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에서 죽는 삼류 악당이 되었다

2화: 프락치의 값
“보셨습니까.”
백위량은 웃었다.
웃었다기보다 얼굴이 멋대로 굳었다. 목 앞에 닿은 검끝이 살갗을 차갑게 눌렀다. 숨을 조금만 크게 쉬어도 피가 날 거리였다.
서쪽 담장 너머에서는 비명이 끊기지 않았다.
“불이다! 약초 창고 쪽에 적이다!”
설소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봉칠도 멈칫했다. 옆구리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다. 놈의 시선은 백위량을 찢어 죽이고도 남을 만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백위량은 그 눈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저쪽으로 가도 죽는다.
하지만 당장 목을 자를 수 있는 사람은 설소운이었다.
“내응자의 이름.”
설소운이 말했다.
“지금 말해라.”
백위량은 혀가 굳는 것을 느꼈다.
원작의 문장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넘어갔다. 서쪽 약초 창고. 물길을 타고 열린 수로. 설가장 사람이 직접 풀어 준 보조 열쇠. 그리고 뒤늦게 배신이 드러나 설소운을 절망하게 만들었던 늙은 총관.
이름 하나가 목숨값이었다.
“곽노삼입니다.”
설소운의 검끝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곽 총관?”
“약초 창고 열쇠와 서쪽 수로문 보조 열쇠를 가진 자입니다. 지금 창고 뒤 수로에서 흑풍채 침투조를 들이고 있을 겁니다.”
“헛소리!”
마봉칠이 포효했다.
놈이 박도를 쳐들고 달려왔다. 옆구리를 베였는데도 기세는 죽지 않았다. 검은 도신이 불빛을 받아 번뜩였다.
설소운의 검이 맞섰다.
쾅!
검과 박도가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힘은 마봉칠이 위였다. 설소운의 발이 반걸음 밀렸다.
백위량은 흙바닥을 기어가듯 물러났다.
‘주인공이면 이겨야지. 왜 밀려. 지금 밀리면 내가 죽잖아.’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대신 살기 위한 외침이 튀어나왔다.
“오른팔을 보지 마십시오! 왼발입니다! 왼발이 땅에 붙으면 다시 쇠침입니다!”
설소운의 시선이 내려갔다.
마봉칠의 왼발이 땅을 찍었다. 동시에 소매가 꿈틀했다. 검은 쇠침 하나가 어둠 속으로 튀었다.
설소운의 검면이 아래로 떨어졌다.
캉!
쇠침이 흙에 박혔다.
마봉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백위량!”
놈이 방향을 틀었다. 설소운이 아니라 백위량에게 달려들었다.
“네놈부터 찢어 죽인다!”
백위량은 진심으로 억울했다.
배신은 맞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벌을 받는 것은 부당했다.
“소장주님! 서쪽 수로문부터 닫아야 합니다! 창고 옆 우물 뒤에 쇠줄이 있습니다!”
설소운은 짧게 이를 악물었다.
“설가 무사들은 서쪽으로 가라! 우물 뒤 쇠줄을 찾아라!”
담장 안쪽에서 달려오던 경비 무사들이 명령을 받고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마봉칠의 얼굴이 굳었다.
그 반응만으로 충분했다.
설소운도 그것을 보았다.
“너는 나와 간다.”
“예?”
백위량이 되묻는 순간 그의 뒷덜미가 잡혔다.
다음 순간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으아악!”
설소운은 백위량을 사람처럼 다루지 않았다. 짐짝처럼 들고 담장을 넘었다. 발밑으로 어둠이 휙 지나갔다. 백위량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땅에 내려앉은 뒤에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서쪽 약초 창고는 이미 붉었다.
불길이 지붕 끝을 핥았다. 약재 타는 냄새와 젖은 흙냄새가 뒤섞여 목을 찔렀다. 설가장 무사들은 혼란 속에서 창고와 수로 사이를 오갔다.
수로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아래로 흑풍채 무사들이 몸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젖은 검은 옷이 불빛 아래 번들거렸다.
백위량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원작에서는 저 문이 끝까지 열렸다. 흑풍채 무사들이 안마당까지 들어왔고 설가장의 방어선은 불길 속에서 무너졌다.
하지만 지금은 반쯤이었다.
반쯤이면 닫을 수 있다.
“우물 뒤 쇠줄만으로는 안 됩니다!”
백위량이 외쳤다.
“창고 기둥 밑 짚더미를 치우십시오! 그 아래 두 번째 걸쇠가 있습니다!”
설소운은 묻지 않았다.
그는 백위량을 내려놓자마자 짚더미를 향해 몸을 날렸다. 흑풍채 무사 하나가 막아섰지만 검광 한 줄에 손목을 잃고 물러났다.
짚더미가 갈라졌다.
검은 쇠갈고리가 드러났다.
설소운의 검이 내려쳤다.
캉!
쇠갈고리가 끊어졌다.
동시에 경비 무사들이 우물 뒤 쇠줄을 당겼다. 반쯤 열린 수로문이 덜컹거리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막아!”
수로 아래에서 흑풍채 무사들이 몸을 던졌다. 둘이 문 아래로 어깨를 밀어 넣고 버텼다.
백위량은 수로 벽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기름 묻은 항아리의 둥근 배가 보였다. 원작에서 불길을 키운 장치였다.
“왼쪽 벽! 횃불 가까이 대지 마십시오! 기름 항아리입니다!”
횃불을 들고 달려가던 설가장 무사가 멈춰 섰다. 그의 눈앞에서 작은 항아리들이 줄줄이 드러났다.
그대로 불이 닿았다면 수로 입구는 지옥이 되었을 것이다.
설소운은 몸을 낮췄다. 그의 검이 물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문 아래 버티던 흑풍채 무사들의 팔에서 피가 터졌다.
수로문이 떨어졌다.
쿵!
장원 안쪽으로 들어오던 침투조가 둘로 갈라졌다.
이미 들어온 놈들은 설가장 안에 갇혔다. 밖에 남은 놈들은 수로 밖에 갇혔다. 설가장 무사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포위망을 좁혔다.
백위량은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한 놈이 남았다.
“곽노삼을 잡으십시오!”
그의 외침에 시선들이 돌아갔다.
불길 옆에서 회색 장포를 입은 노인이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희끗한 수염. 굽은 어깨. 설가장 식솔들이 믿고 창고 열쇠를 맡겼던 늙은 총관.
곽노삼이었다.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놈 말을 믿는 겁니까? 저놈은 흑풍채 사파 놈입니다! 내응자가 아니라 저놈이 간자입니다!”
설가장 무사들의 손이 흔들렸다.
겉모습만 보면 백위량보다 수상한 자는 없었다. 피비린내 밴 가죽옷. 흑풍채 무리와 함께 나타난 사파 무사. 프락치라는 말도 스스로 떠든 것뿐이었다.
백위량은 자기 꼴을 내려다보았다.
믿음직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증거가 필요했다.
“왼쪽 소매 안쪽을 보십시오!”
곽노삼의 눈이 커졌다.
“검은 철편이 있습니다. 바람 문양이 새겨진 흑풍채 암표입니다. 허리끈 안쪽에는 서쪽 수로 보조 열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입 닥쳐라!”
곽노삼이 품에서 비수를 뽑았다.
움직임은 늙은 총관의 것이 아니었다. 짧고 빠르며 독했다. 가까이 있던 설가장 무사의 목으로 비수가 파고들었다.
설소운이 먼저 닿았다.
그의 검끝이 곽노삼의 손목을 스쳤다.
비수가 떨어졌다.
곽노삼이 비명을 질렀다. 설소운은 곧장 그의 왼쪽 소매를 찢었다.
검은 철편이 바닥에 굴렀다.
불빛 아래 바람 문양이 선명했다.
설가장 무사들의 얼굴이 굳었다.
“곽 총관이…….”
“정말 흑풍채와 내통했단 말인가.”
설소운은 말없이 곽노삼의 허리끈을 끊었다.
작은 열쇠가 돌바닥에 떨어졌다.
소리가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숨을 멈추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백위량은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의심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상한 존경이 들어올 수 있었다.
그는 숭고한 의사가 아니었다.
목숨 아까운 인간이었다.
곽노삼이 이를 갈았다.
“백위량. 왜 우리 일을 망치느냐. 채주님께서 네놈을 살려둘 것 같으냐?”
설소운의 시선이 백위량에게 닿았다.
그 눈은 전과 달랐다.
의심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 다른 빛이 섞였다. 이해할 수 없다는 빛. 어쩌면 인정에 가까운 빛.
백위량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소인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해야 할 일.
살기 위해 해야 할 일.
다만 뒷부분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북쪽에서 함성이 터졌다.
마봉칠이었다.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흑풍채 잔당을 이끌고 담장 밖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백위량!”
마봉칠의 목소리가 밤을 찢었다.
“네놈 목은 내가 가져간다!”
백위량은 속으로 울었다.
‘제발 가져가지 마라. 목은 원래 주인한테 붙어 있는 게 제일 좋다.’
“소운아!”
굵은 목소리가 불길을 뚫고 왔다.
중년의 검객이 무사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회색 무복 위에 걸친 외투가 밤바람에 펄럭였다. 눈빛은 칼처럼 단단했다.
설가장 가주 설무경.
원작에서는 이 밤에 치명상을 입고 다음 장에서 죽는 인물이었다.
지금은 살아 있었다.
이미 이야기가 바뀌고 있었다.
설무경의 시선이 수로문과 곽노삼과 백위량을 차례로 훑었다.
“무슨 일인지 설명해라.”
설소운이 숨을 골랐다.
“이자가 우리를 살렸습니다. 아직 믿을 수는 없지만 정보는 모두 맞았습니다.”
설무경의 눈이 백위량에게 박혔다.
백위량은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소인 백위량입니다. 흑풍채의 움직임을 알고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말하지?”
질문은 짧았다.
그만큼 무서웠다.
백위량의 정답은 하나였다. 살고 싶어서. 설소운이 죽으면 자신도 죽을 테니까. 흑풍채로 돌아가도 가죽이 벗겨질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가장 그럴듯한 얼굴을 만들었다.
“흑풍채가 이 밤 설가장을 치면 강호의 의가 무너집니다.”
말하고 나서 속으로 욕했다.
그런데 설소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주변 무사 몇 명도 숨을 삼켰다.
백위량은 더 무서워졌다.
‘왜 먹히는데.’
설무경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남은 적은?”
백위량은 북쪽 대숲 쪽을 보았다.
원작의 흐름이 떠올랐다. 흑풍채주 장흑산은 본대를 바로 움직이지 않는다. 서쪽 불길이 커지고 수로가 열렸다는 신호를 기다린다. 그 후 새벽 직전 북문을 깨뜨려 설가장 중심부로 밀고 들어온다.
그 시간이 설가장의 무덤이 되는 시간이었다.
“흑풍채주 장흑산은 북쪽 대숲 밖 느티나무 고개에 있습니다. 서쪽 침투가 성공했다는 신호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새벽 전까지 본대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설무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걸 어찌 알았느냐.”
백위량은 고개를 더 숙였다.
“그들 밑에서 오래 굴렀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백위량의 몸은 그랬다. 이진수의 머리는 책 속에서 더 오래 굴렀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사이 수로 안쪽에서는 짧은 비명들이 터졌다. 갇힌 흑풍채 무사들이 하나둘 제압되고 있었다. 설가장 무사들은 불길을 약초 창고 안쪽에서 잘라 내며 피해를 막았다.
설무경이 명했다.
“수로 안의 적을 모두 묶어라. 곽노삼은 살려 둔다. 불을 잡고 북쪽 경계를 다시 세워라.”
명령이 떨어지자 무사들이 움직였다.
설무경은 백위량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운아. 이자를 데려와라.”
설소운이 백위량의 팔을 잡았다.
포승줄은 아니었다.
하지만 놓아줄 손도 아니었다.
백위량은 끌려가며 계산했다.
설가장이 살았다. 설소운도 살았다. 그러면 자신이 살 가능성도 올라갔다.
문제는 흑풍채가 이제 그를 반드시 죽이려 든다는 점이었다.
설무경이 걸음을 멈췄다.
“백위량.”
“예.”
“장흑산을 잡을 방법도 알고 있느냐?”
백위량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알았다.
너무 잘 알았다.
그리고 그걸 말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설가장에서도 흑풍채에서도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북쪽 대숲 너머에서 낮은 북소리가 울렸다.
둥. 둥. 둥.
흑풍채 본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