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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 차원 통로 관리인입니다4화

홍대 앞 차원 통로 관리인입니다

홍대 앞 차원 통로 관리인입니다

4화: 매운맛은 휴가 중인 마왕을 울린다

카이안은 계단 위에 멈춰 서 있었다.

회색 츄리닝 차림인데도 손은 대검 손잡이 위에 올라가 있었다. 잠이 덜 깬 얼굴은 순식간에 전장의 얼굴로 바뀌었다.

"벨제아."

그가 낮게 이름을 부르자 로비 공기가 눌렸다.

벨제아는 초코 우유 팩을 든 채 고개를 들었다. 피곤으로 흐릿하던 눈동자에 검은 불씨가 잠깐 번졌다.

"그 이름을 아직 기억하는가. 용사."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나는 잊고 싶었다. 특히 네가 휘두르던 그 시끄러운 검은."

카이안의 손이 검집을 밀어 올렸다. 한결은 반사적으로 둘 사이에 섰다.

"잠깐만요. 로비 바닥도 안 고쳤어요. 여기서 결투하면 보증금도 없어요."

"비켜라, 한결."

카이안의 시선은 벨제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자는 마계의 왕이다. 많은 사람이 저자의 명령 아래 쓰러졌다."

"알아요. 방금 시스템이 너무 친절하게 알려 줬거든요."

벨제아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작은 몸을 감싼 후드가 흘러내리며 왕관 장식이 드러났다.

"내가 휴가 중이라는 말도 들었을 텐데. 휴가 중인 자를 베는 것이 용사의 정의인가?"

카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결의 손등이 차가워졌다. 푸른 글자가 세 사람 사이에 떠올랐다.

[경고. 등록 투숙객 간 물리 충돌 감지.]

[통로 안정도 저하 및 차원 정체 노출 위험 증가.]

[관리인 개입을 권장합니다.]

"봐요. 건물도 반대합니다."

"건물이 내 전투를 막는다고?"

"건물이 아니라 숙소요. 손님끼리 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카이안의 시선이 한결에게 옮겨 왔다. 그 눈빛만으로도 목이 바짝 말랐다.

한결은 속으로 변호사 사무실 전화번호를 떠올렸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면 바로 울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 뒤로 물러나면 두 사람 사이에 검은 기운과 대검만 남는다.

"카이안 씨는 여기서 치킨 먹고 침대에서 잤죠. 벨제아도 지금은 같은 손님이에요. 지구의 규칙도 숙소의 규칙도 지켜야 합니다."

"그녀가 다시 마계를 위협하면?"

"그때 생각해요. 지금은 푸딩 먹고 온 손님한테 검부터 뽑을 때가 아니고요."

벨제아가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손에서 초코 우유 팩이 구겨졌다.

"마계를 위협한 것은 내가 아니다."

말끝에는 화보다 피로가 더 짙었다.

"전쟁이 끝난 뒤부터는 매일이 더 길었다. 쓰러진 성의 복구안, 굶는 부하들의 배급표, 항복한 영주들의 처분. 모두가 내 도장을 기다렸다."

카이안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믿지 마라. 나는 설명할 기력도 없다."

벨제아의 발밑으로 검은 그림자가 퍼졌다. 로비 전등이 한 번 깜빡였다.

한결은 그녀의 어깨가 떨리는 걸 먼저 봤다. 마왕의 기운보다 지금은 차가운 손가락이 더 신경 쓰였다.

"일단 앉아요."

그는 카운터에서 물병을 꺼내 내밀었다.

"규칙 하나 만들게요. 싸움 금지, 능력 사용 금지, 상대 객실 무단 출입 금지. 불만 있으면 저한테 말하기. 둘 다 똑같이 적용합니다."

"명령인가?" 벨제아가 물었다.

"관리인이 만드는 이용 수칙입니다."

카이안은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한결이 이 숙소의 관리인이라면 따르겠다. 하지만 저 마왕을 용서한 것은 아니다."

"용서 안 하셔도 돼요. 여기서 칼만 안 뽑으면 됩니다."

벨제아는 물병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발치로 돌아갔다.

"휴식을 보장한다면 받아들이겠다."

"보장합니다. 대신 문 잠그고 주무세요."

"그것은 쉬운 조건이군."

한결은 속으로 안도했다. 시스템이 경고창을 지운 뒤에도 손등의 차가움은 남아 있었다.

새벽에 용사와 마왕의 휴전 협정을 중재하는 일이 쉬워서가 아니었다. 그냥 두면 더 어려워질 게 분명해서였다.


객실 열쇠를 찾던 한결은 로비 창문 밖을 봤다.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붉은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달큰하면서도 매운 냄새가 새벽 공기를 타고 들어왔다. 밤을 새운 사람들의 해장국 냄새와 술 냄새 사이에서 유난히 선명했다.

벨제아가 고개를 들었다.

"저 붉은 연기는 무엇이지."

"떡볶이요."

"이름부터 공격적이군."

"떡과 어묵을 매운 소스에 끓인 음식이에요."

벨제아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매운 것이라. 머리가 깨어나는가?"

"속이 먼저 깨어날 수는 있는데요."

카이안이 팔짱을 꼈다.

"마왕에게 또 음식을 바칠 셈인가?"

"배고프고 피곤한 사람은 더 예민해져요. 카이안 씨도 그랬잖아요."

카이안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치킨 한 마리를 앞에 두고 눈물을 보였던 기억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결은 현금 봉투를 꺼내 조심스럽게 세어 봤다. 남은 지폐가 얇았다. 아침에 변호사 사무실로 갈 교통비와 컵라면 값까지 계산하면 포장마차에 들를 여유는 없었다.

그래도 지금 벨제아를 방에 넣으면 잠보다 생각이 먼저 올 것 같았다. 생각이 많아지면 저 검은 기운도 다시 새어 나올지 모른다.

한결은 봉투를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작은 거 하나만 먹고 들어갑시다. 카이안 씨도 같이 와요."

"내가 왜?"

"둘만 두면 서로 몰래 싸울 것 같으니까요."

"나는 그런 비겁한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럼 길도 봐 주시고요. 새벽 홍대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카이안은 잠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대검 대신 낡은 후드 모자를 눌러썼다. 벨제아도 왕관 장식 위로 후드를 다시 뒤집어썼다.

그 모습을 본 한결은 문을 열기 전에 덧붙였다.

"밖에서는 용사도 마왕도 아니고 그냥 제 친척입니다. 이상한 말 하지 마세요."

"친척이란 혈통을 공유하는 동맹인가?" 카이안이 물었다.

"오늘만 그런 겁니다."

"마왕과 혈통을 나누다니." 카이안이 질색했다.

"그러니까 말하지 마시라고요."


포장마차 주인은 후드에 왕관을 숨긴 벨제아와 덩치 큰 카이안을 한 번 훑어봤다. 한결은 서둘러 말했다.

"매운맛은 제일 순한 걸로요. 떡은 조금만 부탁드릴게요."

"셋이 먹기에 적지 않겠어요?"

"야식은 적당해야 합니다."

카이안이 옆에서 진지하게 덧붙였다.

"관리인의 재정이 위태롭다."

"그 말은 왜 해요."

포장마차 주인은 웃으며 작은 종이컵에 떡볶이를 담아 줬다. 붉은 소스에 떡 몇 개와 어묵 조각이 담긴 소박한 1인분이었다.

한결은 값을 치르며 남은 돈을 확인하지 않으려 애썼다. 숫자를 보면 맛이 사라질 것 같았다.

벨제아는 나무 꼬치를 무기처럼 들었다.

"독은 없는가."

"있어도 사람을 죽이는 독은 아니에요."

"그건 안심이 안 되는 말이다."

벨제아는 떡 하나를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두 번 씹는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뜨겁다."

"아직 안 매워요."

"뜨겁고 맵고 달다. 셋이 서로 싸우고 있다."

벨제아의 눈가가 붉어졌다. 한결은 급히 물을 내밀었다. 그녀는 물 대신 떡 하나를 더 집었다.

"그만 드세요."

"아니다. 이 정도 고통은 익숙하다."

"그 고통이랑은 다른 종류예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종이컵 가장자리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카이안이 몸을 굳혔다. 대검이 없는 손이 허리로 향했지만 검을 뽑지는 않았다.

한결은 벨제아 곁으로 다가가 종이컵을 내려놓게 했다. 그의 손등 문양이 차갑게 빛났다. 검은 연기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잦아들었다.

떡볶이가 마왕을 치료한 것은 아니었다. 벨제아는 여전히 지쳐 있었고 눈 밑의 그림자도 그대로였다. 다만 한결 곁에서 그녀의 기운이 넘치지 못하게 눌리는 듯했다.

"왜 울죠? 많이 매워요?"

벨제아는 소매로 눈가를 문질렀다.

"맵기도 하다. 그런데 아무도 내게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포장마차의 비닐 천막이 바람에 흔들렸다. 한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마계에서는 내가 멈추면 일이 멈춘다. 내가 자면 누군가의 결재가 늦어진다. 늦어진 결재 하나가 굶는 병사의 몫이 되거나 반란군의 핑계가 된다."

"그래서 도망친 거예요?"

"그래서 도망쳤다."

벨제아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도망쳐서도 다음 결재가 떠올랐다. 숙소 문을 닫아도 보고서가 따라올 것 같았다."

카이안이 낮게 말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네가 전장을 버리지 않았다는 뜻인가."

"용사가 알 필요 없는 일이다."

"그렇지."

카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 검을 뽑을 일은 아닌 듯하다. 그것뿐이다."

벨제아는 놀란 얼굴로 그를 봤다. 카이안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적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적의를 지금 당장 휘두르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한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제가 상담사는 아니라서 대단한 말은 못 해요."

그는 빈 종이컵을 가리켰다.

"그래도 오늘 밤만큼은 아무 결정도 안 해도 됩니다. 떡볶이 먹고 방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해요."

"결정을 미루는 건 무책임이다."

"잠 안 자고 쓰러지는 것도 책임지는 건 아니잖아요."

벨제아의 손이 멈췄다.

한결은 자신도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통장 잔고도 바닥이고 할아버지가 남긴 문제는 한 개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데 적어도 피곤한 사람이 눈앞에서 무너지는 걸 보고도 해결을 재촉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서는 관리인이 그걸 시키는 사람입니다. 손님 밥 먹이고 재우는 거요. 나머지 문제는 깨어난 뒤에 생각해요."

벨제아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남은 떡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렇다면 관리인의 명령을 받아들이겠다. 오늘만이다."

"오늘만도 충분해요."


숙소로 돌아오자 한결은 202호 열쇠를 꺼냈다. 열쇠 고리에 매달린 작은 나무패에는 오래된 글씨로 객실 번호가 적혀 있었다.

"벨제아 씨는 여기. 카이안 씨는 201호. 서로 문 두드리지 말기, 능력 쓰지 않기, 검도 금지. 불만 있으면 저한테 말하기."

"관리인이 중간에서 죽는 규칙이군." 카이안이 말했다.

"그 말은 하지 마세요."

벨제아는 열쇠를 받다가 멈췄다.

"내일도 결재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

"내일 아침까지는요. 그 뒤에는 같이 방법을 생각해 봐요. 혼자 하지 말고."

벨제아는 열쇠를 꽉 쥐었다. 그녀가 202호 문을 닫자 손등의 문양이 조용히 빛났다.

[투숙객 002 요양 안정도 상승.]

[관리인 조치 기록: 식사 제공, 갈등 중재, 휴식 권고.]

한결은 글자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상담비는 누가 내지."

카이안은 201호로 돌아가기 전 계단에서 멈췄다.

"한결. 오늘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내일도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내일의 나는 모르겠다."

"그 대답이 더 불안한데요."

카이안이 올라간 뒤 로비에는 동틀 무렵의 푸른 빛만 남았다. 한결은 카운터 의자에 앉아 현금 봉투를 다시 세었다.

떡볶이 값만큼 얇아진 돈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그래도 202호 너머에서 더는 검은 기운이 새지 않았다.

한결은 장부 맨 앞장에 볼펜으로 적었다.

손님끼리 싸우지 말 것. 밥 먹고 잘 것.

글씨는 할아버지 것보다 훨씬 반듯했다.

그가 그대로 카운터에 엎어지려는 순간 지하실 쪽에서 가느다란 진동이 올라왔다.

[정령계 발신 신호 오류.]

[예정 도착 경로 재탐색 중.]

한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길을 잃은 손님인가 보네."

손등의 문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지하실 문 아래로 낯선 초록빛이 한 줄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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