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인공의 호위기사로 취직했습니다

시놉시스
피폐 로판 《피로 물든 장미》 속 멸문 귀족 로잘린 폰 아스타로 깨어난 전직 특수부대 무술 교관. 그녀는 원작 여주 클라라 폰 에린이 집착과 감금의 비극에 휘말릴 운명을 알고 있다. 도망치면 혼자 살 수 있다. 하지만 로잘린은 칼을 들고 에린 자작가의 전담 호위기사 모집 시험장으로 향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모든 위협을 합법적으로 베어내기 위해.
1화: 피로 물든 장미 속에서
한유진은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기억은 불길과 쇳가루 냄새였다. 무너지는 훈련장 천장이 머리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 둘을 출구 쪽으로 밀어냈고 자신은 뒤늦게 몸을 돌렸다.
뜨거운 통증이 등뼈를 꿰뚫었다.
시야가 꺼졌다.
그런데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갈라진 회벽 위로 낡은 샹들리에가 흔들렸다. 창문에는 바람 빠진 비단 커튼이 걸려 있었고 침대 맡 협탁에는 은제 촛대와 물컵이 놓여 있었다.
유진은 숨부터 죽였다.
훈련받은 몸은 생각보다 빨랐다. 손은 베개 밑으로 들어갔고 손끝에 차가운 단검이 닿았다. 문까지 세 걸음. 창문까지 네 걸음. 발코니 난간은 낮고 아래에는 짚을 실은 마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도주로 확인.
그다음은 몸 상태였다.
손이 달랐다. 희고 길었다. 그러나 손바닥은 부드럽지 않았다. 손가락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혀 있었고 손목 안쪽에는 얇은 흉터가 여럿 겹쳐 있었다. 칼을 오래 잡은 손이었다.
유진은 침대에서 내려섰다.
몸이 가벼웠다. 근육은 잘 단련되어 있었고 균형감각은 과할 만큼 예민했다. 낯선 몸인데도 바닥의 삐걱거림과 창밖 발굽 소리가 동시에 읽혔다.
거울 앞에 선 순간 그녀는 말을 잃었다.
은빛이 도는 애쉬 그레이 머리. 서늘한 흑요석 같은 눈동자. 피로에 창백해진 얼굴은 낯설었지만 시선만큼은 칼끝처럼 날카로웠다.
탁자 위에는 피 묻은 신분패가 놓여 있었다.
로잘린 폰 아스타.
아스타 백작가의 마지막 생존자.
글자를 읽는 순간 머릿속이 찢어졌다. 다른 사람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불타는 저택.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가문의 문장. 도망치라는 하녀의 비명.
그리고 손에 남은 검술.
로잘린은 탁자를 붙잡고 숨을 골랐다. 한유진의 기억과 로잘린의 기억이 서로 밀쳐내듯 부딪쳤다. 하지만 공포에 오래 잡혀 있을 시간은 없었다.
살아 있다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상황 파악부터.”
목소리도 달랐다. 낮고 차분했다. 명령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협탁과 서랍을 차례로 뒤졌다. 낡은 검 한 자루. 은화 여섯 닢. 말라붙은 빵. 구겨진 신문 세 장. 그리고 여관비 독촉장이 나왔다.
독촉장보다 신문이 먼저였다.
크로노스 제국 수도 신문.
유진은 그 이름에서 손을 멈췄다. 너무 익숙했다. 잠을 줄여 가며 읽고 욕했던 소설 속 제국 이름이었다.
그녀는 사교면을 펼쳤다.
가장 위에 박힌 제목이 숨통을 조였다.
에린 자작가의 꽃, 클라라 폰 에린 영애. 체스터 공작가 후계자와 비공식 환담.
클라라 폰 에린.
에드윈 드 체스터.
입술 사이로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피로 물든 장미》.
그 피폐 로판의 제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원작의 클라라는 착했고 순했다. 그래서 더 쉽게 부서졌다. 에드윈은 사랑이라는 말로 그녀를 저택에 가두었다. 황태자 아이젠은 권력으로 거절을 밟았다. 마탑장 베르나르는 구원이라 속삭이며 정신을 붙들었다.
독자들은 집착이라 불렀다.
한유진은 읽는 내내 다른 단어를 떠올렸다.
납치.
감금.
강압.
정신 지배.
“로맨스는 무슨.”
로잘린은 신문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전생에서 그녀는 사람을 보호하는 법을 가르쳤다. 위협을 분류하고 동선을 차단하고 몸을 던져 대상을 빼내는 일을 했다. 소설 속 남자들이 했던 짓은 사랑의 과잉이 아니었다.
그건 신변 보호 실패 사례집에 실릴 범죄였다.
문제는 지금의 그녀가 누구도 보호할 처지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아스타 백작가는 멸문했다. 이 몸은 살아남았지만 신분패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국 수도에서 로잘린 폰 아스타라는 이름은 보호막이 아니라 추적용 표식일 가능성이 컸다.
도망치면 살 수 있다.
로잘린은 그 판단을 부정하지 않았다. 북쪽 관문으로 빠져나가 이름을 버리면 적어도 며칠은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검술이 있다. 전생의 전투 감각도 남아 있다. 어느 용병대에 숨어들어도 굶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신문 속 클라라의 이름이 눈에 밟혔다.
원작의 첫 번째 비극은 아주 조용히 시작됐다. 에드윈이 클라라 주변의 사람을 하나씩 치우고 그녀가 도움을 청할 길을 없애는 것으로.
그다음은 초대장.
그다음은 마차.
그다음은 잠긴 문.
로잘린은 검을 들었다. 검집은 낡았지만 날은 살아 있었다. 손잡이를 쥐는 순간 몸이 먼저 자세를 잡았다.
이 몸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좋아.”
그녀는 검을 허리에 찼다.
“도망은 나중에.”
그때 창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짧고 날카로운 비명. 바로 아래 거리였다.
로잘린은 커튼을 젖혔다. 여관 앞 골목에서 남자 둘이 어린 귀족 영애를 둘러싸고 있었다. 영애는 분홍빛 머리를 하고 있었지만 신문 삽화 속 클라라와는 달랐다. 키도 작고 눈빛도 더 사나웠다.
그런데 남자들은 착각한 모양이었다.
“에린 영애님. 공작가 마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에린 영애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확인은 저택에서 하면 됩니다. 얌전히 오시지요.”
사내의 손이 영애의 팔을 붙잡았다.
로잘린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발코니 난간에 올라섰다. 아래로 지나가던 짚마차가 여관 벽을 스치며 굴러갔다. 높이는 충분히 버틸 만했다.
로잘린은 망설이지 않고 뛰어내렸다.
부츠가 짚더미를 밟았다. 몸이 한 번 낮아졌다가 튀어 올랐다. 그녀는 마차에서 도로로 굴러내리며 첫 번째 사내의 손목을 잡았다.
뚝.
뼈가 빠지는 소리가 났다.
“악!”
“동의 없는 신체 접촉.”
로잘린은 사내의 팔을 등 뒤로 꺾고 무릎으로 허벅지를 눌렀다.
“강제 이동 시도.”
두 번째 사내가 단검을 뽑았다. 로잘린은 검을 뽑지 않았다. 왼발로 돌멩이를 차올려 사내의 손등을 때렸다. 단검이 떨어졌다.
그녀는 그대로 거리를 좁혔다. 손날이 턱 아래를 스쳤고 사내의 눈이 풀렸다.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자 그는 포장도로 위로 보기 좋게 엎어졌다.
“공작가의 명령이다!”
바닥에 눌린 사내가 이를 갈았다.
로잘린은 그의 귓가에 낮게 말했다.
“공작가 명령으로 사람 팔을 잡아끌 수 있다면 제국법은 장식품이겠군.”
주변 상인들이 숨을 삼켰다.
그녀는 영애에게 다가갔다. 영애는 겁먹은 얼굴로 팔을 감싸 쥐고 있었다.
“다친 곳은?”
“없어요. 하지만 저는 정말 에린 영애가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도와주셨어요?”
로잘린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은 이상할 만큼 정직했다. 이 세계에서는 잘못 끌려가는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 설명이 필요한 행동인 모양이었다.
“끌려갈 이유가 없으니까.”
영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때 골목 입구에서 작은 소년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신문 배달 가방을 멘 아이였다. 열두 살쯤 되어 보였고 얼굴에는 호기심과 겁이 반씩 섞여 있었다.
“기사님.”
“나는 아직 기사가 아니다.”
“그럼 곧 되실 분이요.”
소년은 품에서 접힌 공고지를 꺼냈다.
“방금 같은 분이면 여기 가 보세요. 에린 자작가에서 오늘 전담 호위기사를 뽑는대요. 실기 우선이라서 신분보다 칼을 본다고 했어요.”
에린 자작가.
로잘린은 공고지를 받아 들었다.
에린 자작가 전담 호위기사 모집.
지원 자격 제한 없음.
정오 실기 시험.
그녀는 종이 아래쪽에 작게 적힌 문장을 읽었다.
주군의 신체적 안전과 정신적 안위를 최우선으로 보장할 자.
로잘린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합법적으로 클라라 곁에 설 방법이 있었다. 그저 호의를 가진 낯선 사람으로는 공작가의 문턱도 넘을 수 없다. 하지만 전담 호위기사가 되면 다르다.
주군을 위협하는 손을 막을 권리가 생긴다.
칼을 뽑을 명분도 생긴다.
“이름이 뭐지?”
“루엔이요.”
로잘린은 은화 한 닢을 던졌다. 루엔이 허둥지둥 받아 들었다.
“오늘 네가 본 건 길에서 넘어진 불량배 두 명뿐이다.”
“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루엔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로잘린은 여관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남은 은화를 허리띠 안쪽에 숨기고 아스타의 피 묻은 신분패는 코트 안감 깊숙이 밀어 넣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었다.
실력.
그리고 클라라에게 닿을 통로.
수도 중심가로 갈수록 거리의 냄새가 바뀌었다. 습한 여관 골목의 냄새 대신 향수와 말가죽 냄새가 섞였다. 마차 바퀴가 석판 위를 굴렀고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높은 담 너머로 흘러나왔다.
에린 자작가의 저택은 생각보다 작았다.
담장은 낮고 문장은 오래되었다. 화려함보다 단정함이 남아 있는 집이었다. 그래서 더 위험해 보였다. 이런 집은 거대한 공작가나 황실의 압박을 오래 버티기 어렵다.
철문 앞에는 이미 지원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대부분 남자였다. 갑옷은 번쩍였고 검집에는 각자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로잘린이 줄 끝에 서자 몇몇이 노골적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자가 실기 시험?”
“장식용 호위도 뽑나 보지.”
“에린 영애가 겁이 많다더니 시녀 겸 기사를 찾는 건가.”
로잘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말은 위협이 아니다. 손이 닿을 때부터 제압하면 된다.
그녀는 철문 너머를 보았다. 안뜰에는 연무장이 있었고 시험관으로 보이는 중년 기사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부러진 목검이 수북했다.
정오의 종이 울렸다.
문이 열렸다.
중년 기사가 지원자들을 훑어보다가 로잘린 앞에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여자는 뒤로 빼라. 오늘은 실전 호위 시험이다.”
웃음소리가 번졌다.
로잘린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검집 끝이 석판을 가볍게 두드렸다.
“마침 잘됐군요.”
시험관의 눈이 가늘어졌다.
로잘린은 차분히 말했다.
“실전이라면 자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