 앞에 서 있었다.

한결은 지하실 문과 정령을 번갈아 봤다. 강제로 문을 닫으면 통로가 흔들린다. 강제로 정령을 끌면 빛이 찢어진다. 결국 또 하나뿐이었다.

밖으로 내보내기보다 머물 곳을 먼저 만드는 것.

그는 로비 구석의 오래된 화분을 떠올렸다. 시든 몬스테라가 창가에서 겨우 잎을 붙들고 있었다. 한결은 카운터 아래 물통과 빈 화분 하나를 들고 나왔다.

"성소는 아니지만 쉬어 갈 곳은 만들 수 있어요."

그는 지하실 문 옆에 화분을 내려놓고 물을 부었다. 마른 흙이 천천히 물을 삼켰다. 잠시 뒤 정령 하나가 조심스레 화분 가장자리에 내려앉았다.

카이안이 낡은 화분을 내려다봤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모르겠어요. 그래도 자리를 내주는 건 할 수 있잖아요."

벨제아는 남은 초코바를 화분 옆에 놓았다.

"여기에도 식량은 필요할 테니."

"정령이 초콜릿 먹는 건 아직 확인 안 됐는데요."

"그러면 나중에 내가 먹겠다."

아리엘의 입가에 아주 작은 웃음이 번졌다. 그녀는 이번에는 정령을 부르지 않았다. 화분 앞에 무릎을 꿇고 낮게 말했다.

"여기는 낯선 숲입니다. 돌아가고 싶으면 함께 길을 찾을게요. 쉬고 싶으면 내가 곁에 있겠습니다."

큰 정령이 입에 문 초록 실을 놓았다.

실은 공중에서 한 번 꼬였다가 힘없이 풀렸다. 정령은 천천히 화분 위로 내려왔다. 다른 불빛들도 그 주변에 모여들었다.

아리엘의 노래가 다시 시작됐다. 이번에는 길을 명령하는 노래가 아니었다. 낯선 밤을 지나온 이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짧은 자장가였다.

손등 문양이 따뜻하게 빛났다.

[정령계 발신 신호 안정화.]

[신규 투숙객 등록을 진행합니다.]

푸른 글자 아래 아리엘의 이름이 떠올랐다.

[등록 투숙객 003: 아리엘.]

[출신: 정령계.]

[분류: 성녀.]

아리엘은 글자를 읽고 놀란 눈으로 한결을 봤다.

"이곳에도 성녀를 받아들이는 규칙이 있군요."

"성녀라서 받는 건 아니고요. 지금은 길 잃고 피곤한 손님이라 받는 겁니다."

한결은 카운터에서 203호 열쇠를 꺼내 건넸다.

"일단 방부터 드릴게요. 길 찾기는 자고 나서 해요. 아침에는 길 잃은 사람도 조금 덜 길을 잃거든요."

아리엘은 열쇠를 두 손으로 받았다.

"고맙습니다. 저는 분명 성소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이곳으로 왔어요."

벨제아가 화분의 정령을 내려다봤다.

"그러면 길이 너를 찾은 것일 수도 있겠군."

카이안은 지하실 문 쪽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문은 닫혔다. 하지만 흔적은 남았다."

한결도 손등을 내려다봤다. 안정화라는 글자 아래 희미한 한 줄이 더 떠 있었다.

[경로 기록 불일치: 미확인 우회 흔적 1건.]

그는 그 문장을 아리엘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손님에게는 방과 아침이 먼저였다. 통로의 이상은 그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아리엘이 203호로 올라가자 화분 위 정령들이 잎맥처럼 가느다란 빛을 남겼다. 지하실 문 아래의 초록빛은 마침내 사라졌다.

다만 한결의 손등에 남은 한 줄은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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