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에서 죽는 삼류 악당이 되었다

3화: 대숲의 역매복
둥. 둥. 둥.
북쪽 대숲 너머에서 울린 북소리는 느렸다.
원작에서 저 소리가 세 번 울린 뒤 설가장의 북문이 무너졌다. 백위량은 그보다 먼저 목이 날아갔다.
“말해라.”
설무경이 북문 쪽을 향한 채 입을 열었다.
“장흑산이 무엇을 노리느냐.”
백위량은 대숲을 바라보았다. 서쪽 수로는 막았지만 흑풍채 본대는 이제 막 움직이기 시작했다.
“북문을 부수는 척할 겁니다.”
설무경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척한다는 말이냐?”
“공성목과 불화살로 수비대를 묶어 둘 겁니다. 그리고 북문 동쪽 마른 골짜기로 정예를 돌립니다. 장주님께서 북문을 돕겠다고 무사를 보내면 골짜기에서 퇴로를 끊을 생각입니다.”
설소운이 대숲 너머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그 골짜기는 장원 안으로 들어오는 길이 아니오.”
“그래서 놈들이 쓸 수 있습니다.”
백위량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
“바위가 높고 길이 좁습니다. 들어간 쪽도 물러난 쪽도 한꺼번에 막기 좋습니다. 우리가 먼저 들어가 양쪽을 잡으면 반대로 놈들의 무덤이 됩니다.”
설무경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가주의 시선이 백위량의 피 묻은 가죽옷과 북문과 대숲을 차례로 훑었다.
“네 말이 틀리면 북문도 골짜기도 함께 잃는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왜 이런 걸 묻습니까.’
속으로는 울부짖었지만 백위량은 고개를 들었다.
“북문은 소장주님이 지키시면 됩니다. 공성목을 미는 놈들은 세 번째 충격에 오른쪽으로 힘을 모읍니다. 그때 목줄을 끊으면 목책을 넘지 못합니다.”
설소운의 손이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그걸 네가 보겠다는 것이오?”
“소인이 신호를 듣겠습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설무경이 명했다.
“소운은 북문으로 간다. 정예 삼십은 마른 골짜기로 이동해라. 횃불을 끄고 바위 위에 숨는다. 내 신호가 있기 전에는 숨도 죽여라.”
무사들이 흩어졌다.
백위량도 따라 물러나려 했다.
“너는 북문에 선다.”
설무경의 말에 발이 멎었다.
“예?”
“네가 신호를 안다 했지. 그리고 네가 내 눈앞에 있어야 한다.”
활용과 감시.
두 마디를 친절하게 풀어 준 셈이었다.
백위량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지당하신 판단이십니다.”
북문으로 뛰는 동안 다리가 무거웠다. 사파 말단의 낡은 도를 찬 자신이 왜 목책 위로 올라가는지 알 수 없었다.
“불화살이다!”
대숲에서 날아온 화살이 북문 위 목책에 꽂혔다. 기름 먹인 천이 타오르며 불꽃을 튀겼다. 수비 무사들이 물통을 들고 뛰어다녔다.
이어서 굵은 공성목이 문을 찍었다.
쾅!
나무문 전체가 울렸다.
설소운이 목책 아래에 섰다.
“언제냐.”
“세 번째입니다.”
백위량은 공성목을 보았다. 흑풍채 무사 열댓이 밧줄을 잡고 있었다. 선두의 어깨가 낮아지고 뒤쪽 발이 동시에 땅을 밀었다.
“하나.”
쾅!
“둘.”
쾅!
세 번째 충격을 준비하는 순간 뒤쪽 무사들이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무게를 실어 문 경첩을 비틀려는 동작이었다.
“지금!”
설소운이 목책에서 뛰어내렸다.
검광이 밤을 비스듬히 갈랐다. 공성목을 끌던 굵은 밧줄이 한 줄로 잘려 나갔다. 힘을 주던 무사 셋이 뒤로 나뒹굴었다.
공성목은 땅을 긁으며 엉뚱한 방향으로 굴렀다.
“왼쪽 망루!”
백위량이 다시 외쳤다.
“불화살 쏘는 놈은 그 뒤 바위에 있습니다!”
설소운의 검끝에서 튄 돌조각이 망루 너머로 날아갔다. 불화살을 재던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타오르던 화살 몇 개가 진흙에 처박혔다.
북문 앞에서 흑풍채의 함성이 잠시 끊겼다.
백위량은 숨을 몰아쉬었다.
‘맞았어. 이번에도 맞았어.’
그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백위량!”
마봉칠의 고함이 목책을 흔들었다.
놈은 붕대로 옆구리를 묶은 채 북문 앞에 서 있었다. 핏발 선 눈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기어 나와라! 네놈 가죽을 벗겨 채주님 앞에 바치겠다!”
백위량은 목책 뒤로 몸을 더 숨겼다.
기어 나갈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때 흑풍채 무사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사이로 검은 갑옷을 입은 거한 하나가 느린 걸음으로 나타났다. 손에는 사람 팔만 한 철편곤이 들려 있었다.
짧은 수염 아래의 입가가 비틀렸다.
장흑산.
원작에서 설무경의 가슴뼈를 부수고 설소운에게 첫 원한을 새긴 사내였다.
“저것이 백위량이냐.”
장흑산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 북문 위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마봉칠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놈이 곽노삼까지 팔아먹었습니다.”
“수로도 막고 내응자도 끊었다.”
“살려 둘 이유가 없군.”
백위량은 속으로 억울함을 삼켰다. 먼저 죽이려 든 쪽은 저들이었는데 배신자 취급은 자신이 받고 있었다.
장흑산이 철편곤 끝으로 북문 동쪽을 가리켰다.
“동쪽 벽을 넘는다.”
흑풍채 정예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백위량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북문 공격이 멎었다. 원작의 순서대로라면 저들이 마른 골짜기 쪽으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그런데 계획대로 흘러가려면 마지막 미끼가 필요했다.
“설 장주님.”
백위량이 목책 아래의 설무경을 불렀다.
“저들이 골짜기 안으로 깊이 들어오게 하려면 빈틈을 보여야 합니다.”
설무경의 눈썹이 움직였다.
“어떤 빈틈이지.”
“동쪽 목책의 경비가 무너진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흑풍채 놈들이 아는 후퇴 신호를 울리면 놈들은 저를 쫓아올 겁니다.”
“네가 미끼가 되겠다는 말이냐?”
“제가 아니면 마봉칠이 믿지 않습니다.”
목책을 나서면 죽을 것 같았다. 그래도 장흑산의 정예를 골짜기로 끌지 못하면 복병은 헛일이 된다.
설소운이 다가와 낮게 말했다.
“안 된다.”
그 목소리에는 예상보다 강한 기색이 있었다.
“백위량. 네 목숨을 걸어 얻은 정보다. 내가 널 내보낼 수는 없소.”
백위량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은 단지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도망갈 길을 만드는 중이었다. 그런데 설소운은 그걸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소장주님이 지켜 주시면 됩니다.”
급하게 나온 말이었다.
설소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백위량은 서둘러 덧붙였다.
“소장주님 검이 있으니 소인은 믿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설소운은 잠시 말이 없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데려오겠소.”
설무경이 손을 들어 동쪽 목책의 무사들을 물렸다. 빈자리가 생기자 흑풍채 무사들이 환호했다.
백위량은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연막탄을 꺼냈다. 사파 말단 시절의 백위량이 챙긴 도주용 물건이었다.
‘이럴 때 쓰라고 있던 거겠지.’
그는 목책 아래로 내려섰다.
마봉칠이 기다렸다는 듯 박도를 들었다.
“나왔구나!”
백위량은 대답 대신 연막탄을 바닥에 내리쳤다.
퍽!
회색 연기가 북문 앞에 퍼졌다. 그는 연기 속에서 동쪽 골짜기 방향으로 달렸다. 뒤에서는 일부러 발을 끌며 도망치는 소리를 냈다.
“저기다!”
마봉칠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백위량은 성벽 아래의 피리수에게 손짓했다.
세 번 짧은 피리 소리가 울렸다.
삐익. 삐익. 삐익.
흑풍채가 퇴각하거나 길을 바꿀 때 쓰는 신호였다.
“놈이 동쪽으로 빠진다!”
마봉칠이 소리쳤다.
장흑산의 정예가 그 뒤를 쫓았다. 동쪽 목책의 빈틈으로 들어오려던 놈들이 방향을 틀어 골짜기로 밀려들었다.
백위량은 골짜기 초입의 젖은 돌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연기가 옅어지자 마봉칠이 바로 앞에 있었다.
박도가 머리 위로 치켜들렸다.
“죽어라!”
그 순간 피리 대신 날카로운 휘파람이 골짜기를 갈랐다.
설무경의 신호였다.
양쪽 바위 위에서 화살이 쏟아졌다.
“쏴라!”
설가장 무사들이 어둠을 찢고 모습을 드러냈다. 앞쪽 길은 방패를 든 무사들이 막고 뒤쪽은 굴러 내린 통나무가 막아섰다.
흑풍채 정예의 함성이 비명으로 바뀌었다.
마봉칠이 박도를 돌려 날아온 화살을 쳐 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골짜기 안에 들어온 놈들은 서로 부딪치며 엉켰다.
장흑산의 얼굴도 굳었다.
“매복이다.”
거한이 철편곤을 휘둘렀다.
콰앙!
바위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설가장 무사 둘이 충격에 밀려났다. 장흑산은 그 틈으로 포위를 찢으려 했다.
검은 장력이 그의 손바닥 위에 번졌다.
흑사장.
백위량의 얼굴에서 피가 가셨다. 저 장법을 정면으로 받으면 설소운이라도 무사하지 못한다. 하지만 원작에는 장흑산이 오른쪽 견갑을 다친 뒤 세 번째 장을 끝까지 뻗지 못한다는 묘사가 있었다.
지금이다.
“소장주님!”
설소운이 장흑산 앞을 막아섰다.
“오른쪽 견갑 아래를 노리십시오! 두 장을 피하고 세 번째가 올 때 검을 올리면 됩니다!”
장흑산의 시선이 백위량에게 날아들었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대답은 장흑산의 손바닥이 대신 끊었다.
첫 번째 흑사장이 땅을 파헤쳤다. 설소운이 몸을 틀었다.
두 번째 장력이 그의 어깨를 스치며 목책 조각을 산산이 부쉈다.
장흑산의 오른발이 앞으로 나갔다.
세 번째.
설소운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솟았다.
푹!
검끝이 장흑산의 오른쪽 견갑 아래를 꿰뚫었다.
검은 장력이 허공에서 흐트러졌다. 장흑산의 몸이 크게 비틀렸고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채주님!”
마봉칠이 달려들었다.
설소운의 검이 한 번 더 번뜩였다. 마봉칠의 박도가 튕겨 나가며 그의 손등에서 피가 터졌다.
장흑산은 부상당한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나 눈빛만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물러나라!”
흑풍채 무사들이 뒤엉켜 퇴로를 열었다. 장흑산은 철편곤으로 통나무 하나를 부수고 대숲 쪽으로 물러났다. 마봉칠도 피투성이 손을 감싼 채 그 뒤를 따랐다.
장흑산이 대숲의 그림자 안으로 사라지기 전에 백위량을 노려보았다.
“백위량의 목에 은전 백 냥을 건다.”
낮은 목소리가 골짜기에 남았다.
“흑풍채의 누구든 놈을 죽이면 내 손으로 술을 따르겠다.”
백위량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은전 백 냥이면 자신의 목은 지나치게 비싸졌다.
설소운이 피 묻은 검을 들고 그의 앞에 섰다.
“누구도 백위량에게 손대지 못한다.”
백위량은 그 등을 바라보았다.
왠지 든든했다. 아주 조금은.
설무경이 골짜기 안을 둘러보며 명령했다.
“부상자를 먼저 옮겨라. 포로는 묶고 대숲 안쪽은 깊게 쫓지 마라. 장흑산이 물러난 길에도 함정이 있을 수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백위량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 밤 네 말이 설가장을 두 번 살렸다.”
백위량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소인이 아는 것이 우연히 맞았을 뿐입니다.”
“우연으로 북문을 지키고 적의 퇴로까지 묶지는 못한다.”
설무경의 얼굴은 여전히 냉정했다.
“하지만 널 믿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 말에 백위량은 오히려 안심했다. 너무 쉽게 믿는 쪽이 더 무서웠다.
“장원으로 돌아간다. 네가 아는 것과 네가 누구인지 모두 듣겠다.”
설소운이 백위량의 곁에 섰다. 이번에는 팔을 붙잡지 않았다. 대신 흑풍채가 사라진 대숲 쪽을 향해 검을 들었다.
백위량은 새벽빛이 번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설가장과 자신은 살아남았다. 그 대가로 흑풍채는 백위량의 목을 노리게 되었다.
그리고 설가장은 그를 장원 안으로 데려가려 했다.
도망칠 길은 하나 줄었고 살아남을 이유는 하나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