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조사 피하려다 국민 헌터의 계약 연인이 되었다

5화. 대어를 위한 손님맞이
카일이 슬라임 카페 뒤편의 어두운 통로로 들어서자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달콤한 민트 향과 귀족 영애들의 웃음소리가 등 뒤로 멀어졌다. 대신 차갑고 깊은 마력이 통로의 벽을 타고 흘렀다. 보통 던전이라면 여기서부터 축축한 흙냄새와 마수의 비린내가 섞여야 했다.
하지만 에셀 던전은 끝까지 그의 상식을 배반했다.
검은 돌벽에 박혀 있던 마법등이 하나둘씩 켜졌다. 불빛은 횃불처럼 거칠게 타오르지 않았다. 고급 응접실의 샹들리에처럼 부드러운 황금빛을 뿌렸다.
바닥의 낡은 석판은 소리 없이 뒤집혔다. 그 아래에서 붉은 융단이 스르르 펼쳐졌다. 융단 끝에는 귀여운 슬라임 문양이 수놓여 있었다.
카일은 걸음을 멈췄다.
"던전 심층부에 융단이라."
로브 안에서 낮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허공에 반투명한 문구가 떠올랐다.
[비인가 심층부 진입자 감지.][대상 등급: 측정 불가.][귀빈 응대 모드로 전환합니다.]
"귀빈?"
카일의 손끝이 검의 손잡이를 찾았다.
던전이 침입자를 감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던전은 침입자에게 독가스나 함정 화살을 보냈다. 이렇게 정중하게 응대 모드를 켜는 던전은 제국의 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가 뒤돌아 나가려 하자 통로가 조용히 닫혔다.
문이 있던 자리에는 앙증맞은 안내판이 떠올랐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영주님이 직접 안내해 드립니다.
카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건 우연히 작동한 장치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를 잡아 둘 생각으로 길을 바꿨다.
던전 깊숙한 곳에서 흘러오는 마나 미풍은 여전히 순수했다. 카일의 가슴팍을 태우던 성흔은 그 맑은 흐름에 눌려 조용했다. 그래서 더 불쾌했다.
그는 지금 함정 안에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에셀 영주."
카일이 어둠을 향해 낮게 불렀다.
"보고 있다면 나와라."
대답 대신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렸다.
"손님께서 계산도 끝내지 않고 심층부까지 들어오시면 저희가 아주 곤란하답니다."
에블린 에셀이 통로 끝에서 나타났다.
방금 전 카페에서 보았던 상냥한 영업 미소는 그대로였다. 다만 손에는 은쟁반이 아니라 두툼한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온 중년 집사 한스는 작은 이동식 탁자와 찻주전자를 밀고 있었다.
카일은 그 광경이 너무 황당해서 잠시 말을 잃었다.
보스방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찻주전자와 계약 서류라니.
한스는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융단 중앙에 탁자를 놓았다. 그 위에 흰 테이블보를 펼치고 잉크병과 깃펜까지 올렸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한 손놀림이었다.
"한스, 여기부터는 제가 할게요."
"예, 영주님. 귀빈 응대실 외부 통제는 완료했습니다."
"좋아요. 혹시 슬라임 카페 쪽 손님들이 놀라지 않게 음악 소리 조금만 키워 주세요."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한스가 깊이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카일은 로브의 어둠 속에서 에블린을 노려보았다.
"귀빈 응대실이라 했나."
"원래는 보스방 대기실이었어요. 그런데 요즘 고객님들은 살벌한 뼈 장식보다 편안한 의자와 따뜻한 차를 더 좋아하시더라고요."
"나는 고객이 아니다."
"심층부 무단 진입자이긴 하죠. 그래도 저희 던전은 서비스 정신을 중시합니다."
에블린은 태연하게 웃었다.
"무단 침입료를 청구하기 전에도 차 한 잔 정도는 드려야 품격이 살잖아요."
카일의 손끝에서 희미한 빛이 번졌다. 그것은 검이 뽑히기 전의 살기였다. 일반인이라면 그 기척만으로도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에블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허공을 톡 두드렸다. 그러자 통로 천장에 박힌 마법등이 조금 더 밝아졌다. 주변의 마나 미풍이 카일의 검기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빛의 살기는 날카롭게 뻗지 못하고 흐릿하게 흩어졌다.
카일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내 마력을 건드렸군."
"건드린 게 아니라 던전 내부 안전 규정에 따라 완충했어요. 저희 시설 안에서 고객님들이 서로 베거나 찌르면 보험 처리가 복잡하거든요."
"농담할 상황이 아닐 텐데."
"저도 진지해요. 보험료가 얼마나 비싼데요."
에블린은 서류철을 가슴에 안은 채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카일 폰 델마르 님."
통로의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었다.
카일의 손이 검집 위에서 멈췄다. 로브 속에서 숨이 아주 가늘게 가라앉았다.
"그 이름을 누구에게 들었지."
"아무에게도요."
에블린은 손가락 사이에 에셀 코인 하나를 끼워 보였다.
카일이 카페 테이블에 남기고 간 세 개의 주화 중 하나였다. 분홍빛을 띠던 코인의 표면에는 희미한 금빛이 실처럼 감겨 있었다.
"손님께서 두고 가신 코인에 마나 잔여물이 남았어요. 제 던전 시스템은 이런 흔적을 꽤 정확하게 읽거든요."
[대상 식별: 제국 1위 S급 헌터 '카일 폰 델마르'의 고유 마나 패턴과 99.8% 일치.]
에블린의 손등 위에 작게 떠오른 시스템 창이 카일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카일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남은 0.2%에 기대 보는 편이 나을 텐데."
"저는 사업할 때 70%만 넘어도 움직여요. 99.8%면 이미 축포를 터뜨릴 숫자죠."
에블린의 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물론 손님의 신분은 철저히 비밀로 보호해 드립니다. 에셀 던전은 고객 개인정보 보호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그 말을 믿으라고?"
"믿으셔야 할 이유가 있죠."
에블린은 코인을 탁자 위에 올렸다.
"손님께서 저희 던전을 필요로 하니까요."
카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에블린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허공의 시스템 창을 손끝으로 가볍게 밀자, 통로를 감싸던 마나 미풍이 미세하게 약해졌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러나 카일의 몸은 즉시 반응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억눌려 있던 성흔이 뜨겁게 꿈틀거렸다. 붉은 열기가 로브 아래의 피부를 태우듯 치솟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에블린의 표정에서 장사꾼 같은 웃음이 조금 옅어졌다.
그녀는 그를 자세히 보았다.
단순한 피로나 마력 소모가 아니었다. 저 남자는 지금 무언가에 갉아먹히고 있었다. 던전 시스템은 그것을 "마력 폭주 억제 상태"와 "정화 반응"이라고 표시했다. 하지만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고통은 숫자보다 훨씬 노골적이었다.
에블린은 곧바로 마나 미풍을 원래 밀도로 되돌렸다.
청량한 마력이 다시 카일의 주변을 감쌌다. 성흔의 열기가 빠르게 식었다. 그의 어깨가 아주 작게 내려앉았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카일의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노보다 더 깊은 경계가 깔려 있었다.
"서비스 시연입니다."
"협박이겠지."
"협박은 보통 빼앗는 쪽이 하는 말이고요. 저는 드릴 수 있는 걸 보여드린 쪽에 가깝습니다."
에블린은 의자 하나를 손으로 밀어냈다.
"앉으세요. 서서 버티는 건 멋있지만 효율이 나쁩니다."
카일은 움직이지 않았다.
에블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요. 그럼 제가 먼저 앉죠."
그녀가 태연하게 의자에 앉자, 카일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 상황에서 먼저 앉는다는 것은 상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도망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에블린 에셀은 약하지 않았다.
검을 들지 않았고 마력을 뿜어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던전 안에서 누구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 있었다. 카일은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천천히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로브의 후드는 여전히 깊게 눌러쓴 채였다.
에블린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이제 이야기가 되겠네요."
"짧게 해라."
"저도 짧은 계약서를 좋아합니다. 다만 제국 세법은 짧게 끝나 주는 법이 없어서 문제죠."
에블린은 서류철을 열었다.
그 안에는 이미 여러 장의 계약서 양식이 정리되어 있었다. 종이 가장자리에는 에셀 영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일부 항목에는 빈칸이 남아 있었다.
카일은 그 빈칸들이 자신을 위해 남겨진 자리임을 알아보았다.
"준비가 빠르군."
"대어를 낚으려면 그물은 미리 손질해 둬야 하니까요."
"나를 물고기 취급하나."
"방금 표현이 마음에 안 드셨다면 귀빈으로 정정할게요."
"더 나빠졌군."
에블린은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비웃음이 아니라 순수한 흥미에 가까웠다. 카일은 이상하게도 그 웃음이 거슬리지만은 않았다.
교단 사람들은 그의 고통을 신성한 의무라고 불렀다. 팬들은 그의 창백한 얼굴조차 성스러운 미모라며 숭배했다. 누구도 그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숫자와 비용과 계약 조건으로 냉정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눈앞의 영주는 달랐다.
그녀는 그를 신성한 성물로 보지 않았다. 돈이 많이 들고 위험하지만 활용 가치가 큰 거래 상대로 보았다.
그 천박할 만큼 현실적인 시선이 오히려 숨통을 트이게 했다.
"원하는 게 뭐지."
카일이 물었다.
에블린은 기다렸다는 듯 첫 장을 꺼냈다.
"제국법상 헌터 개인에게 지급되는 공식 후원금은 면세 대상입니다. 특히 S급 헌터의 장비 유지비와 안전 회복비는 공익적 비용으로 분류되죠."
"세금 이야기를 하려고 나를 붙잡았나."
"정확히는 세무조사를 피할 합법적인 우산 이야기를 하려고 붙잡았습니다."
에블린은 깃펜으로 서류의 한 조항을 톡 짚었다.
"저는 곧 재무부의 조사를 받게 됩니다. 제 장부는 아주 성실하고 정직해 보입니다. 하지만 제 수익은 그보다 훨씬 더 부지런하거든요."
"스스로 불리한 말을 잘도 하는군."
"어차피 카일 님 정도 되는 분이면 제가 평범한 변방 영주가 아니라는 건 이미 눈치채셨을 테니까요."
카일은 부정하지 않았다.
에블린은 말을 이었다.
"당신은 교단과 제국의 눈을 피해 쉴 곳이 필요합니다. 저는 재무부와 교단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이름이 필요하고요. 그러니 서로 필요한 걸 거래하자는 겁니다."
"나를 방패로 쓰겠다는 말이군."
"네."
카일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에블린은 뻔뻔하게 덧붙였다.
"대신 저는 당신에게 이 던전의 심층부 이용권, 정화 마나 공급, 신분 은폐용 객실, 그리고 교단 추적 회피용 동선을 제공합니다."
카일의 시선이 그녀에게 박혔다.
"교단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군."
"제 던전 밖에서 그 이름을 입에 올릴 만큼 멍청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카일 님이 이곳까지 혼자 오셨다는 건, 수도의 성당 침대보다 제 슬라임 카페 구석자리 1인용 소파가 더 절실했다는 뜻이겠죠."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블린은 그 침묵을 허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한 장의 서류를 천천히 그의 앞으로 밀었다.
카일 폰 델마르 전속 후원 및 에셀 던전 독점 이용 예비 계약서
카일의 시선이 서류 맨 위에서 멈췄다.
그의 이름이 이미 적혀 있었다.
놀랍게도 글씨는 반듯하고 예뻤다. 사람을 덫에 넣는 계약서치고는 지나치게 정성스러웠다.
"내가 서명하지 않으면?"
"그럼 오늘 있었던 일은 저희 던전의 고객 민원 기록에만 남습니다. 검은 로브의 무명 손님께서 심층부 길을 잃었다고요."
"그리고?"
"다음에 또 오시면 입장료가 오릅니다."
카일은 그녀를 보았다.
에블린은 진심이었다.
협박보다 더 어이없었다. 거래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호의보다 훨씬 믿을 만한 대답이었다.
"에블린 에셀."
카일이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낮은 목소리가 융단 위로 내려앉자 에블린의 심장이 아주 잠깐 박자를 놓쳤다. 제국 최고의 헌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생각보다 더 위험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네, 카일 폰 델마르 님."
"당신은 정말 위험한 여자군."
"감사합니다. 저희 업계에서는 칭찬이에요."
에블린은 깃펜을 그의 쪽으로 밀었다.
"자, 이제 첫 번째 조건부터 읽어 보시죠. 마음에 안 드시면 고치면 됩니다. 저는 합리적인 협상을 좋아하거든요."
카일은 깃펜을 집지 않았다.
대신 로브의 후드를 천천히 뒤로 젖혔다.
은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서늘한 청안이 마침내 에블린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제국민들이 신전 벽화처럼 떠받드는 아름다운 얼굴은 지독한 피로와 억눌린 고통으로 창백했다.
에블린의 미소가 처음으로 아주 희미하게 흔들렸다.
카일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협상은 내 얼굴을 보고 하지."
그가 낮게 말했다.
"당신이 이 얼굴을 어디까지 팔아먹을 생각인지 들어보고 싶어졌거든."
에블린은 잠시 숨을 삼켰다.
그리고 곧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환하고 조금 더 위험하게.
"좋아요."
그녀가 계약서의 첫 장을 펼쳤다.
"그럼 아주 비싸게 책정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