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보는 세가의 미친개

11화: 깨달음은 불청객처럼 찾아온다
남궁성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지끈거리는 편두통과 콧가를 찌르는 은은한 침향(沈香)의 냄새였다.
"으으…… 대가리야……."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상체를 일으키자, 침상 곁에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며 조아렸다.
"삼공자님! 깨어나셨습니까!"
"의원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어서 가주님과 장로님들께도 기별을 넣어라!"
순식간에 처소가 소란스러워졌다. 남궁성은 멍하니 방 안을 둘러보았다. 평소 자신이 머물던 허름한 별채가 아니었다. 가문에서 오직 귀빈이나 핵심 직계만이 머물 수 있다는 최고급 내당(內堂)의 침소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아, 맞다. 어제 검총에서…….'
기억이 거슬러 올라갔다. 나뭇가지를 주우려다 미끄러졌고, 하필 벽을 잘못 짚어 백 년 동안 실종되었던 가문의 비전 검결 '천량검결'을 찾아버렸다. 그리고 밀려드는 엄청난 두통과 함께 까무러쳤던 것이다.
남궁성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는 사이, 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가주 남궁태황이 들이닥쳤다.
"성아! 몸은 좀 어떠냐!"
그의 뒤로는 대장로 남궁벽을 비롯한 노령의 장로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이전의 한심함이나 분노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깊은 경외와 감격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남궁태황은 아들의 손을 덥석 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의(御醫)에 버금간다는 명의들을 불러 네 맥을 짚게 했다. 뇌맥의 기운이 일시적으로 요동쳐 기절한 것이라더구나. 가문의 잃어버린 천량검결을 찾기 위해 네가 얼마나 온 힘을 다해 기문둔갑의 난제를 풀었는지, 이 애비는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구나."
"아니, 아버님. 그게 아니라 저는 그냥 미끄러져서……."
"오오! 아직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구나!"
대장로 남궁벽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감탄했다.
"천량조사께서 남기신 검총의 기관은 단순한 무력으로는 풀 수 없는 법. 오직 맑고 투명한 심안(心眼)과 천기를 읽는 혜안을 지닌 자만이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법이오. 삼공자께서는 이미 세가의 그 누구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해 계신 것이 틀림없소!"
남궁성은 입을 쩍 벌렸다. 해명하고 싶었지만, 장로들의 눈에 어린 광적인 믿음을 보니 도저히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남궁태황이 품 안에서 어제 보았던 주석통을 꺼냈다.
"성아. 가문의 법도에 따라, 비전을 되찾은 자에게 가장 먼저 이를 열람하고 익힐 권리가 주어진다. 네 사촌 휘아도 흔쾌히 네게 양보했으니, 오늘부터 이 천량검결을 네가 먼저 연마하도록 하거라."
"예? 제가요?"
남궁성은 기겁했다.
"아버님, 저는 내공의 '내' 자도 모르는 몸입니다. 이런 대단한 무공은 휘나 다른 형제들이 익히는 것이……."
"허허, 삼공자. 겸손이 지나치면 기만인 법입니다."
대장로 남궁벽이 허허 웃었다.
"이미 어제 삼공자께서 보여주신 신묘한 안목이라면, 이 검결의 난해한 구절도 순식간에 깨우치실 터. 마침 십여 일 뒤면 소가주를 결정하는 최종 경합이 치러지니, 그때까지만이라도 이 검결을 가볍게 훑어보아 가문의 위상을 드높여 주시게."
남궁태황은 주석통을 남궁성의 손에 쥐여주고는, 환자가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장로들을 이끌고 방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고 방 안에 홀로 남은 남궁성은 멍하니 주석통을 바라보았다.
'미쳤군. 진짜 미쳤어. 내가 무공을 익히라고? 글자도 겨우 읽는 판국에 무공 구결을 어떻게 이해해?'
남궁성은 마지못해 주석통의 봉인을 풀고 가죽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天梁一擊, 氣貫長虹……]
어려운 한문과 혈도 명칭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읽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안 되겠다. 1각 뒤의 미래를 좀 봐야겠어. 장로들이 진짜로 날 감시하는지, 아니면 내가 도망칠 구멍이 있는지.'
남궁성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대략 1각(15분) 뒤의 미래.
비바람이 불 조짐이 보이는지 창밖의 하늘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구름의 흐름을 보아하니 정확히 1각 뒤.
남궁성의 방 문이 벌컥 열리며 대장로 남궁벽이 다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연마용 목검이 들려 있었다.
- 삼공자! 혹시 첫 초식인 '천량토무(天梁吐霧)'의 구결을 이해하셨소? 내 가볍게 삼공자의 초식을 점검해 드리고자 왔소이다!
화들짝 놀란 미래의 남궁성이 목검을 잡고 대충 휘두르자, 대장로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 ……삼공자, 장난이 너무 심하십니다. 기본 초식조차 흉내 내지 못하다니, 어찌 어제 검총의 기적을 일궈내신 분이 이리 성의가 없단 말입니까? 정녕 세가를 놀리시는 겝니까?
미래 속 대장로의 목소리에는 실망과 의심이 가득했다.
이대로 가면 '미친 천재'의 가면이 벗겨지고, 가문을 기만한 죄로 지옥 같은 특훈에 끌려가거나 다시 낙향당할 터였다.
'으악! 15분 뒤에 대장로가 검을 확인하러 온다고?!'
남궁성은 이마를 짚었다.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 인과율을 비틀어야 했다.
어떻게 해야 대장로가 나를 의심하지 않고, 동시에 무공 시연을 피해 갈 수 있을까?
그는 방 안을 다급하게 둘러보았다. 마침 방 한구석에 놓인 커다란 화분과 물항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미래 예지를 다시 발동했다.
'만약 내가 1각 뒤에 대장로가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 방 문 앞에서 넘어지는 척하며 물항아리를 깨뜨린다면?'
미래가 요동쳤다.
항아리가 깨지면서 물이 쏟아지고, 대장로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물러서는 과정에서 대장로의 발에 걸린 목검이 부러지고, 어수선한 틈을 타 "아앗! 물을 밟고 미끄러지는 순간 천량검결의 신묘한 기운을 느껴 몸을 피한 것입니다!"라고 둘러대는 미래가 그려졌다.
'좋아, 대충 비슷하게 물을 쏟아서 정신을 빼놓자.'
시간이 흘렀다. 바람이 부는 속도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로 미루어 보아, 대략 1각이 다 되어갔다.
발자국 소리가 멀리서 들리기 시작했다. 대장로가 오고 있었다.
남궁성은 침상에서 내려와 물항아리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그리고 대장로가 문을 열기 직전, 발을 헛디딘 척하며 항아리를 몸으로 밀치려 했다.
그런데 아뿔싸.
바람이 갑자기 강하게 불어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는 바람에, 그가 어림잡은 '1각'의 타이밍이 찰나의 순간 어긋났다.
쿵!
대장로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도 전에, 남궁성이 먼저 발을 삐끗하며 항아리를 들이받았다.
"우왓?!"
항아리가 와장창 깨지며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와 동시에 남궁성은 중심을 잃고 바닥을 뒹굴었다.
바로 그 순간, 문이 스르륵 열리며 대장로 남궁벽이 들어섰다.
"삼공자, 내 가볍게 점검을…… 어라?!"
대장로는 깨진 항아리와 쏟아진 물을 보고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항아리가 깨진 자리는 오래된 목조 바닥의 틈새였는데, 물이 스며들자마자 그 틈새에서 잠자고 있던 시커먼 독지네 한 마리가 깜짝 놀라 튀어나왔다.
손가락만 한 크기에 붉은 다리를 가진 독지네는 남궁성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기어왔다.
"으악! 엄마야!"
벌레라면 질색을 하는 남궁성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뒹굴고 있던 목검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휙!
남궁성은 그저 지네를 피해 도망치려 굴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뒹구는 궤적은 기가 막히게도 쏟아진 물줄기의 흐름을 피해 마른 바닥만을 밟는 신묘한 보법처럼 보였다.
더욱이 그가 아무렇게나 던진 목검은 벼락같은 속도로 날아가, 문턱을 밟고 서 있던 대장로의 발밑을 정확히 스쳐 지나갔다.
팍!
목검의 끝이 바닥을 꿰뚫었고, 그 아래에는 대장로의 신형을 노리고 도약하려던 독지네가 반으로 갈라진 채 꽂혀 있었다.
대장로 남궁벽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눈에는 방금 벌어진 상황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이, 이게 무슨……!'
대장로의 머릿속에서 경악의 회로가 굴러갔다.
삼공자는 자신이 방에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고, 바닥에 숨어 있던 맹독 지네의 살기를 찰나의 순간 감지했다. 그리하여 항아리를 깨뜨려 지네가 숨을 곳을 없애 밖으로 유인했고,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신묘한 신법으로 신형을 이동시킨 뒤, 눈으로 보지도 않고 손목의 스냅만으로 지네의 명줄을 끊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던진 목검에는 내공이 한 푼도 실려 있지 않았다. 오직 순수한 쾌검(快劍)의 투사(投射)이자, 천량검결의 정수라 불리는 '기운을 숨기고 실체만을 드러내는' 초식의 발현이었다.
대장로 남궁벽은 바닥에 꽂힌 지네와 남궁성을 번갈아 보며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삼, 삼공자……! 기어이 반나절 만에 천량검결의 첫 초식을, 그것도 심검(心劍)의 초입에 닿은 무형의 검법으로 구현해 내신 것입니까?!"
남궁성은 엉덩이를 바닥에 댄 채 멍하니 박살 난 지네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냥 벌레가 싫어서 던진 건데…….'
머리가 다시 깨질 듯이 아파왔다. 미래를 바꾸려다 발생한 인과율의 뒤틀림과 그에 따른 두통이었다. 남궁성은 머리를 감싸 쥐며 신음했다.
"으으…… 머리가……."
그 모습을 본 대장로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훔쳤다.
"무학의 진리를 찰나에 깨닫기 위해 뇌맥을 쥐어짜는 고통을 견디고 계시구나! 삼공자, 더 이상 무리하지 마십시오! 소생이 삼공자의 천재성을 의심하여 가볍게 시험하려 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대장로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뒤로 물러섰다.
"오늘 본 것은 가주의 윤허가 있을 때까지 비밀로 하겠소. 삼공자께서는 부디 몸을 보존하시어 소가주 경합에서 세가의 영광을 빛내 주소서!"
대장로는 감동에 찬 얼굴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갔다.
남궁성은 축축한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아…… 그냥 시골에 내려가서 닭이나 키우고 살걸……."
남궁세가의 미친개 남궁성은, 그렇게 또 한 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림 역사에 길이 남을 '세기의 무학 천재'로 거듭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