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인공의 호위기사로 취직했습니다

2화: 실전 호위 시험
“실전이라면 자신 있습니다.”
로잘린의 말이 떨어지자 연무장에 웃음이 번졌다.
에린 자작가의 철문 안쪽은 밖에서 본 것보다 넓었다. 중앙에는 흙을 단단히 다진 원형 경기장이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목검과 방패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경기장 한가운데에는 사람 모양 더미 하나가 서 있었다.
더미의 어깨에는 푸른 리본이 묶여 있었다.
중년 시험관은 로잘린을 위아래로 훑었다. 낡은 코트. 오래된 검집. 귀족가 문장이 보이지 않는 장비. 그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로잘린의 얼굴에 닿았다.
“이름.”
“로잘린입니다.”
“성은?”
“실기 우선이라 들었습니다.”
지원자 몇 명이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성도 못 대는 여자가 전담 호위라니.”
“에린 자작가가 아주 급하긴 급한 모양이군.”
로잘린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코트 안쪽 깊숙한 곳에 숨긴 아스타 신분패의 무게만 조용히 의식했다.
지금 그 이름은 방패가 아니었다.
추적용 표식에 가까웠다.
시험관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나는 베른이다. 에린 자작가 외곽 경비를 맡고 있다. 오늘 시험은 단순하다. 저 더미가 임시 주군이다. 푸른 리본이 잘리면 탈락. 지원자가 경기장 밖으로 밀려나도 탈락. 공격자는 셋.”
“제압 기준은요.”
“무장 해제 또는 전투 의지 상실.”
“시험용 무장은 목검입니까.”
“그렇다.”
“호위 대상 이동은 금지입니까.”
베른이 잠시 말을 멈췄다.
다른 지원자들은 질문 자체를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그들에게 시험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자리였다. 더미는 점수를 표시하는 장식에 불과했다.
하지만 로잘린에게 더미는 주군이었다.
“이동은 가능하다. 단 리본이 손상되면 끝이다.”
“확인했습니다.”
로잘린은 뒤로 물러섰다.
첫 번째 지원자가 나섰다. 번쩍이는 흉갑을 입은 청년이었다. 그는 가문 문양이 박힌 장검을 자랑하듯 뽑아 들고 더미 앞에 섰다.
“이 정도라면 눈을 감고도 통과하지.”
시작 신호가 떨어졌다.
공격자 셋이 동시에 움직였다. 청년은 가장 앞에서 달려드는 공격자에게 맞섰다. 검이 요란하게 부딪쳤고 흙먼지가 튀었다. 그는 상대 하나를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순간 왼쪽에서 들어온 목검이 더미의 리본을 스쳤다.
푸른 천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탈락.”
베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다시 하겠습니다. 방금은 비겁하게 뒤를 노려서...”
“호위 대상에게 뒤가 생기게 한 건 너다. 다음.”
청년의 얼굴이 붉어졌다.
두 번째 지원자는 더미를 등지고 싸우려 했다. 시야가 막히자 세 방향 공격 중 하나를 놓쳤다. 세 번째는 더미를 한 손으로 끌고 움직이다가 균형을 잃었다. 그가 넘어지는 동안 리본은 가볍게 잘렸다.
로잘린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시험은 허술하지 않았다. 오히려 핵심을 정확히 찔렀다. 상대를 이기는 검과 누군가를 지키는 검은 다르다. 힘만 믿고 앞으로 나가는 순간 호위 대상은 빈 공간에 남는다.
“여자 차례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로잘린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베른이 물었다.
“검은 안 뽑나?”
“필요하면 뽑겠습니다.”
그녀는 더미에서 두 걸음 앞에 섰다. 완전히 등을 보이지 않았다. 몸을 사선으로 틀고 왼발을 반 걸음 뒤로 뺐다. 더미와 세 공격자가 동시에 시야에 걸리는 위치였다.
공격자 셋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시작 신호가 떨어졌다.
오른쪽 공격자가 먼저 달려들었다. 어깨가 과하게 열렸고 발소리가 컸다.
미끼.
진짜는 왼쪽 낮은 자세였다.
로잘린은 오른쪽을 보지 않고 검집 끝을 왼쪽으로 내렸다. 목검이 검집에 걸렸다. 동시에 그녀의 팔꿈치가 오른쪽 공격자의 흉갑 아래를 찍었다.
숨이 막힌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세 번째 공격자가 더미의 리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로잘린은 더미를 밀지 않았다. 호위 대상이 갑자기 움직이면 위험은 커진다. 그녀는 공격자의 발목 앞에 칼집을 세웠다.
달리던 남자의 중심이 무너졌다.
그의 몸이 앞으로 쏠리는 순간 로잘린의 손바닥이 뒷목을 눌렀다.
쾅.
남자가 흙바닥에 납작하게 엎어졌다.
마지막 공격자가 이를 악물고 목검을 휘둘렀다.
그제야 로잘린은 검을 반 치 뽑았다. 칼날이 햇빛을 받아 짧게 번뜩였다. 공격자의 호흡이 한 박자 멈췄다.
충분했다.
로잘린의 발이 그의 무릎 안쪽을 찼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목검을 놓쳤다.
“무장 해제.”
로잘린은 칼을 다시 밀어 넣었다.
“전투 의지 상실 둘. 호위 대상 손상 없음.”
연무장이 조용해졌다.
베른은 더미의 리본을 확인했다. 푸른 천은 접힌 자국 하나 없이 멀쩡했다.
“통과.”
짧은 한마디였다.
조롱하던 지원자들의 표정이 굳었다. 누군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닥에 쓰러진 공격자들을 보았다.
로잘린은 환호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연무장 오른쪽 회랑에 가 있었다. 하인 둘이 은쟁반을 들고 지나가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체스터 공작가 마차가 저녁에 온다더군.”
“영애님께서 안색이 하얗게 질리셨대.”
로잘린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벌써 초대장이 왔다.
원작의 첫 단추는 생각보다 빨랐다. 환담이라는 이름의 압박. 거절하기 어려운 초대. 그리고 돌아오지 못할 마차.
베른이 목검 하나를 던졌다.
“기본 시험은 통과다. 하지만 전담 호위는 연무장 장식이 아니다. 이동 호위도 본다.”
“호위 대상은?”
“같은 더미다. 정원 통로 끝까지 데려가라. 중간 습격은 예고하지 않는다.”
“실제 영애를 쓰지 않는 건 합리적입니다.”
베른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말만 들으면 이미 고용된 기사 같군.”
로잘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미의 어깨에 달린 가죽 끈을 확인했다. 푸른 리본은 바깥쪽으로 훤히 노출되어 있었다. 그녀는 리본의 매듭을 풀지 않고 더미의 위치만 바꿔 천이 몸 안쪽으로 들어가게 했다.
“멋대로 손대지 마라.”
“실전 호위라면 표식부터 숨깁니다.”
베른은 더 말하지 않았다.
정원 통로는 좁았다. 양옆에는 키 큰 장미 울타리가 이어졌고 바닥에는 흰 자갈이 깔려 있었다. 구경하던 지원자들이 뒤쪽에서 따라왔다.
로잘린은 더미를 옆에 두고 걸었다.
앞만 보지 않았다. 자갈 밟는 소리. 울타리 속 잎 흔들림. 뒤쪽 지원자들의 불만 섞인 숨소리. 전부 머릿속에서 위치를 잡았다.
첫 번째 목검은 오른쪽 울타리에서 튀어나왔다.
로잘린은 더미를 밀지 않았다. 검집으로 목검의 손잡이 쪽을 찍었다. 공격자의 손가락 힘이 풀리는 순간 손목을 틀어 바닥으로 내렸다.
“악!”
두 번째는 뒤였다.
지원자 중 하나가 갑자기 앞으로 치고 나왔다. 시험용 움직임치고는 감정이 지나치게 섞여 있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가 목검을 휘둘렀다.
로잘린은 몸을 낮춰 피했다. 이어 팔꿈치를 잡아 회전 방향 그대로 밀었다. 남자는 자신이 휘두른 힘에 끌려 장미 울타리로 처박혔다.
“시험 중 사적 공격.”
로잘린은 차갑게 말했다.
“호위 현장이라면 즉시 퇴장 조치입니다.”
베른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끌어내.”
경비 둘이 달려와 남자를 붙잡았다.
그때 공기가 달라졌다.
왼쪽 울타리 안쪽에서 낮게 파고드는 기척. 목검이라기엔 움직임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날붙이를 숨긴 사람은 팔을 아낀다. 맞부딪쳐도 부러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로잘린은 더미의 어깨끈을 잡아 뒤로 당겼다.
동시에 발끝으로 자갈을 차올렸다.
흰 돌멩이가 울타리 사이로 튀어나온 사내의 눈가를 때렸다. 사내가 움찔하는 순간 낮은 칼날이 햇빛을 받았다.
시험용 목검이 아니었다.
진짜 단검이었다.
로잘린의 검이 뽑혔다.
챙.
금속음이 정원 전체를 갈랐다.
그녀는 상대의 칼날을 부수지 않았다. 아스타의 검식이 드러날 만큼 깊게 베지도 않았다. 칼등으로 손목 위 힘줄을 정확히 눌렀다. 사내의 손에서 단검이 떨어졌다.
이어 무릎으로 허벅지를 찍고 팔을 뒤로 꺾었다.
사내는 자갈 위에 얼굴을 박았다.
베른이 달려왔다.
“저자는 시험 인원이 아니다!”
지원자들이 일제히 물러섰다.
로잘린은 사내의 소매를 뒤집었다. 안쪽에서 검은 밀랍 인장이 굴러나왔다. 매끈한 사자 문양이었다.
체스터 공작가.
“누가 보냈지.”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잘린은 그의 손목을 조금 더 틀었다. 뼈가 어긋나기 직전의 각도에서 멈췄다.
“묻는 방식은 더 거칠게 바꿀 수 있습니다.”
“마차만... 마차만 준비하랬어.”
사내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영애가 밖으로 나오면 확인하라고 했다. 나는 중개인 얼굴도 못 봤어.”
로잘린은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하수인이 아는 정보는 여기까지였다.
베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인장을 주워 들고 낮게 욕을 삼켰다.
“집사님께 알려라. 당장.”
하인이 회랑 쪽으로 뛰어갔다.
로잘린은 사내를 경비에게 넘기고 더미의 리본을 확인했다. 멀쩡했다. 하지만 이제 시험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었다.
체스터는 이미 손을 뻗고 있었다.
정원 끝 회랑에서 노집사가 급히 걸어왔다. 단정한 연미복 차림이었지만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는 베른에게 귓속말을 듣고 로잘린을 보았다.
“지원자 로잘린이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에린 자작가의 집사 마르센입니다. 방금 일은 자작가 내부에서 조사하겠습니다.”
“조사 전에 호위 대상의 위치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마르센의 눈빛이 흔들렸다.
“영애님은 안전한 방에 계십니다.”
“안전하다는 판단은 누가 했습니까.”
“그건...”
그가 말을 흐렸다.
로잘린은 답을 들은 셈이었다. 안전하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위협을 확인한 사람도 없고 통로를 차단한 사람도 없다. 그런 방은 안전한 방이 아니라 예쁘게 꾸민 상자였다.
저택 안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하녀 하나가 봉투를 들고 회랑을 지나왔다. 붉은 밀랍이 찍힌 고급 봉투였다. 마르센의 얼굴이 더 굳었다.
“체스터 공작가에서 다시 사람이 왔습니다.”
하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오늘 저녁 환담에 영애님을 모시겠다고... 거절 답신은 받지 않겠답니다.”
지원자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로잘린은 봉투를 보았다. 초대장이 아니라 출두 명령에 가까웠다. 종이 한 장으로 문을 열게 만들고 마차에 태우고 저택 밖으로 빼내는 방식.
원작의 첫 번째 잠긴 문은 저 봉투 뒤에 있었다.
베른이 이를 악물었다.
“아직 합격 발표 전이다. 외부 일에 지원자를 끌어들일 수는 없어.”
“그럼 발표하십시오.”
로잘린이 말했다.
베른은 그녀를 보았다.
“시험은 끝났습니까.”
그는 더미의 푸른 리본과 묶인 침입자를 차례로 확인했다. 처음 로잘린을 훑어보던 의심은 눈에서 거의 사라져 있었다.
“마지막 절차가 남았다.”
“무엇입니까.”
“주군께서 직접 보는 대면이다.”
그 순간 회랑 안쪽 문이 열렸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먼저 보였다. 뒤이어 창백하지만 단정한 얼굴의 젊은 영애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녹송석 같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로잘린은 숨을 아주 낮게 가라앉혔다.
클라라 폰 에린.
피로 물든 장미의 여주인공.
아직 아무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사람.
클라라는 묶인 침입자와 붉은 봉투를 보고 숨을 삼켰다. 그러고는 로잘린에게 시선을 멈췄다.
“당신이... 시험을 치른 기사님인가요?”
로잘린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스타의 이름은 꺼내지 않았다. 미래를 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예언이 아니라 계약이었다.
“로잘린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또렷하게 말했다.
“영애께서 허락하신다면 지금부터 저 초대장을 위협물로 분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