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앞 차원 통로 관리인입니다

6화: 성녀의 리모델링 견적서
아침 햇빛은 밤보다 잔인했다.
한결은 로비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카운터에 놓인 양동이를 발끝으로 밀었다. 양동이 바닥에는 밤사이 떨어진 물이 손가락 한 마디쯤 고여 있었다.
톡.
천장에서 다시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물방울이 만든 동심원을 잠깐 보고 통장 앱을 열었다. 화면 속 잔고는 멀쩡한 척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 아래로 펼쳐진 시스템 창은 전혀 멀쩡하지 않았다.
[긴급 보수 항목 재확인.]
[지하 배관 누수: 악화.]
[노후 차단기: 과부하 위험.]
[로비 환기 불량: 투숙 환경 저하.]
[권장 조치 미이행 시 통로 안정도에 간접 영향 가능.]
"간접 영향이 제일 무서운 말인 거 알아요?"
시스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결은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도배나 조명 정도라면 인터넷 영상을 보고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고 전기가 나갈 수 있는 문제는 영상을 보고 배울 일이 아니었다.
창가 화분 앞에서는 작은 정령들이 잎사귀 뒤에 몸을 숨긴 채 졸고 있었다. 그 사이에 쪼그리고 앉은 아리엘이 물기를 머금은 흙을 손끝으로 살폈다.
"물길이 좋지 않습니다."
"그건 저도 알겠어요. 바닥까지 새고 있으니까."
"아뇨. 물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리엘은 고개를 들어 로비를 천천히 둘러봤다. 낡은 소파와 뒤집힌 전단지 꽂이, 창가에 밀려난 화분, 카운터 옆에 쌓인 수리 목록까지 시선이 훑고 지나갔다.
"빛은 창가에서 멈추고 바람은 복도를 지나가지 못합니다. 여기서는 오래 머문 마음도 한쪽으로 고여 있을 것 같아요."
한결은 그 말이 이상하게 들리면서도 반박하지 못했다. 로비에 들어올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던 것은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돈 때문인 것도 맞았다. 다만 눅눅한 벽지 냄새와 막힌 공기가 그 걱정을 더 크게 부풀렸을지도 몰랐다.
카이안이 201호에서 내려왔다. 그는 잠을 조금 잔 모양인지 눈 밑의 그늘이 어제보다 옅었다. 그래도 로비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천장이 무너질 가능성은?"
"그 정도면 제가 먼저 무너지죠."
"질문에 답이 아니다."
202호 문도 열렸다. 벨제아는 한 손에 초코 우유를 들고 있었다. 왕관 장식이 삐죽 나온 후드 아래로 피곤한 눈이 보였다.
"이 건물은 왜 아침마다 다른 곳이 망가지나. 마계 궁정도 이 정도로는 무너지지 않았다."
"마계 궁정은 예산이 있었겠죠."
벨제아가 빨대를 문 채 멈췄다.
"그곳도 예산은 없었다. 그래서 일이 늘어났다."
한결은 더 묻지 않았다. 피곤한 사람이 피곤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배려는 가끔 말을 이어 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동네 설비 업체 검색 화면을 열었다. 전화를 누르기 전까지는 손가락이 몇 번이나 멈췄다. 견적을 받는다고 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견적서를 보는 순간부터는 모른 척할 수 없게 된다.
한결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게스트하우스인데요. 누수랑 전기 점검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전화를 끊자 아리엘이 조용히 물었다.
"사람의 손으로 고치게 하는군요."
"사람이 사는 곳이니까요."
"그렇다면 저는 사람이 고치기 어려운 곳을 보겠습니다."
아리엘은 화분에 기대어 있던 정령 하나를 손바닥 위로 올렸다. 작은 빛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두 번 깜빡였다.
"이 아이들은 집이 편안한지 압니다. 손님이 들어올 길과 쉬어 갈 자리를 나누어 보겠어요."
한결은 그 말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큰 공사를 할 돈은 없었다. 그래도 길과 자리를 나누는 일은 지금부터 할 수 있었다.
점검 기사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왔다.
회색 작업복 차림의 중년 남자는 로비 천장과 양동이를 보자마자 공구 가방을 내려놓았다. 명함에는 최 사장이라는 이름과 설비·전기·부분 인테리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누수는 위층 배관일 수도 있고 아래쪽일 수도 있어요. 차단기는 어디 있습니까?"
한결은 지하실 쪽을 가리켰다가 손을 멈췄다. 문 아래에는 더 이상 초록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문을 활짝 열어 낯선 사람에게 석판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지하 창고에 있는데 습기가 좀 심해요. 제가 먼저 확인하고 안내할게요."
최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면 더 봐야죠. 물길이 아래에서 막히면 위는 아무리 손봐도 소용없습니다."
그 말에 한결의 목이 바싹 말랐다.
카이안이 아무 말 없이 지하실 문 앞에 섰다. 거대한 체격이 낡은 문을 가리자 창고 문 하나가 성문처럼 보였다.
"짐이 많다."
최 사장이 카이안을 올려다봤다.
"정리 좀 하셔야겠네요."
"내가 하겠다."
카이안은 문 옆에 쌓여 있던 생수 묶음과 낡은 의자를 한 번에 들어 올렸다. 힘을 과시하려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런데 너무 쉽게 옮겨서 오히려 한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행히 최 사장은 감탄만 했다.
"손님이 힘은 좋으시네."
"운동을 좀 해서요."
한결은 황급히 덧붙였다.
벨제아는 소파 끝에 앉아 있던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녀는 아리엘의 화분 쪽을 힐끗 보더니 초코 우유 팩을 카운터 뒤로 밀어 넣었다.
"저 사람은 무엇을 보나?"
"고장 난 데요."
"그럼 고장 나지 않은 데는 보지 못하게 하면 되겠군."
"그게 제일 어렵거든요."
아리엘은 최 사장의 시선이 화분으로 향할 때마다 작은 정령들에게 손짓했다. 정령들은 잎사귀 안쪽으로 쏙 숨었다. 한 마리가 호기심에 얼굴을 내밀자 벨제아가 손가락으로 화분 테두리를 톡 두드렸다.
"숨으라면 숨어라."
정령은 잠시 벨제아를 빤히 보다가 잎 뒤로 들어갔다.
한결은 그 장면을 보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마왕이 정령에게 숨바꼭질을 지시하는 광경은 이상했다. 그래도 지금은 그 이상함이 몹시 고마웠다.
최 사장은 차단기함을 열어 몇 번 스위치를 내렸다 올렸다. 로비 조명이 두어 번 깜빡였다. 지하실 문 아래에서 아주 낮은 진동이 손바닥까지 전해졌다.
한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카운터 모서리를 붙잡았다.
"차단기 오래됐습니다. 누수 때문에 습기 먹으면 위험해요. 환풍기도 거의 안 돌아가고요."
최 사장은 천장 얼룩을 손전등으로 비췄다.
"전면으로 뜯으면 돈이 꽤 듭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새는 배관 잡고 차단기 바꾸고 환풍기부터 달죠. 로비 조명도 두 개만 바꾸면 훨씬 나아질 겁니다."
한결은 그제야 숨을 조금 내쉬었다.
"그럼 지하실은요?"
"문 앞쪽 배관만 보겠습니다. 안쪽은 건물주가 정리하고요. 습기 잡을 자재는 밖에서 넣을 테니 창고는 비워 두세요."
건물주라는 말이 귀에 걸렸다. 한결은 잠깐 대답하지 못했다.
강도철은 건물만 남기고 사라졌다. 관리비와 수리 목록도 함께 남겼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 전화를 받고 견적을 듣고 손님들 앞에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결국 한결이었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최 사장은 치수를 재고 견적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견적서는 한 장이었다.
한결에게는 한 장으로 보이지 않았다. 누수 배관 교체, 차단기 교체, 환풍기 설치, 조명 두 개. 항목마다 숫자가 붙어 있었고 맨 아래 총액은 통장 잔고를 가볍게 짓눌렀다.
그는 카운터 뒤 의자에 앉아 종이를 무릎 위에 놓았다. 최 사장은 자재를 챙기러 갔고 로비에는 손님들만 남았다.
"전면 공사는 안 해도 된대요. 다행이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가 마른 것을 한결도 알았다.
카이안이 견적서를 내려다봤다. 숫자를 전부 읽지는 못하는 얼굴이었다. 다만 한결이 종이를 쥔 손에 힘을 주고 있다는 것은 알아챈 듯했다.
"필요한 수리인가?"
"네. 미루면 더 큰돈 든대요."
"그렇다면 해야 한다."
너무 간단한 대답이라 한결은 잠깐 헛웃음을 흘렸다.
"돈이 있으면 저도 그렇게 말하죠."
카이안은 말이 없었다. 그 대신 창가에 붙어 있던 낡은 소파를 한쪽으로 밀었다. 소파 아래에서는 구겨진 영수증과 오래된 플라스틱 꽃 몇 송이가 나왔다.
벨제아가 꽃을 집어 들었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죽은 꽃 흉내를 내는 물건이다. 이런 것은 왜 두나."
"장식이었겠죠."
"장식이라면 기분이 좋아야 한다. 저건 기분이 나빠진다."
아리엘은 소파가 빠진 자리에 서서 창문을 바라봤다. 오전 햇빛이 바닥까지 길게 들어왔다. 정령 하나가 화분에서 날아와 빛의 끝에 내려앉았다.
"여기에 의자를 두면 좋겠습니다."
"창문 앞에요?"
"네. 들어온 손님이 바로 카운터로 향하기 전에 잠깐 앉을 곳이요. 이쪽 화분은 문 가까이 두고 저쪽은 창가에 두겠습니다. 바람이 지나갈 수 있게요."
한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수리랑 무슨 관계예요?"
아리엘은 웃지 않았다. 대신 진지한 얼굴로 로비 중앙을 가리켰다.
"성소에는 길을 잃은 이들이 옵니다. 그들은 대개 어디로 가야 하는지보다 어디에 멈춰도 되는지부터 알고 싶어 해요. 이곳도 그러합니다."
그녀는 카운터와 현관 사이에 놓인 전단지 꽂이를 옆으로 옮겼다. 좁았던 통로가 조금 넓어졌다.
"문을 열면 바로 길이 보이고 앉을 자리가 보이고 물이 보이면 사람은 덜 불안해합니다. 정령도 비슷해요. 빛과 바람이 서로 막히지 않으면 함부로 흩어지지 않습니다."
한결은 그 말을 듣고 로비를 다시 봤다. 낡고 비좁은 공간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카운터 앞이 트이고 소파가 창가에서 떨어지자 숨통이 조금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아리엘이 들고 있던 화분을 내려놓았다.
"저는 새 벽을 세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있는 곳을 쉬기 좋은 곳으로 바꿀 수는 있어요."
벨제아가 팔짱을 꼈다.
"성녀가 인테리어 업자가 되었군."
아리엘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이곳에서 길을 만드는 일이라면요."
카이안은 한결을 바라봤다.
"무엇을 옮기면 되지?"
한결은 종이를 내려다봤다. 비싼 것은 배관과 전기였다. 그 밖의 일은 손을 움직이면 된다. 낡은 전단지를 치우고 소파를 옮기고 화분에 흙을 갈아 주는 일까지 돈을 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펜을 들었다.
"부분 공사만 할게요. 누수랑 전기랑 환풍기. 나머지는 우리 손으로 해 봐요."
벨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손님한테 일을 시키겠다는 뜻은 아니고요. 도와주면 고맙다는 뜻이에요."
"말을 번거롭게 하는군."
벨제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파 위에 쌓인 낡은 쿠션을 집어 들었다. 카이안은 전단지 꽂이를 들었다. 아리엘은 정령들과 함께 화분의 마른 잎을 골라냈다.
한결은 견적서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글자를 쓰는 동안 손등 문양이 아주 약하게 따뜻해졌다.
[관리인 조치 기록: 긴급 보수 승인.]
이번에는 그 문장이 부담스럽기보다 조금 든든하게 느껴졌다.
오후가 되자 로비에는 드릴 소리와 톱밥 냄새가 가득했다.
최 사장과 보조 기사는 지하실 문 앞쪽 벽을 열어 젖혔다. 한결은 문 안쪽을 단단히 잠그고 그 앞에 청소용 물통과 박스를 쌓아 두었다. 기사들이 보기에는 습기 찬 창고를 비워 둔 것처럼 보일 터였다.
"이 안쪽까지 뜯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최 사장이 말했다.
한결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안쪽은 제가 정리하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오늘은 문 앞 배관만 부탁드릴게요."
최 사장은 잠깐 망설였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배관은 이미 충분히 낡아 있었다. 그는 공구를 들고 몸을 숙였다.
드릴이 벽을 울렸다.
그 순간 지하실 문 너머에서 낮은 진동이 올라왔다.
한결의 손등 문양이 차갑게 식었다.
[통로 인접 구역 진동 감지.]
심장이 내려앉았다. 공사를 멈추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지금 멈추면 새는 물은 그대로 남고 차단기 위험도 해결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기사들에게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아리엘이 한결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화분을 두 손으로 안고 있었다. 화분 위 정령들은 겁먹은 듯 빛을 작게 떨었다.
"문이 아파하고 있습니까?"
"그런 것 같아요."
"억지로 닫으려 하지 마세요. 제가 아이들과 로비를 조용하게 만들겠습니다."
아리엘은 창가 쪽으로 물러나 화분을 새 의자 옆에 놓았다. 정령들이 잎사귀 사이로 하나씩 내려앉았다. 그녀의 노래는 크지 않았다. 공사 소리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바람 같은 음이었다.
카이안은 기사들이 지하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도록 복도 끝에서 낡은 선반을 조용히 옮겼다. 벨제아는 카운터 위에서 깜빡이던 조명 아래에 서서 짧게 말했다.
"이 빛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바꿔라."
최 사장이 웃었다.
"그래서 오늘 바꾸는 겁니다."
한결은 그 평범한 대답에 잠깐 정신이 들었다. 여기서는 평범한 이유를 붙잡아야 했다. 전선이 낡아서 고치고 물이 새서 막고 로비가 답답해서 환풍기를 단다. 그 평범한 일들이 손님과 통로를 지키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지하실 문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계속해 주세요. 대신 이 문은 열지 말아 주세요. 안쪽 정리는 제가 할게요."
최 사장은 엄지를 들어 보였다.
잠시 뒤 새 배관이 연결되고 차단기함의 낡은 부품이 빠져나왔다. 오래된 환풍기가 멈춘 자리에는 새것이 들어갔다. 스위치를 올리자 로비 조명이 한 번 흔들린 뒤 안정적으로 켜졌다.
창문을 조금 열자 바깥 골목의 공기가 들어왔다. 세제 냄새와 볕에 달궈진 아스팔트 냄새, 어딘가에서 구운 빵 냄새가 한꺼번에 섞였다.
아리엘이 눈을 감았다.
"이제 바람이 돌아옵니다."
정령 하나가 화분 위에서 빙글 돌았다. 다른 정령들도 뒤따라 작은 빛을 흩뿌렸다. 이번에는 골목으로 달아나지 않았다.
손등 문양이 다시 따뜻해졌다.
[긴급 보수 항목 일부 처리 완료.]
[로비 환경 안정도 상승.]
한결은 안도하며 손을 폈다.
그러나 바로 아래에 새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외부 접근 흔적 감지.]
[숙소 주변 경계 확인 권고.]
미확인 우회 흔적과는 다른 문구였다. 한결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골목을 바라봤다.
공사차가 천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뒤편, 사람들 사이로 검은 우산 하나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비는 오지 않았다.
한결은 그 우산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 최 사장이 공사비 잔금을 확인해 달라고 불렀고 로비에서는 아리엘이 새 의자 위에 작은 화분을 올려두고 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결제 화면을 열었다.
두려운 일은 많았다. 통장 잔고도 줄어들었고 통로 밖에는 누군가의 흔적도 남았다.
그래도 오늘은 물이 새지 않았다.
한결은 결제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