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보는 세가의 미친개

91화: 흘러간 매실즙과 본전의 소란
부교주 독고무휼을 제압하고 흑혈곡 본전을 완전히 장악한 무림맹 토벌대는, 마교의 극비 기록물과 보물이 보관된 제단 뒤편의 '천마비각(天魔秘閣)'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비각 내부에는 기괴한 법진 무늬가 그려진 책장들과 상자들이 가득했고, 무림맹주 혁련진과 장수들은 마교의 남은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서책들을 뒤적였다.
비각 한구석의 의자에 누워 있던 남궁성은 지독한 갈증과 두통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목말라 죽겠다…… 달고 시원한 것 좀 다오……."
계속된 뇌맥의 마비 페널티로 인해 그의 입안은 사막처럼 바짝 말라붙어 있었고, 혀가 꼬여 침을 삼키기도 어려웠다. 안색이 노랗게 뜬 채 목을 긁어대는 그의 모습에, 남궁휘는 얼른 사천당가 가주가 선물한 새콤달콤한 '매실즙(梅實汁)' 항아리를 가져와 남궁성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가 매실즙 항아리의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시려던 바로 그 순간, 뇌맥이 벼락치듯 세차게 흔들리며 1각(15분) 뒤의 미래가 번쩍였다.
대략 1각 뒤의 미래.
서책을 조사하던 남궁휘가 책장 아래쪽의 숨겨진 서랍(기관 작동 발판)을 무심코 잡아당긴다.
그 순간 천마비각의 입구 흑철 해치가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며 방을 밀폐하고, 천장 틈새로 살을 파먹는 맹독 충인 '흑골독거미(黑骨毒蜘蛛)' 수만 마리가 홍수처럼 쏟아져 내려 토벌대 고수들을 살을 녹여 몰살시키는 참혹한 파국이었다.
"으악! 밀폐형 독거미 샤워라니! 이 천마 놈은 책장에다가도 방충망 대신 거미망을 깔아놨네!"
남궁성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독거미 격발 기어를 멈추려면, 책장 밑바닥 타일 틈새에 숨겨진 기어 장치에 강한 산성의 점성 액체(끈적하고 산도가 높은 진한 매실즙)를 흘려보내야 했다. 그 기어는 특수한 동식물성 그리스유(lubricating grease)로 가동되고 있어, 강한 과일 산성의 즙과 반응하면 그리스유가 하얗게 응고하여 회전을 강제로 정지시키는 특이한 화학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내 손에 든 매실즙 항아리를 바닥에 쏟아부어야 해. 쏟아진 매실즙이 타일 홈을 타고 흘러 들어가 책장 아래 기어 틈새로 침투해 기름을 응고시키고 멈추게 조율해야 한다!'
남궁성은 지독한 두통과 갈증 속에서 매실즙 항아리를 입술로 가져갔다.
하지만 뇌맥의 강렬한 발작이 찾아와 목가에 쥐가 났고, 그의 손아귀 힘이 풀렸다.
"끄학……!"
앞으로 엎어진 남궁성의 손에서 황동 매실 항아리가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굴데굴데굴---!
항아리는 흑철 청석 바닥을 타고 굴러가더니, 남궁휘가 조사하던 책장 밑바닥 틈새의 타일 홈 속에서 엎어지며 끈적하고 붉은 매실즙 오액을 폭포수처럼 쏟아부었다.
치이이익!
새콤하고 끈적한 고농축 매실즙은 타일 주름을 타고 책장 아래 숨겨진 마교의 동력 기어 장치 내부로 침투했다.
그리고 산성 즙이 동식물성 그리스유와 만나 찰나의 순간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기름을 굳은 치즈처럼 딱딱하게 응고시켜 버렸다.
바로 그 찰나, 남궁휘가 책장 아래 서랍을 힘껏 잡아당겼다.
"음? 이 안에 문서가 들었나?"
드르륵!
서랍이 당겨지며 격발 와이어가 팽팽해졌으나, 톱니바퀴 기어가 매실즙에 의해 완전히 응고되어 멈춰 서 있었기에 기관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동력 전달이 차단된 천장의 독거미 상자 지지 기둥은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폭사하며, 천장 뒤쪽의 마교 통제 통로 방향으로 무너져 내려 거미들을 자신들의 비밀 퇴로에 있던 마교 잔당들의 머리 위로 떨어뜨렸다.
"끄아악! 거미가 왜 이쪽으로 쏟아지냐!"
"살려줘! 퇴로가 막혔다!"
비각 천장 너머에서 마교 잔당들의 비명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고, 이로 인해 숨어 있던 첩자들의 대피로 위치가 아군에게 완벽하게 노출되었다.
"저 천장 너머에 잔당들이 숨어 있다!"
"즉각 추격하여 일망타진하라!"
남궁휘와 무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천장 위 통로로 기어 들어가, 독거미에 물려 비명을 지르며 뒹구는 마교의 생존자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비각 내부의 위험이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완벽하게 제거된 것이다.
바닥에 자빠진 채, 엎어진 빈 매실 항아리를 바라보며 갈증과 두통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남궁성을 본 맹주 혁련진은 눈물을 훔치며 포권을 취했다.
"남궁 소협……! 기어 장치의 동식물성 윤활유가 과일 산성 액체와 만나면 응고한다는 화학적 성질을 미리 꿰뚫어 보시고, 매실즙을 던져 장치를 굳혀 파해하신 것이오?! 이 어찌 물리와 화학의 상극 관계마저 완벽히 지배하시는 신산이란 말이오!"
남궁휘 역시 무릎을 꿇으며 흐느꼈다.
"형님…… 달콤한 음료조차 저희의 생명을 구하는 영약으로 탈바꿈시키시다니, 이 남궁휘는 평생 형님의 지혜를 경외할 것입니다!"
남궁성은 비어버린 붉은 매실 즙을 보며, 뇌맥을 관통하는 편두통 속에서 피눈물을 흘렸다.
'내 매실 주스…… 아껴둔 단물인데 다 쏟아졌네…… 목말라 죽겠는데 물 한 모금 안 남았구만…… 나 진짜 마시려던 것뿐인데…… 살려줘…….'
남궁세가의 공식 미친개 남궁성은, 그렇게 천마비각의 수색 작업마저 매실즙 흘리기 하나로 적의 만독 거미 함정을 파해하며, 무림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도 유쾌한 '현묘군사(玄妙軍師)'로 다시 한번 전설에 박제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