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에서 죽는 삼류 악당이 되었다

시놉시스
인기 무협 소설 <천마강림>을 수십 번 정독한 고인물 독자 이진수.
눈을 떠 보니 그는 원작 첫 장에서 주인공 설소운의 검에 목이 날아가는 흑풍채 삼류 악당 백위량이 되어 있었다.
사망 예정 시각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십 분.
도망치면 흑풍채에게 죽고 그대로 가면 설소운에게 죽는다. 살기 위해 백위량은 칼을 버리고 원작 주인공 앞에 무릎 꿇는다.
1화: 죽기 십 분 전
눈을 뜨자 피 냄새가 났다.
정확히는 아직 흘린 피가 아니었다. 낡은 가죽 갑옷에 배어든 오래된 피비린내와 땀 냄새였다. 이진수는 코를 찌르는 악취에 헛구역질을 하려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앞에는 시커먼 옷을 입은 사내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허리에는 도끼와 박도가 걸려 있었다. 얼굴에는 사람 잡는 일을 밥 먹듯 해 온 자들의 느슨한 살기가 묻어 있었다.
“백위량. 정신 차려라. 네가 선봉이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걷어찼다.
백위량.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이진수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곧바로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백위량이라면 알았다. 너무 잘 알았다.
무협 소설 <천마강림>을 수십 번 읽은 그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원작 첫 장에서 설가장을 습격하는 흑풍채의 말단 간부.
주인공 설소운 앞에서 “네 애비 무덤 자리까지 내가 봐 두었다” 같은 저급한 대사를 내뱉다가 세 합 만에 목이 날아가는 삼류 악당.
그게 바로 백위량이었다.
‘미친.’
이진수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에는 칼집이 있었다. 손톱 밑에는 검은 때가 끼어 있었다. 손바닥은 굳은살투성이였지만 깊은 내공을 품은 고수의 손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왜 이놈이냐.
빙의라면 주인공이든 은둔고수든 하다못해 지나가던 약방 주인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는 원작 초반에 목이 떨어질 예정인 악당의 몸에 들어와 있었다.
“오늘 설가장 문짝을 뜯고 나면 채주님께서 술독 하나씩 내려 주신다 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낄낄거렸다.
설가장.
그 한마디가 남은 희망을 완전히 꺾었다.
‘오늘이 그날이라고?’
백위량은 급히 주변을 살폈다.
대숲. 북쪽 담장. 길게 누운 개울. 원작에서 흑풍채가 설가장의 야간 경계를 우회할 때 쓴 샛길 그대로였다.
이 장소와 이 밤이라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설소운에게 목이 잘리기 십 분 전.
백위량은 튀고 싶었다. 아주 정직하게 말해 지금 당장 뒤로 돌아 산을 타고 싶었다.
문제는 그의 뒤에도 칼 든 흑풍채 놈들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를 걷어찬 사내가 다가왔다.
턱에 긴 흉터가 있는 거한이었다. 흑풍채 부대장 마봉칠. 원작에서는 설소운의 어깨를 베어 상처를 남기지만 결국 설가장 가주의 손에 죽는 놈이었다.
“왜 떠느냐?”
“제가 떱니까?”
“이빨이 딱딱거린다.”
백위량은 이를 악물었다.
“추워서 그렇습니다.”
“여름밤에?”
“심장이 뜨거우면 바깥이 찹니다.”
말하고 나서 자신도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마봉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백위량은 등골이 얼어붙는 기분으로 웃었다.
마봉칠은 잠시 그를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허세는 여전하군. 앞장서라. 네가 설가장 어린 것들을 제일 잘 겁준다며?”
젠장.
원작의 백위량은 진짜로 그랬다.
강자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약자 앞에서는 목소리를 키우는 양아치. 그래서 설소운의 역린을 정면으로 밟았다.
그대로 가면 죽는다.
도망쳐도 죽는다.
흑풍채 안에서 “갑자기 몸이 아픕니다” 같은 소리를 해도 죽는다. 저놈들은 아픈 부하를 걱정하는 대신 등에 칼을 꽂고 전리품을 나눌 자들이었다.
남은 길은 하나였다.
원작 주인공에게 붙는다.
‘설소운. 성격은 호구처럼 의리 있고 은혜는 평생 갚는 놈. 지금은 아직 가문 멸문 전이라 흑화도 안 됐다.’
문제는 어떻게 믿게 만드느냐였다.
사파 무사가 갑자기 착한 척한다고 누가 믿겠는가. 그냥 수작이라고 보고 베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백위량에게는 원작 지식이 있었다.
내응자의 이름. 습격 경로. 마봉칠의 암수. 흑풍채주의 무공 약점. 그리고 설소운이 첫 위기에서 쓰는 검법의 흐름까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던지면 설소운도 함부로 베지 못한다.
“가자.”
마봉칠의 낮은 명령과 함께 흑풍채 무리들이 움직였다.
대숲이 검은 물결처럼 흔들렸다. 백위량은 선두에서 걸었다. 두 다리가 자기 것이 아닌 듯 떨렸다.
담장에 가까워질수록 원작의 문장들이 떠올랐다.
설소운은 북쪽 담장 안쪽 배나무 아래에 있었다. 아버지의 명으로 야간 경계 보강을 확인하러 나온 참이었다. 흑풍채 놈들이 담을 넘자마자 그는 검을 뽑는다.
그리고 백위량이 입을 턴다.
그 다음 목이 난다.
‘입을 털지 마. 아니. 털어야 산다. 다만 방향을 바꿔.’
백위량은 숨을 들이켰다.
담을 넘는 순간 끝이다. 그 전에 판을 뒤집어야 했다.
그때 담장 너머에서 작은 돌멩이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흑풍채 무리들이 멈췄다. 마봉칠이 손을 들었다.
“누구냐.”
대답 대신 푸른빛이 어둠을 갈랐다.
검이었다.
담 위에 선 청년이 달빛을 등지고 있었다.
흰 무복의 소매가 밤바람에 흔들렸다. 얼굴은 아직 소년티가 남았지만 눈빛만큼은 맑고 서늘했다.
설소운.
원작의 주인공.
그리고 백위량의 사형 집행인.
“설가장의 북문으로 숨어드는 자들이라.”
설소운이 검끝을 낮췄다.
“흑풍채인가.”
마봉칠이 입술을 비틀었다.
“어린놈 눈치는 빠르군. 백위량!”
백위량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네가 먼저 가서 저 어린 개를 물어라.”
뒤에서 수십 개의 시선이 꽂혔다. 앞에서는 설소운의 검이 기다렸다.
백위량은 천천히 허리춤의 박도를 뽑았다.
그리고 그대로 땅에 던졌다.
철컹.
그 소리가 기묘하게 크게 울렸다.
마봉칠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설소운의 눈썹이 꿈틀했다.
백위량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목숨이 걸리니 체면 같은 것은 모래알보다 가벼웠다.
“소장주님!”
목이 갈라졌다. 그래도 외쳤다.
“소인 백위량! 흑풍채에 숨어든 프락치로서 소장주님을 구하러 왔습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봉칠이 한 박자 늦게 으르렁거렸다.
“이 새끼가 미쳤나.”
설소운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사파의 말은 믿지 않는다.”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지금 왼쪽 어깨를 반 치 낮추십시오!”
설소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봉칠이 움직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놈의 소매 안에서 검은 쇠침 세 개가 튀어나갔다. 원작에서 설소운의 어깨를 찢은 암수였다.
설소운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낮췄다.
쇠침이 그의 머리카락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설소운의 검이 번개처럼 내려왔다. 검면이 쇠침 둘을 쳐 냈고 마지막 하나는 담장에 박혔다.
마봉칠의 눈이 커졌다.
백위량은 속으로 울었다.
‘맞았다. 살았다. 아니 아직 안 살았다.’
그는 바로 다음 말을 뱉었다.
“마봉칠의 칠살도는 세 번째 발이 비어 있습니다! 놈이 오른발을 끌면 왼쪽 갈비가 열립니다!”
“닥쳐라!”
마봉칠이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흑풍채 졸개들도 뒤따라 움직였다. 백위량은 본능적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설소운의 검이 달빛을 잘랐다.
마봉칠의 박도가 거칠게 부딪혔다. 힘은 마봉칠이 위였다. 하지만 설소운은 백위량이 말한 대로 오른발이 끌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검끝이 낮게 파고들었다.
촤악!
마봉칠의 옆구리에서 피가 튀었다.
“크윽!”
흑풍채 무리들이 멈칫했다.
설소운의 눈빛이 처음으로 백위량에게 향했다.
그 눈에는 의심과 분노가 함께 있었다. 한 번 더 입을 잘못 놀리면 바로 목이 날아갈 거리였다.
“네가 어찌 그걸 알았지?”
백위량은 땅에 엎드린 채로 고개를 들었다.
답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목숨을 걸면 혀가 제멋대로 살 길을 찾았다.
“제가 그놈들 밑에서 굴렀기 때문입니다! 소장주님께 이 밤의 일을 알리려 했으나 감시가 심했습니다!”
“거짓이면 죽는다.”
“참이어도 늦으면 설가장이 죽습니다!”
그 말에 설소운의 표정이 굳었다.
백위량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몸을 세우고 무릎을 꿇었다. 이마를 흙바닥에 박았다. 자존심이 바닥에 갈렸지만 목이 붙어 있는 편이 훨씬 중요했다.
“북쪽 대숲은 미끼입니다. 진짜 병력은 서쪽 약초 창고 뒤 수로로 들어옵니다. 안쪽 문을 열어 줄 내응자가 있습니다.”
담장 안쪽에서 경비 무사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흑풍채 졸개들은 배신자를 죽이겠다고 이를 갈았다. 마봉칠이 피 묻은 옆구리를 움켜쥐고 외쳤다.
“백위량! 네놈은 채주님이 산 채로 가죽을 벗길 것이다!”
백위량은 그 말을 듣고도 설소운만 보았다.
여기서 물러서면 죽는다. 여기서 반쯤 믿게 만들면 살 수도 있다.
그래서 가장 절박한 얼굴을 만들었다.
“소장주님.”
백위량은 목소리를 낮췄다.
“내응자의 이름을 말하겠습니다.”
설소운의 검끝이 그의 목 앞에서 멈췄다.
차가운 검기가 살갗을 찔렀다. 백위량은 침도 삼키지 못했다.
그때 서쪽 담장 너머에서 비명이 터졌다.
“불이다! 약초 창고 쪽에 적이다!”
원작의 멸문이 시작되고 있었다.
설소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백위량은 식은땀에 젖은 얼굴로 겨우 웃었다.
“보셨습니까.”
그의 목은 아직 붙어 있었다.
하지만 설가장의 밤은 이제 막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