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조사 피하려다 국민 헌터의 계약 연인이 되었다

6화. 보스방의 진짜 손님
카일은 계약서 첫 장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은빛 머리칼 아래의 청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손끝은 깃펜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카일 폰 델마르 전속 후원 및 에셀 던전 독점 이용 예비 계약서
자신의 이름이 활자로 박힌 문서는 낯설지 않았다.
교단의 헌납 서약서도, 길드의 전속 계약서도, 황실이 보낸 훈장 수여서도 결국은 같은 이름을 요구했다.
카일 폰 델마르.
사람들은 그 이름을 부르면 구원이 온다고 믿었다. 카일에게 그 이름은 언제나 대가 청구서였다.
"공개 후원 발표."
그가 조항 하나를 짚었다.
"이 문구는 지워."
에블린은 맞은편에서 차를 한 모금 마시려다 멈췄다.
"지우면 곤란한데요. 후원금이 실제로 들어왔다는 흔적이 있어야 재무부가 제 장부를 물지 못하거든요."
"내 이름이 붙는 순간 재무부만 오는 게 아니다."
"교단도 오겠죠."
에블린의 대답은 지나치게 빨랐다.
카일의 시선이 그녀에게 박혔다.
"아는 척하지 마라."
"아는 척한 게 아니라 계산한 거예요. 제국 최고의 헌터가 변방 던전 하나를 후원하면 기자와 사제와 귀족이 한꺼번에 몰려들겠죠.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에블린은 계약서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깃펜으로 공개 후원 발표라는 문장 위에 가느다란 줄을 그었다.
"좋아요. 당장 공개하지는 않죠. 대신 완전히 없는 계약도 안 돼요. 재무부에는 비공개 후원 약정서를 내고 외부에는 카일 님이 던전 안전 자문을 한다는 정도로만 흘릴게요."
"그것도 내 동의 없이는 안 된다."
"당연하죠. 저는 고객님 동의 없이 얼굴을 팔아먹는 악덕 업자가 아닙니다."
카일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팔아먹을 생각은 있군."
"동의가 있을 때만요. 가격도 최고로 쳐 드리고요."
에블린은 새 종이를 꺼내 조항을 다시 적었다.
제1조. 후원인의 신분 및 초상은 본인의 사전 서면 동의 없이 공개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됐습니까?"
"사진도 금지다. 초상화도. 마력 기록석도."
"까다로운 고객님이시네요."
"살아남으려면 까다로워야 한다."
그 한마디 뒤에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에블린은 농담으로 넘기려다 멈췄다. 카일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그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살아남는 일이 그에게 조건표의 한 줄처럼 일상이 되어 버렸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항도 넣을게요. 대신 저도 하나 받겠습니다."
"말해."
"카일 님이 이 던전을 이용하는 동안에는 제 직원과 손님을 위협하지 않는 것. 검을 뽑아도 시설물을 부수지 않는 것. 그리고 아프면 혼자 사라지지 않는 것."
카일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은 계약 조항이 아니다."
"제 던전에서는 안전 수칙이에요."
"내 상태는 내가 알아서 한다."
"아까처럼요?"
에블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가볍지 않았다.
카일의 손등 위로 희미한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는 대답 대신 시선을 내렸다.
탁자 위의 찻잔이 가볍게 떨렸다.
카일의 어깨가 굳었다. 가슴 안쪽에서 둔탁한 박동이 한 번 울리더니 로브 아래 목덜미를 타고 붉은 빛이 번졌다.
"카일 님?"
"괜찮다."
짧은 대답과 달리 그의 손이 탁자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나무가 삐걱이며 갈라질 듯 울었다.
에블린은 허공에 떠오른 경고창을 보았다.
[고위험 마력 불균형 감지.][정화 미풍 단독 운용 효율 저하.][핵심 정화석 연결을 권장합니다.]
그녀는 카일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무엇이 저 몸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교단이 그에게 무엇을 했는지.
하지만 지금 질문은 칼날보다 쓸모없었다.
"한스."
에블린이 허공을 향해 불렀다.
"예, 영주님."
벽에 박힌 수정구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귀빈 응대실 외부 통제를 한 단계 올려 주세요. 누구도 이 통로에 못 들어오게 하고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응대실을 정화석 앞으로 옮길게요. 놀라지 마세요."
카일이 고개를 들었다.
"내 허락 없이 움직이지 마라."
"그럼 허락해 주세요. 지금은 계약서보다 손님이 먼저 무너질 것 같거든요."
카일은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쏟아진 통증이 그의 말을 끊었다.
숨이 거칠게 새었다. 몸을 일으키려던 카일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검은 로브 자락이 붉은 융단 위로 무너졌다.
에블린은 망설이지 않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
"보지 마."
카일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손님이 쓰러졌는데 영주가 보고만 있으면 후기 점수가 떨어져요."
"농담할 때가 아니다."
"그러니까 농담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저도 무섭거든요."
그녀가 손끝을 들어 허공을 그었다.
귀빈 응대실의 벽이 낮은 진동과 함께 갈라졌다. 하얀 패널이 접히고 붉은 융단이 바닥 아래로 말려 들어갔다. 대신 검은 보스방의 돌벽과 거대한 푸른 정화석이 드러났다.
정화석은 심장처럼 천천히 빛났다.
차고 맑은 마나가 방 안을 가득 채우자 카일의 이를 악문 얼굴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붉은 빛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정화석 가까이에서는 더 나아질 거예요."
"왜 내게 이 정도까지 하지."
에블린은 잠시 답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간단했다. 카일의 이름을 빌려 장부를 살리고 그에게 필요한 공간을 팔면 되는 거래였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이름값만큼 단단한 방패가 아니었다. 너무 오래 금이 간 채 버텨 온 사람이었다.
"아직 계약 전이라 선심 쓰는 겁니다."
에블린이 애써 웃었다.
"계약 후에 쓰러지시면 후원인 관리가 부실했다는 소문이 나잖아요."
카일은 헛웃음조차 짓지 못했다.
"거짓말이 서툴군."
"장부 조작은 잘하는데요."
에블린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을 주세요."
카일의 청안이 싸늘해졌다.
"안 된다."
"정화석의 흐름을 한쪽으로 모으려면 기준점이 필요해요. 카일 님 손목에 마나 실을 걸면 됩니다. 아프게 하지는 않을게요."
"내 몸에 마력을 넣겠다는 말인가."
"넣는 게 아니라 흩어진 걸 가라앉히는 거예요. 저는 병명을 몰라요. 다만 지금 카일 님 안의 마력이 제 던전 마나를 밀어내고 있다는 건 보입니다."
카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확한 진단을 흉내 내지 않는 태도였다.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필요한 것만 하겠다는 태도.
교단의 사제들은 언제나 그의 몸을 잘 안다고 말했다. 그래서 약을 들이밀었고 그의 의사를 묻지 않았다.
카일은 천천히 왼손을 내밀었다.
에블린의 손가락이 그의 손목을 감쌌다.
차가운 손이었다. 하지만 닿는 순간 정화석에서 가느다란 금빛 실이 흘러나와 두 사람의 손목을 느슨하게 감쌌다.
"이상하면 바로 말하세요."
"명령하는 건가."
"고객 안전 안내입니다."
에블린이 눈을 감았다.
던전 마스터의 권능이 정화석 깊은 곳까지 이어졌다. 맑은 마나가 카일의 손목에서 어깨를 지나 가슴 쪽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붉게 타오르던 기운은 처음에는 거세게 저항했다.
카일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에블린은 아픔에 숨을 들이켰지만 놓지 않았다.
"힘 주셔도 돼요. 대신 검은 안 뽑으세요."
"네가 먼저 놓지 마."
뜻밖의 말이었다.
카일은 눈을 감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고통이 지나갔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에블린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에블린은 웃지 않았다.
"안 놓아요."
그녀가 낮게 대답했다.
정화석의 빛이 한 번 크게 맥박쳤다.
붉은 열기가 카일의 목덜미에서 천천히 물러났다. 거칠던 숨도 조금씩 길어졌다. 방 안에는 정화석이 울리는 낮은 소리와 두 사람의 호흡만 남았다.
한참 뒤 카일이 눈을 떴다.
"이건… 교단의 정화와 다르군."
에블린은 손목을 놓지 않은 채 그를 보았다.
"제가 교단 방식은 몰라서요. 다만 여기서는 손님을 고치겠다고 더 아프게 만들지는 않아요."
카일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오래 머물렀다.
그 순간 방 한쪽의 수정등이 붉게 점멸했다.
[외부 탐색 마법 감지.][대상: 던전 입구 부근.][정화 계열 고유 마나 잔향을 추적 중입니다.]
에블린의 표정이 굳었다.
카일은 시스템 창을 보자마자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내가 나가겠다."
"안 돼요."
"내 일이다."
"제 던전 입구에서 벌어진 순간부터 제 일이기도 해요."
에블린은 그를 붙잡은 손을 더 단단히 쥐었다.
"지금 나가면 저쪽은 카일 님을 찾는 게 맞다고 확신할 거예요."
"내 흔적을 지우면 된다."
"이름을 숨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에블린의 녹색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재무부를 피할 장부와 낯선 추적자의 시선을 비틀 방법이 머릿속에서 동시에 돌아갔다.
후원인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약했다. 그가 이 영지에 머무를 이유가 자연스러워야 했다. 사람들이 알고도 의심하지 않을 관계가 필요했다.
그녀는 아직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정화석 옆에 떨어진 계약서의 다음 장을 집어 들었다.
"카일 님."
"말해."
"오늘 밤만은 제 던전 규칙을 따라주세요. 내일 아침까지는 제가 손님을 안전하게 숨길 방법을 만들겠습니다."
카일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밖에서는 누군가 자신의 마나 흔적을 더듬고 있었다. 안에서는 낯선 영주가 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방법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방법이 뭔데."
에블린은 빈 계약서 위로 깃펜을 들어 올렸다.
"조금 뻔뻔한 방법이요."
그녀의 미소가 아주 천천히 돌아왔다.
"그래서 카일 님 허락이 필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