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앞 차원 통로 관리인입니다

3화: 편의점은 마왕을 달랜다
한결은 카운터 의자에 앉은 채 잠깐 눈을 붙였다고 생각했다.
현실은 달랐다.
손등이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순간 그의 몸은 의자에서 튀어 올랐다.
[예정 도착까지 00:03:00.]
"아니. 알람 기능까지 있어요?"
푸른 글자가 손등 위에서 깜빡였다. 한결은 손을 흔들어 봤지만 글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로비의 낡은 전등은 숨 가쁜 사람처럼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201호 쪽에서는 카이안의 코 고는 소리가 낮은 북소리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세상 편한 소리였다.
"용사는 자고 관리인은 야근이고."
[도착 준비를 권장합니다.]
"권장이면 안 해도 되는 거죠?"
[통로 불안정 가능성 증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한결은 카운터 위에 놓인 현금 봉투를 내려다봤다. 오만 원권 몇 장과 오래된 열쇠와 수리 목록. 전부 합쳐도 마음이 든든해지기는커녕 더 무거워졌다.
새벽 세 시였다. 변호사에게 전화하면 법적 조언보다 인간성에 대한 조언을 먼저 들을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모른 척 잘 수도 없었다. 시스템이 친절하지는 않아도 경고는 했다. 통로가 불안정해지면 홍대가 이상해진다. 어쩌면 방금 잠든 용사도 다시 검을 들고 내려올 것이다.
한결은 휴대폰과 지하실 열쇠를 챙겼다.
"이번 손님이 진짜 귀빈이면 뭘 해야 되지. 물수건? 웰컴 드링크? 객실 키?"
[상태: 권태.]
[상태: 업무 과부하.]
[상태: 당분 결핍.]
한결은 계단 앞에서 멈췄다.
"......사탕?"
시스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결은 한숨을 쉬고 지하실 문을 열었다.
지하실의 석판은 새벽빛보다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원형 문양들이 천천히 돌다가 어느 순간 딱 멈췄다. 공기가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결은 난간을 움켜쥐었다.
푸른 빛 한가운데 검은 금이 생겼다. 금은 문처럼 벌어졌고 그 안에서 작은 발 하나가 먼저 나왔다.
한결은 눈을 깜빡였다.
검은 구두. 검은 양말. 무릎 아래로 떨어지는 검은 원피스.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한결의 어깨에도 닿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긴 검은 머리를 대충 묶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왕관처럼 생긴 장식이 삐뚤게 꽂혀 있었다. 얼굴은 새하얗고 눈 밑에는 진한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여기인가."
목소리는 낮고 피곤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너무 오래된 목소리였다.
"스테이 이계. 임시 피난처."
한결은 통로 안쪽을 확인했다. 더 큰 무언가가 따라 나오는 건 아닌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문은 아이 하나를 토해 내고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저기. 혼자 왔어요?"
아이가 한결을 올려다봤다.
"감히 나를 맞이하러 온 자가 하나뿐인가."
"그 하나도 방금까지 졸고 있었습니다."
"의전은?"
"없습니다."
"환영 연회는?"
"편의점 닭다리 한 조각도 없어요."
아이는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세상의 모든 실망이 그 작은 어깨 위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역시 멸망해야 하는가."
"그런 말은 지하실에서 하지 마세요."
한결은 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아이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입술도 말라 있었다. 귀빈이라기보다 밤새 시험과 학원 숙제에 시달린 아이 같았다.
"이름이 뭐예요?"
"이름을 묻기 전에 무릎을 꿇는 것이 순서다."
"제가 지금 무릎 꿇으면 다시 못 일어날 것 같아서요."
그때 천장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마계의 냄새가 난다."
카이안의 낮은 목소리였다. 한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이는 눈썹을 살짝 움직였다.
"용사의 냄새군. 역겨운 정의감과 튀김 기름 냄새가 섞여 있다."
"서로 냄새 평가 금지."
한결은 계단 위를 향해 목소리를 낮춰 외쳤다.
"카이안 씨. 손님입니다. 아직 상황 파악 중이니까 검 들고 내려오지 마세요."
"손님이 마계라면 검을 들어야 한다."
"검 들면 차원 정체 은닉 위반입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배운 지 얼마 안 된 규칙이 카이안을 붙잡았다.
"......그 규칙은 강력하군."
한결은 그 틈에 아이에게 몸을 낮췄다.
"일단 올라가요. 여기 추워요. 그리고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은데요."
아이가 한결의 손등 문양을 보았다.
"관리인인가."
"임시입니다."
"그렇다면 단것을 바쳐라."
"얼마나 단 거요?"
아이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세상이 조금 덜 귀찮아질 만큼."
한결은 카운터 서랍에서 나온 검은 후드 집업을 아이에게 입혔다. 품이 너무 커서 거의 망토처럼 보였다.
"왜 나를 천으로 봉인하지?"
"봉인이 아니라 위장입니다. 새벽 홍대에 왕관 장식 달고 다니면 시선 끌어요."
"시선은 원래 아래것들이 바치는 것이다."
"여기서는 경찰이 옵니다."
"그 기사단은 세금도 안다던 그자들인가."
"카이안 씨한테 이상한 것만 배우셨네요."
한결은 휴대폰 지도를 볼 필요도 없었다. 골목 끝에는 24시 편의점이 있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치킨값을 빼고 남은 현금. 내일 변호사 사무실에 갈 교통비. 아침에 먹을 컵라면 값. 그리고 지금 옆에서 세계 멸망을 입버릇처럼 말하는 손님.
"일단 비싼 건 안 됩니다."
"가격이란 무엇이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마법입니다."
편의점 자동문이 열리자 맑은 알림음이 울렸다. 직원은 졸린 얼굴로 인사하다가 후드 속 아이의 왕관 장식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한결이 먼저 웃었다.
"조카입니다. 새벽 비행기 타고 와서 좀 피곤해요."
"아. 네."
직원은 홍대에서 단련된 사람답게 더 묻지 않았다.
아이는 편의점 안으로 세 걸음 들어가더니 멈췄다.
그녀의 눈동자에 냉장 진열대의 빛이 그대로 들어찼다. 푸딩. 초콜릿. 젤리. 딸기 우유. 작은 플라스틱 용기 안에 담긴 크림 디저트들.
"보물고."
"그냥 편의점이에요."
"이 세계의 보물고는 냉기를 품고 있군."
"냉장고입니다."
아이는 진열대 앞에 서서 손을 뻗었다. 푸딩 하나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한결은 기겁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손으로 집어요. 공중으로 부르면 안 됩니다."
"왜지."
"직원이 봅니다."
"보는 자의 기억을 지우면 된다."
"절대 안 됩니다."
직원이 카운터에서 이쪽을 흘끔 보았다. 한결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도 따라 손을 들었다.
"저자의 기억을 지우지 않겠다는 뜻인가."
"인사예요. 지우는 거 아니고."
아이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이는 바구니를 들더니 푸딩을 여섯 개 넣었다. 초콜릿을 네 개 넣었다. 젤리를 종류별로 넣었다. 딸기 우유와 바나나 우유와 초코 우유를 모두 넣었다.
"잠깐. 그건 털기예요."
"털기?"
"돈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곳을 점령하면 되겠군."
"안 됩니다."
"어째서."
"여기 사장님도 월세 냅니다."
아이는 처음으로 진심 어린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됐다.
"보물고의 주인도 세금과 월세에 묶여 있는가."
"대부분 그래요."
"가엾군."
아이는 푸딩 두 개를 다시 내려놓았다. 초콜릿도 하나 내려놓았다. 한결은 그 작은 양보에 괜히 감동할 뻔했다.
하지만 계산대 앞에서 다시 문제가 생겼다.
"봉투 드릴까요?"
직원이 묻자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봉투도 대가를 요구하는가."
"네. 백 원이요."
아이는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이 세계는 잔혹하다."
한결은 백 원짜리 봉투까지 계산했다.
편의점 앞 작은 벤치에 앉자 아이는 가장 먼저 푸딩 뚜껑을 열었다.
한결은 플라스틱 숟가락을 건넸다.
"이걸로 떠먹어요."
"무기인가."
"숟가락입니다."
아이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숟가락을 보다가 푸딩을 한 입 떠 넣었다.
그리고 멈췄다.
새벽 공기가 잠깐 조용해졌다. 멀리 골목에서 술에 취한 사람들이 웃는 소리만 흘러왔다.
아이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부드럽다."
"달죠?"
"혀 위에서 무너진다. 그런데 무너진 자리에 다시 일어날 힘을 남긴다."
"푸딩 광고 같네요."
"이 작은 그릇에 휴전 협정이 들어 있다."
한결은 피곤해서 웃음이 나왔다. 아이는 푸딩을 아주 조심스럽게 먹었다. 방금 전까지 세계를 멸망시킬지 고민하던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진지했다.
두 번째 숟가락을 먹고 나서 아이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며칠을 잤는지 모르겠다."
"많이 잤다는 뜻이에요?"
"아니.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이는 푸딩 용기를 내려다보았다.
"보고서. 반란 진압. 영지 분쟁. 서열 회의. 용사 처리 이후의 전후 복구. 어느 것도 끝나지 않았다. 모두가 내 결재를 기다렸다. 내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세계가 굴러갔고 내가 일어나면 모두가 죽는 얼굴을 했다."
한결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손님이 했다기에는 너무 무거운 말이었다. 하지만 눈 밑의 그림자와 떨리는 손은 그 말이 허세가 아니라는 증거 같았다.
"그래서 도망쳤어요?"
"휴식이다."
"말은 정확히 해야죠."
"가출이다."
"그게 더 정확하네요."
아이는 푸딩을 마저 먹었다. 그리고 초콜릿 포장을 뜯으려다 실패했다. 한결이 대신 뜯어 주자 그녀는 잠깐 그를 빤히 보았다.
"관리인은 이상하군."
"제가요?"
"두려워하면서도 도망가지 않는다."
"도망가고 싶죠. 그런데 제가 도망가면 홍대가 이상해질 수 있다잖아요."
"홍대가 무엇이지."
"여기 동네요. 사람들이 많이 살고 놀고 일하는 곳."
아이는 골목을 보았다. 네온 간판과 닫힌 가게들. 취객을 태우려는 택시. 새벽에도 꺼지지 않는 도시의 빛.
"작은 세계군."
"누군가한테는 전부예요."
한결이 그렇게 말하자 손등의 문양이 희미하게 빛났다. 동시에 아이 주변에 얇게 번지던 검은 그림자가 조금 가라앉았다.
아이는 그것을 느낀 듯 한결의 손을 보았다.
"네 곁은 조용하다."
"저도 이유는 모릅니다."
"이유를 모르는 평온은 귀하다."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한결은 남은 간식 봉투를 들고 일어났다.
"일단 숙소로 돌아갑시다. 방 배정받고 자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합시다."
"내일도 결재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
"적어도 여기서는 푸딩 먹고 자는 게 먼저입니다."
아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숙소는 마음에 든다."
스테이 이계로 돌아오는 길은 올 때보다 조용했다.
한결은 아이가 길가의 모든 간판을 읽으려 할 때마다 팔을 살짝 잡아 방향을 틀었다.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반항하지 않았다. 대신 초코 우유 빨대를 물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걸었다.
로비에 들어서자 손등의 문양이 다시 빛났다.
[투숙객 생체 안정 확인.]
"다행이네요. 푸딩이 통했나 봅니다."
[신규 투숙객 등록을 진행합니다.]
한결은 카운터 위에 간식 봉투를 내려놓았다.
"이름부터 입력해야 하나. 이름이 뭐예요?"
아이는 대답 대신 초코 우유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푸른 글자가 허공에 떠올랐다.
[등록 투숙객 002: 벨제아.]
한결은 멈췄다.
카이안이 말했던 이름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력을 잃게 만든 최종 결전. 용사가 상대했다던 존재.
그 순간 다음 글자가 나타났다.
[출신: 마계.]
[분류: 마왕.]
한결은 아주 천천히 아이를 내려다봤다.
아이는 초코 우유 빨대를 문 채 피곤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왜 그런 얼굴을 하지."
"제가 방금 마왕한테 푸딩을 사 준 건가요?"
"푸딩은 훌륭했다."
"대답이 아니잖아요."
[요양 사유: 번아웃, 장기 업무 과부하, 권태, 당분 결핍.]
[객실 배정 대기.]
2층에서 낡은 문이 삐걱거렸다.
한결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카이안의 발소리였다. 무겁고 느리지만 분명히 이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벨제아는 그 소리를 듣고도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용사인가."
"아는 사이세요?"
"죽일 뻔한 사이를 아는 사이라고 부르나."
한결은 카운터를 붙잡았다.
201호 문이 완전히 열렸다.
카이안의 목소리가 계단 위에서 낮게 떨어졌다.
"한결. 지금 그 이름을 들은 것 같은데."
벨제아는 남은 초코 우유를 마저 빨아들였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시끄럽군. 나는 휴가 중이다."
한결은 그 순간 확신했다.
홍대의 밤은 끝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