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급 파티 매니저가 항구 경제를 접수함

2화: 공짜 설계도는 없다
페른의 시선이 한결의 품속으로 사라진 의뢰서 끝을 따라붙었다.
“그 서류는 항만조합 재산입니다. 무단 반출은 규칙 위반입니다.”
한결은 체납 장부를 닫지 않았다. 손바닥 아래에서 젖은 양피지가 눌리며 작은 소리를 냈다.
“현장 수행자가 원본 조건을 확인하는 행위가 금지라면 조항 번호로 말씀하십시오. 없으면 저는 이걸 들고 갑니다.”
페른의 입술이 얇게 굳었다.
조항 번호는 나오지 않았다.
미르카가 문가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낡은 보호구가 비늘을 더 파고들었는지 그녀의 눈썹이 짧게 꿈틀거렸다.
“말로 시간을 벌 거면 혼자 해. 정오까지 두 시간 반도 안 남았어.”
“그래서 서류부터 챙기는 겁니다.”
한결은 장부 끝장을 펼쳤다. 압류 예정 물품 목록 아래에 번진 이름이 있었다. 첫눈에는 도린처럼 보였던 글자였다. 젖은 잉크를 손톱 끝으로 따라가자 ㄷ처럼 뭉개진 획이 아랫줄의 먼지와 겹쳐 보였을 뿐이었다.
아린 바크 폐공방.
폐여과막 두 묶음. 황동 관절 두 상자. 가죽끈과 낡은 부력석 조각 여섯 개.
그 옆에는 작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조수갈매기 미지급 보수와 상계 예정. 공방 폐쇄 시 우선 회수.
“이 물품들은 우리 파티가 받을 돈 대신 잡혀 있는 담보입니다.”
세아가 놀라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그건 아직 확정된 압류가 아니에요. 조합에서 처리한다고만 들었는데…….”
“확정 전이라서 더 낫습니다. 우리가 압류를 당장 집행하지 않는 조건을 거래에 넣을 수 있으니까요.”
페른이 코웃음을 쳤다.
“폐공방 주인이 그런 헛소리에 넘어갈 것 같습니까?”
“공짜로 달라고 하면 안 넘어가겠죠.”
한결은 의뢰서 하단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침수 창고에서 회수한 여과통 잔재와 발주처가 포기한 부산물은 수행자에게 귀속된다. 이 조항은 원본에 있습니다. 우리가 정오 전에 살아서 돌아오면 아린 바크에게 줄 수 있는 물건이 생깁니다.”
미르카가 처음으로 장부를 진지하게 보았다.
“살아서 돌아오면?”
“그래서 지금 가는 겁니다. 죽지 않기 위해.”
세아는 빈 약병 주머니를 더 꽉 쥐었다. 유리병 목이 서로 부딪혀 메마른 소리를 냈다.
“제가 같이 갈게요. 아린 바크 공방은 예전 조수갈매기 장비를 고쳐 줬어요. 지금은 조합 검수 명단에서 빠졌지만요.”
페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검수 제외 업체와 거래하면 조합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 책임을 피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닙니까.”
한결은 더 대답하지 않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네리아 하층 부두의 골목은 사무실 안보다 더 축축했다. 발밑의 판자는 바닷물과 기름을 번갈아 먹어 검게 번들거렸고 벽마다 말라붙은 소금 결정이 허연 비늘처럼 솟아 있었다.
조수갈매기 명패가 달린 가방을 본 상인들은 먼저 고개를 돌렸다. 한 여인은 널어 둔 방수 천 조각을 걷어 품에 안았고 약재상은 세아를 알아보고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세아의 걸음이 느려졌다.
“미납금 때문이에요. 다들 제 얼굴을 알아요.”
“지금은 외상 더 만들러 가는 게 아닙니다.”
한결은 가판대 옆에 붙은 가격표를 빠르게 읽었다. 온전한 여과막 한 장은 스물두 골드. 찢어진 여과막도 재가공용이면 다섯 골드. 그런데 장부의 폐여과막 두 묶음은 합쳐 세 골드로 잡혀 있었다.
‘헐값 처리다. 누군가 일부러 가치를 낮춰 적었다.’
능력을 쓰지 않아도 이상했다. 현실에서 보던 감가상각 장난과 닮아 있었다. 쓸 수 있는 설비를 폐품으로 낮춰 잡고 장부상 손실을 만든 뒤 누군가는 싼값에 챙겨 간다.
미르카가 낮게 말했다.
“왜 자꾸 가격표를 봐?”
“우리가 가진 카드가 얼마나 깎였는지 보는 중입니다.”
“우린 카드 같은 거 없어. 빚만 있지.”
“빚도 상대가 필요로 하면 조건이 됩니다.”
미르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보호구 끈을 조금 풀었다. 비늘 사이에 맺힌 피가 바닷바람을 맞고 검게 말라 있었다.
아린 바크 폐공방은 제7방파제로 내려가는 비탈길 아래에 있었다. 반쯤 깨진 간판은 줄 하나에 매달려 흔들렸고 문틈으로는 뜨거운 쇳내와 젖은 나무 냄새가 새어 나왔다.
한결이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안쪽에서 쉰 목소리가 날아왔다.
“조합이면 돌아가. 오늘은 설계도도 공짜 수리도 없다.”
“조합에서 온 게 아닙니다. 조수갈매기 파티의 임시 매니저 류한결입니다.”
망치 소리가 멎었다.
“조수갈매기가 매니저를 둘 돈이 남았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임시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철제 빗장이 거칠게 밀리고 문이 열렸다.
아린 바크는 키가 작고 어깨가 넓은 사내였다. 왼쪽 눈에는 둥근 수정 렌즈가 끼워져 있었고 오른쪽 팔꿈치부터 손목까지는 얇은 황동 보조대가 감겨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검은 그을음과 푸른 녹으로 얼룩져 있었다.
아린은 한결을 보기도 전에 미르카의 팔을 보았다.
“인간 규격 보호구를 마수인 팔에 묶었군. 어느 멍청이가 그랬나.”
미르카가 이를 드러냈다.
“조합 지급품이 그거뿐이었어.”
“지급품이라 부르기 아깝다. 그건 건조 창고 경비용이다. 염수 밑에서 쓰면 관절이 걸려 팔을 못 뺀다.”
세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정도였어요?”
아린은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결이 든 장부를 보았다.
“그래서 압류하러 왔나. 내 여과막과 관절 상자 들고 가면 너희 장례식에라도 쓰게?”
한결은 장부를 공방 안쪽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작업대에는 분해된 방수 외투가 널려 있었다. 덧댄 천 아래의 검은 여과막은 손톱만 한 균열을 따라 희게 삭아 있었다.
“압류를 유예하러 왔습니다.”
아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빚쟁이가 유예라는 말을 꺼내면 이자가 붙더군.”
“이자는 붙이지 않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한결은 의뢰서 하단 조항을 보여 주었다.
“침수 창고에서 회수하는 여과통 외피와 발주처 포기 부산물의 처분권 일부를 공방에 넘기겠습니다. 공방은 미르카 씨 체형에 맞춘 팔 보호구와 허리 부력끈을 만들어 주십시오. 방수 외투 두 벌을 셋에게 억지로 나눠 입히는 대신 실제로 물속에 들어갈 사람의 사고 확률부터 낮춰야 합니다.”
아린은 한참 동안 한결을 보았다.
“설계도는?”
“공짜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현장 회수품으로 대금을 지급합니다.”
“조합 놈들은 늘 반대로 말했지. 먼저 설계도를 내놓으면 검수 명단에 다시 넣어 주겠다고 했다. 내 설계로 납품하고 돈은 다른 공방이 받았다. 결함이 나면 책임은 내 이름으로 돌아왔고.”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보다 오래 삭은 피로가 묻어 있었다.
한결은 작업대 위의 방수 외투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천이 손바닥에 붙는 순간 시야가 붉게 흔들렸다.
[미반영 여과막 균열 수리비: 38골드]
[검수 회피 손실: 214골드]
관자놀이가 송곳으로 눌리는 듯했다. 한결은 이를 악물었다. 글자는 해결책을 주지 않았다. 누가 조작했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이 장비에 빠진 비용이 있고 그 비용을 누군가 사용자에게 떠넘겼다는 사실만 드러냈다.
“여과막 균열을 고치지 않고 덧천만 댔습니다. 수리비는 서른여덟 골드 정도 빠졌고 검수를 피한 탓에 손실은 더 큽니다.”
아린의 황동 보조대가 삐걱거렸다.
“그 숫자를 어디서 봤지?”
“계산했습니다.”
“거짓말이군.”
“그렇다면 더 좋은 계산을 보여 주십시오. 저는 그걸 따르겠습니다.”
공방 안이 조용해졌다.
아린은 한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한참 뒤 그는 작업대 아래에서 낡은 철함을 꺼냈다. 안에는 조합 검수 도장이 찍힌 반려 문서들이 빼곡했다.
“내가 그 균열을 지적한 문서다. 세 번 냈고 세 번 반려됐다. 사유는 과잉 규격. 비용 낭비. 하급 파티 작업에 부적합.”
미르카가 문서 하나를 낚아챘다. 글자를 읽는 그녀의 손가락이 떨렸다.
“하급 파티라서 팔 하나쯤은 비용 낭비가 아니었다는 거네.”
“그렇게 적지는 않았지. 그렇게 쓰면 기록이 남으니까.”
한결은 붉은 숫자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아직 울렸다. 능력을 두 번 쓴 뒤부터 기억 한쪽이 물에 젖은 종이처럼 흐릿했다. 회의실 탁자 색이 검은색이었는지 회색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그 생각을 밀어냈다.
지금 잊어도 되는 건 탁자 색이었다. 눈앞의 팔은 잊으면 안 됐다.
“아린 씨. 저희가 원하는 건 설계도가 아니라 작동하는 장비입니다.”
세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조수갈매기 이름으로 압류 유예 확인서를 쓰겠습니다. 이번 의뢰가 끝나면 회수품 처분권 일부를 공방에 넘기는 조건도 제가 서명해요. 한결 씨 혼자 한 약속으로 만들지 않겠습니다.”
미르카는 보호구 끈을 완전히 풀어 작업대 위에 던졌다.
“그리고 내 장비는 내가 고를 거야. 또 인간 팔에 맞춘 걸 묶으라면 물속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부숴 버릴 거고.”
아린은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 말은 마음에 드는군.”
그는 황동 관절 상자를 끌어내고 녹슨 부력석 조각을 고르기 시작했다. 움직임은 느렸지만 손끝은 정확했다.
“두 벌을 세 벌로 만들 수는 없다. 대신 한 벌의 팔 부분을 떼어 마수인 관절에 맞추고 허리에는 부력끈을 넣는다. 남은 한 벌은 치유사에게 줘라. 매니저는 물속에 들어가지 마.”
“저도 현장에는 갑니다.”
“현장과 물속은 다르다. 둘을 혼동하는 놈이 죽는다.”
한결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 괜한 자존심으로 물밑에 따라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자신에게 전투 기술은 없고 수중 활동 능력도 없었다. 할 일은 위험을 못 본 척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아린이 바늘 같은 금속 송곳을 들었다.
“아직도 남았나?”
“페른을 데려가야 합니다. 조합 서기가 현장에서 장비 검수 기록을 쓰게 해야 합니다. 기록 없이 고치면 나중에 또 공방 책임으로 돌릴 겁니다.”
아린의 손이 멎었다.
“그놈이 순순히 쓰겠나.”
“순순히 쓰게 만들겠습니다. 원본 의뢰서에 검수 완료 시점을 작업 시작으로 본다고 조건을 바꿔 놓았습니다.”
미르카가 낮게 웃었다.
“그럼 서기 나리도 우리랑 같이 방파제 밑으로 가겠네.”
한결은 품속의 의뢰서를 다시 확인했다. 접힌 종이 안쪽에는 아직 설명되지 않은 숫자가 남아 있었다.
[미반영 사고 종결 협조비: 120골드]
누가 그 돈을 준비했는지 한결은 알지 못했다. 다만 사고가 일어난 뒤에 입을 막으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린이 고친 팔 보호구를 미르카 앞으로 밀었다. 황동 관절은 그녀의 팔꿈치 각도에 맞춰 벌어졌고 안쪽에는 부드러운 가죽 대신 얇은 부력석 조각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미르카는 조심스레 팔을 넣었다. 비늘이 눌리지 않았다. 손목을 돌리자 물갈퀴가 찢어질 듯 당기던 끈도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잠깐 말이 사라졌다.
“이런 걸 처음부터 줄 수 있었잖아.”
아린은 고개를 저었다.
“줄 수 있었다. 줄 생각이 없는 놈들이 돈줄을 쥐고 있었을 뿐이지.”
정오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두 시간도 되지 않았다.
한결은 장부와 의뢰서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공방 밖의 바람이 더 차가워져 있었다. 멀리 제7방파제 아래에서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페른은 아직 자신이 현장에 끌려갈 줄 모르고 있을 것이다.
한결은 문을 나서며 말했다.
“이제 서기에게 검수 도장을 받으러 갑시다. 그리고 그다음엔 침수 창고가 정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