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앞 차원 통로 관리인입니다

2화: 치킨은 세계를 구한다
"......일단, 씻으러 가시죠. 갑옷에서 냄새나거든요."
한결이 그렇게 말한 건 용감해서가 아니었다.
지하실 한복판에 갑옷 입은 남자가 쓰러져 죽으면 자신은 오늘부로 건물주가 아니라 사건 현장 최초 발견자가 된다. 그렇다고 저 대검 든 남자를 홍대 골목으로 내보내면, 새벽 뉴스에 '정체불명 코스프레 남성 난동' 같은 자막이 뜰 게 뻔했다.
카이안은 모욕당한 왕처럼 눈썹을 치켜올렸다.
"냄새라니. 이것은 전장의 훈장이다."
"전장의 훈장이든 뭐든, 지금은 1층 로비까지 올라옵니다."
"관리인. 그대는 참으로 두려움을 모르는군."
"두렵습니다. 그래서 씻기려는 겁니다. 냄새가 너무 현실적이라서요."
카이안이 뭐라 반박하려는 순간이었다.
꼬르륵.
지하실의 푸른 석판 위로, 민망할 만큼 선명한 소리가 울렸다.
카이안은 굳은 얼굴로 배를 움켜쥐었다.
"......좋다. 물과 음식. 순서를 양보하마."
"양보가 아니라 기본 위생이에요."
한결은 계단을 올라가며 계속 뒤를 돌아봤다. 카이안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은 계단참에서 납작한 전단지처럼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거구의 용사는 의외로 얌전했다. 대검을 질질 끌다가 한결이 바닥의 낡은 나무판을 가리키자, 마지못해 검을 어깨에 들었다.
1층 복도 끝의 공용 욕실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오래된 타일 사이에 곰팡이가 보였지만, 수도꼭지를 돌리자 물은 나왔다.
한결이 샤워기를 들어 물을 틀자 카이안이 대검을 뽑아 들었다.
"기습인가!"
"물이에요! 물!"
차가운 물줄기가 한결의 소매를 적셨다. 카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관찰했다.
"마법진 없이 물을 부르는 장치라니. 지구의 수도승들은 제법이군."
"수도승 말고 수도관요."
한결은 낡은 수건과 회색 츄리닝을 욕실 앞에 내려놓았다. 할아버지 옷인지, 세탁은 되어 있었지만 색도 핏도 애매했다.
"갑옷은 벗고 씻으세요. 피 묻은 건 저 봉투에 담고요. 검은 욕실에 들고 들어가지 마시고."
"검을 놓고 씻으라고?"
"여기서 당신을 암살할 사람은 없고, 있더라도 그 전에 냄새로 들킬 겁니다."
카이안은 잠시 자존심과 허기 사이에서 고민했다. 결과는 허기의 승리였다.
그가 욕실로 들어간 뒤에도 한결은 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욕실 안에서 철컥거리는 소리와 낮은 욕설 같은 말이 이어졌다. 중간에 샴푸를 독거품으로 오해하는 소동까지 있었지만, 한결은 이를 악물고 사용법을 설명했다.
자신이 갑옷 입은 용사에게 샴푸와 배수구를 가르치는 밤이 올 줄은 몰랐다.
카이안이 회색 츄리닝을 입고 로비로 나왔을 때, 그는 전설의 용사라기보다 헬스장 회원권을 잃어버린 덩치 큰 동네 형에 가까웠다.
다만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날카로운 눈빛과, 로비 벽에 기대 놓은 사람 몸통만 한 대검이 그 인상을 망치고 있었다.
"그 작은 닭 조각은 훌륭했다."
카이안이 엄숙하게 말했다.
"허나 내 육신은 아직 죽음의 문턱에 있다."
"편의점 치킨 한 조각 먹고 살아난 게 더 이상한 거예요."
"관리인. 정식 만찬을 요청한다."
한결은 휴대폰을 꺼냈다가 통장 잔고를 떠올렸다.
13만 원.
그중 일부는 내일 교통비와 컵라면 값으로 남겨야 했다. 그런데 눈앞의 투숙객은 닭 한 마리를 간식으로 볼 표정이었다.
"한 마리만 시킵니다."
"한 마리라면 전채인가?"
"두 마리 시키면 저는 다음 주에 굶습니다."
카이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관리인이 굶으면 숙소의 위신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한 마리로 참겠다."
"참아 주셔서 눈물 나네요."
한결은 배달 앱을 켰다. 홍대답게 가까운 치킨집은 많았다. 그는 실제 이름을 깊이 보지 않고 가장 빨리 오는 가게를 골랐다. 후라이드와 양념 반반. 할인 쿠폰까지 적용했지만 가격은 여전히 아팠다.
카이안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숨을 삼켰다.
"손바닥만 한 수정구 안에 닭의 그림자가 갇혀 있다."
"사진이에요."
"이 수정구로 전령을 부르는가?"
"비슷하긴 하네요."
주문 완료 문구가 뜨자, 발밑에서 낮은 진동이 올라왔다. 지하실 쪽이었다. 한결은 발바닥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몸을 굳혔다.
그런데 카이안이 한결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오자 진동이 한순간 잦아들었다.
"방금 느꼈어요?"
"통로가 숨을 쉰 것이다. 불안정하지만 네 곁에서는 묘하게 얌전하군."
"제 곁에서요?"
"강도철이 왜 너를 후계로 불렀는지 알 것도 같다."
한결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후계라니. 자신은 그런 계약서에 서명한 적이 없었다. 변호사도 '운영 조건'이라고 했지, 차원 뭐시기를 떠맡으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
카이안이 번개처럼 일어나 대검 손잡이를 잡았다.
"적의 전령인가!"
"배달원입니다!"
한결은 거의 몸을 날려 카이안의 팔을 붙잡았다. 팔뚝은 전봇대 같았다. 그는 한결이 매달려도 꿈쩍하지 않았다.
"문 앞에서 검 뽑으면 바로 경찰 와요. 그러면 설명 못 합니다. 아니, 저도 설명 못 해요."
"경찰은 어느 왕국의 기사단이지?"
"지구의 무서운 기사단입니다. 신분증도 보고 세금도 압니다."
"세금을 안다고?"
카이안은 그제야 손을 뗐다.
한결은 식은땀을 닦으며 문을 열었다. 배달원은 로비 안쪽의 대검과 거대한 회색 츄리닝 남자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홍대라서 그런지 곧 무표정하게 치킨 봉투를 내밀었다.
"맛있게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문이 닫히자마자 카이안의 눈이 빛났다.
"향이 다르다. 아까의 작은 조각보다 뜨겁고, 깊고, 사악할 정도로 고소하다."
"사악하진 않고 튀긴 겁니다."
치킨 상자가 열리는 순간, 카이안은 거의 경건해졌다.
그는 첫 조각을 들고 한참 바라봤다. 바삭한 튀김옷에서 김이 올랐다. 한결은 혹시 그가 뼈까지 씹어 삼킬까 봐 급히 먹는 법을 설명했다.
"뼈는 남기세요."
"닭의 뼈를 남기는 것은 전사에 대한 예의인가?"
"그냥 치아와 소화기관에 대한 예의입니다."
카이안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첫 조각을 베어 물었다.
그의 눈이 커졌다.
"겉은 갑주처럼 단단하나 속은 어린 치유사의 손길처럼 부드럽다."
"그 표현, 치킨집 사장님이 들으면 좋아하시겠네요."
"이 붉은 소스는 무엇이냐?"
"양념이요. 맵고 답니다."
카이안은 양념 치킨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굳었다.
한결은 그가 독이라도 먹은 줄 알고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왜요? 매워요?"
"아니다."
카이안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전장에서 잃은 동료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들에게도 이것을 먹이고 싶었다."
한결은 할 말을 잃었다.
우스운 장면이어야 했다. 회색 츄리닝을 입은 이계 용사가 양념 치킨을 들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은 분명 말이 안 됐다. 그런데 카이안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낡은 로비, 기름 냄새, 다 식어 가는 형광등 아래에서 한결은 갑자기 이 남자가 정말 전쟁을 지나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피가 굳은 갑옷. 찢어진 망토. 죽기 직전이라던 허기.
아까까지는 전부 비현실적인 소품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많이 드세요."
한결이 말했다.
"대신 천천히요. 여기서는 누가 뺏어 먹지 않으니까."
카이안은 그 말에 잠시 한결을 바라보았다.
"관리인, 네 이름은 무엇이냐?"
"강한결이요."
"한결. 오늘의 은혜는 내 검에 새기겠다."
"검에는 새기지 말고 리뷰나 좋게 남겨 주세요."
카이안은 리뷰가 뭔지 몰랐지만,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닭다리가 사라질 때였다.
지하실 문틈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이번에는 진동만이 아니었다. 낡은 건물 전체가 잠깐 숨을 들이마시는 것처럼 삐걱였다.
[투숙객 생체 안정 확인.]
한결은 젓가락을 든 채 얼어붙었다.
로비 허공에 푸른 글자가 떠올랐다. 오래된 전광판처럼 한 박자씩 끊겨 나타나는 문자였다.
[신규 관리인 후보 감지.]
"......저거 보여요?"
"보인다. 관리 석판이 깨어났군."
"왜 그렇게 당연하게 말해요?"
"관리인이 손님을 먹였으니 당연히 숙소가 응답한다."
푸른 글자는 계단 아래, 지하실 방향으로 이어졌다. 한결은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글자는 계속 깜빡였고, 카이안은 이미 대검을 들고 있었다.
"가자, 한결. 계약을 마쳐야 한다."
"계약이요? 저는 동의한 적 없는데요."
"대부분의 운명은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그런 말 제일 싫습니다."
지하실의 석판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밝았다.
원형 문양들이 천천히 돌고, 가운데에는 물 위에 뜬 달처럼 푸른 화면이 떠 있었다. 한결이 계단 끝에 서자 화면의 글자가 바뀌었다.
[선임 관리인 강도철: 장기 부재.]
[임시 승계 조건 충족: 혈연, 건물 출입, 첫 투숙객 급식.]
"급식이라니. 제가 무슨 학교 식당입니까?"
[강한결. 임시 관리인 인증을 진행합니다.]
"거부."
[거부 권한이 없습니다.]
"왜 물어본 척하는데요!"
석판에서 빛이 튀어 한결의 오른손등에 닿았다. 뜨겁지는 않았다. 대신 찬물에 손을 담근 것처럼 서늘했다. 손등 위로 작은 원형 문양이 잠깐 떠올랐다가 피부 아래로 스며들었다.
한결은 기겁해 손을 털었다.
"이거 지워져요?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임시 관리인: 강한결.]
[등록 투숙객 001: 카이안.]
[출신: 테라니아 대륙.]
[분류: 용사.]
[요양 사유: 마력 고갈, 전투 후유증, 극심한 허기.]
카이안은 마지막 항목에서 헛기침했다.
"허기는 전략적 문제였다."
"시스템도 극심하다고 하네요."
[객실 배정: 201호.]
[관리 의무: 숙식 제공. 차원 정체 은닉. 통로 안정 유지. 지구 민간인 피해 방지.]
한결은 빠르게 화면을 훑었다. 직감적으로 퇴근 버튼 같은 걸 찾았다. 그러다 작은 항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퇴거 처리. 여기 있네요."
그가 손가락을 가져가자 푸른 글자가 붉게 변했다.
[경고: 현 투숙객은 귀환 마력 부족.]
[강제 퇴거 시 통로 균열 및 주변 반경 300미터 이상 현실 왜곡 가능.]
한결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300미터면...... 홍대입구역까지 들어가잖아요."
"그러니 나를 먹이고 재우는 편이 세계 평화에 이롭다."
"그걸 본인 입으로 말하니까 얄밉네요."
화면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항목을 띄웠다.
[미납 관리비: 3년 4개월.]
[긴급 보수 필요: 객실 7, 로비 결계, 지하 통로 외곽부.]
[현금 보유액: 확인 불가.]
"잠깐. 미납?"
한결은 석판을 짚고 소리쳤다.
"할아버지! 유산이라면서요! 이건 빚이잖아!"
지하실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카이안은 한결을 묘하게 측은한 눈으로 바라봤다.
"강도철은 늘 말했지. 좋은 숙소는 돈보다 사람이 남는다고."
"그 사람 지금 여기 없잖아요!"
한결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건물을 팔 수 없다. 운영을 중단하면 국가 귀속. 투숙객을 내쫓으면 홍대가 뒤틀릴 수 있음. 통장 잔고는 치킨값을 빼고 더 가벼워졌다.
말도 안 되는 선택지들 사이에서, 가장 현실적인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일단 오늘만입니다."
카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만?"
"오늘만 재우고, 내일 변호사한테 전화하고, 방법을 찾을 겁니다. 저는 아직 이 일 안 하겠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싶거든요."
[임시 운영 개시.]
"아니, 믿고 싶다고 했지 시작한다고는 안 했는데."
석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손등의 문양이 아주 희미하게 한 번 깜빡였다.
201호는 의외로 깨끗했다.
침대 시트는 낡았지만 먼지가 없었고, 창문 밖으로는 홍대 골목의 네온빛이 비쳤다. 카이안은 침대를 보고 전리품을 받은 병사처럼 감격했다.
"이 작은 구름 위에서 자는 것인가?"
"스프링 침대입니다. 검은 벽에 기대 놓고, 갑옷은 내일 닦읍시다. 그리고 창문 열고 대검 휘두르지 마세요."
"왜지?"
"옆 건물 사람들이 봅니다."
"차원 정체 은닉."
"방금 배운 걸 바로 써먹으시네요."
카이안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낡은 침대가 괴로운 소리를 냈지만, 다행히 부서지지는 않았다.
"한결."
그가 문득 진지하게 불렀다.
"강도철이 사라진 뒤로 통로는 오래 굶었다. 오늘 네가 나를 먹인 일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이 집이 아직 관리인을 가졌다는 선언이다."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말은 부담스러웠다. 그는 선언 같은 걸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굶어 죽겠다는 사람에게 치킨을 시켜 줬을 뿐이다.
그런데도 카이안은 눈을 감으며 덧붙였다.
"고맙다. 지구의 관리인."
한결은 조용히 문을 닫고 1층으로 내려왔다.
로비 카운터 안쪽 서랍을 뒤지자 낡은 장부와 작은 현금 봉투가 나왔다. 봉투 겉면에는 할아버지의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손님 밥부터 먹여라.
한결은 한참 그 문장을 노려봤다.
"진짜 끝까지 자기 멋대로네."
봉투 안에는 오만 원권 몇 장과 오래된 열쇠 하나, 그리고 객실별 수리 목록이 들어 있었다. 충분하지는 않았다. 미납 관리비와 보수 비용을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첫날 굶지는 말라는 뜻은 분명했다.
한결은 봉투를 쥔 채 카운터 의자에 주저앉았다. 배신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올라왔다. 할아버지는 그에게 이 정신 나간 숙소를 떠넘겼다. 하지만 완전히 빈손으로 밀어 넣지는 않았다.
그때 손등의 문양이 희미하게 빛났다.
[다음 예약 확인 중.]
한결은 불길한 예감에 손을 내려다봤다.
[예정 도착: 03:00.]
[분류: 마계 귀빈.]
[상태: 권태, 업무 과부하, 당분 결핍.]
201호에서는 카이안의 코 고는 소리가 벽을 타고 내려왔다. 한결은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손등을 봤다.
"......이번엔 치킨으로 안 되겠지?"
손등의 문양은 대답 대신 한 번 더 깜빡였다.
홍대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