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조사 피하려다 국민 헌터의 계약 연인이 되었다

4화. 검은 로브를 쓴 귀빈
제국 수도에서 북부 변방 에셀 영지까지 향하는 마차 안에서 카일은 단 한 순간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흔들리는 마차의 덜컹거림은 그에게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 카일을 집요하게 괴롭힌 것은 심장 부근에서 시작해 온몸의 혈관을 타고 뻗어나가는 성흔의 박동이었다. 빛 속성의 S급 마력은 정화되지 못한 채 회로 속에서 거칠게 요동쳤고, 그때마다 가슴팍의 핏빛 문양이 붉게 타오르며 뼈를 깎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선사했다.
"하으윽..."
카일은 이빨을 악물며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교단이 준 '성물 정화액'을 쓰지 않은 지 벌써 사흘째였다. 성흔의 오염은 한계에 달해 눈앞이 붉은 핏빛으로 아른거렸고, 손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 만큼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영혼을 서서히 좀먹어 들어가는 교단의 독약을 다시 마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과 은발을 완전히 가리는 검은 마도 로브의 자락을 더 깊게 눌러썼다.
마침내 마차가 멈추어 서고, 에셀 영지의 던전 입구에 당도했다는 마부의 외침이 들렸다.
카일은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마주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멈추었다.
"이게... 정말 변방의 던전이라고?"
그가 평생 보아왔고 겪어왔던 던전은 음침하고 축축하며, 마수의 썩은 피 냄새와 곰팡이내가 진동하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전장이었다. 제국의 모든 헌터에게 던전이란 목숨을 걸고 기어 들어가야 하는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에셀 던전의 입구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화려하게 꾸며진 석조 아치 위에는 몽글몽글하고 앙증맞은 슬라임 모양의 조형물이 귀엽게 얹혀 있었고, 형형색색의 마법 불빛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던전 입구 앞 광장에는 제국 수도에서도 보기 힘든 귀족 가문의 고급 마차들이 즐비했고, 화려한 실크 드레스를 입은 귀족 영애들과 비단 옷을 입은 상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어머, 영애님! 에셀 코인 주화가 너무 귀여워서 전 환불 안 하고 그냥 가방에 달아두려고요."
"나도 하나 더 바꿨어! 던전 안에서 파는 딸기 슬라임 쉐이크가 그렇게 달콤하고 맛있다며?"
"슬라임 촉감 체험방도 예약이 꽉 찼대! 어서 들어가서 줄 서야 해!"
카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던전에서 쉐이크를 팔고, 귀족 영애들이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웃고 떠들며 슬라임을 만지기 위해 줄을 선다고?
이 황당하고 기묘한 이질감 속에서도, 카일의 초감각은 다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던전 입구 너머에서부터 실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미세한 마나의 파동.
그것은 수도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짙었다. 제국의 그 어떤 대성당이나 교단의 성소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오염도가 완벽하게 '0%'에 수렴하는 극도로 순수하고 청량한 마력의 흐름이었다.
성흔이 그 청량한 미풍에 반응하듯 일시적으로 요동을 멈추고 통증을 경감시켜 주자, 카일은 홀린 듯 발걸음을 대기열로 옮겼다.
"다음 손님, 이쪽 환전 카운터로 안내해 드릴게요!"
입구 환전소에서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일이 차례가 되어 다가가자, 깔끔하고 세련된 제복을 입은 에셀 영지의 직원이 상냥한 비즈니스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환영합니다, 에셀 던전입니다! 저희 던전은 내부 안전과 원활한 이용을 위해 오직 '에셀 코인'으로만 결제가 가능하십니다. 입장권은 1코인이며, 골드와 코인은 일 대 일로 수수료 없이 환전해 드리고 있어요. 몇 코인으로 바꿔 드릴까요?"
카일은 로브 소매 사이로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손을 뻗어 금화 세 개를 내밀었다.
"세 개만."
"네, 제국 골드 3골드 확인했습니다! 에셀 코인 3개와 입장 티켓 여기 준비해 드릴게요. 오늘 하루 에셀 던전에서 최고의 힐링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직원이 건넨 주화는 분홍색 마력이 은은하게 서려 있어 따뜻한 온기가 돌았고, 중앙에는 귀여운 슬라임이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카일은 그 가볍고 장난감 같은 동전들을 손에 꼭 쥐고 던전 게이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던전 게이트를 통과한 카일은 다시 한번 내면의 상식이 완전히 뒤흔들리는 충격을 받았다.
어둡고 눅눅한 동굴 대신, 따뜻한 주황빛의 마법 전등이 벽면을 부드럽고 아늑하게 밝히고 있었다. 바닥은 흙먼지 하나 없이 매끄럽게 닦인 대리석으로 덮여 있었고, 공기 중에는 던전 특유의 피비린내 대신 은은한 민트 향과 싱그러운 풀 내음이 가득 감돌았다.
그곳은 던전 1구역, '슬라임 카페'였다.
사방에 배치된 푹신한 벨벳 소파와 원목 테이블에는 제국 사교계의 귀부인들과 젊은 영애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테이블 위에는 투명하고 말랑말랑한 슬라임들이 몽글몽글 움직이며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
"꺄악! 얘 좀 봐, 내 손가락을 꼭 쥐었어! 너무 말랑말랑해!"
"어머, 정말이네. 차를 마시는 동안 슬라임이 옆에서 졸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절로 치유되는 것 같아."
살상력을 지닌 몬스터인 슬라임이 인간에게 애교를 부리고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모습은 카일의 상식선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카일에게는 그 신기한 풍경보다 몸의 변화가 훨씬 더 시급하고 극적이었다.
"하아..."
던전 심층부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맑고 깨끗한 '마나 미풍'.
그 순수한 마나가 그의 호흡을 통해 몸속 깊숙이 흘러들어오자, 미쳐 날뛰던 체내의 빛 속성 마력이 거짓말처럼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슴을 불타오르게 만들었던 성흔의 열감이 빠르게 식어갔고, 찢어질 것 같던 마력 회로가 시원한 샘물을 들이켠 것처럼 진정되었다.
교단이 제공하는 그 어떤 성물과 약물로도 느끼지 못했던 온전한 구원과 안정이 전신을 지배했다.
카일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며 카페 구석진 자리의 1인용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조용히 깊은 숨을 들이쉬자, 오랜 고통 속에서 처음으로 맛보는 평온함에 나른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고객님?"
단정한 옷차림의 점원이 다가와 물었다. 카일은 신분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며, 주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시키는 대중적인 메뉴를 무심히 가리켰다.
"슬라임 촉감 체험 패키지랑... 따뜻한 민트 차 한 잔."
잠시 후, 점원이 둥근 유리그릇에 담긴 연두색 슬라임 한 마리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고 왔다.
"민트 슬라임 '멜로'입니다. 스트레스 해소와 마력 안정에 아주 효과적이니 편하게 만져보세요. 뜨거운 민트 차와 함께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유리그릇 속의 슬라임은 카일을 빤히 올려다보며 몸을 찌푸렸다 폈다 하더니, 이내 그릇 밖으로 스르륵 기어 나와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제국 최강의 S급 헌터인 카일은 검 한 자루로 거대한 마수들을 도륙하던 단단한 손으로 이 작고 말랑말랑한 생명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순간 당황했다. 그는 침을 한번 삼키고 조심스럽게 검지손가락을 뻗어 슬라임의 머리 부분을 살짝 건드렸다.
말랑.
차가우면서도 젤리 같은 쫀득한 감촉이 손가락 끝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졌다. 멜로라고 불린 슬라임은 기분이 좋은지 카일의 손가락을 몽글몽글 감싸 안으며 미세한 마력 진동을 일으켰다.
그 순간, 카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슬라임의 몸을 통해 아주 미약하지만, 극도로 순수한 치유의 마력이 체내로 직접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가슴팍의 붉은 성흔 무늬가 더욱 빠른 속도로 옅어지며 안정을 찾아갔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카일은 멍하니 자신의 손가락을 꼭 감싸 쥔 연두색 슬라임을 바라보았다. 이 던전은 단순히 귀족들의 유흥 거리가 아니었다. 이곳은 마력 오염과 폭주로 서서히 영혼이 파멸해 가는 헌터들에게는 그 어떤 신전보다도 가치 있는 진정한 성역이었다.
그리고 이 믿기 힘든 공간을 설계하고 교묘하게 감춘 주인의 얼굴이 카일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에블린 에셀. 가난한 영지를 살리겠다며 던전을 개조해 대박을 터뜨린 기묘한 영주.
그녀는 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런 기적 같은 공간을 창조해 낸 것일까.
같은 시각, 슬라임 카페 내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층의 보안 및 모니터실.
에블린은 공중에 띄워 둔 반투명한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경고: 던전 1구역 내 비정상적인 초고농축 마력 파동 감지.][대상 등급: 측정 불가 (마력 억제 상태)][특이 사항: 극도로 압축된 빛 속성의 신성 마력 보유.]
"측정 불가라고...?"
에블린의 녹색 눈동자가 빠르게 깜박였다.
그녀의 던전 마스터 권능은 던전에 입장한 모든 생명체의 레벨과 마력을 수치화하여 분석해 준다. 제국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받는 헌터들조차 대략적인 수치로 표기되기 마련인데, '측정 불가'라는 메시지가 뜬 것은 던전을 리모델링한 이후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S급 헌터는 몇 명 되지 않는데. 그중에서도 빛 속성이라니."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단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제국 최고의 인기 스타이자, 교단의 살아있는 성물로 숭배받는 S급 헌터, 카일 폰 델마르.
하지만 그 대단하신 국민 헌터가 수도에서 수백 리 떨어진 이 촌구석 영지의 던전에, 그것도 얼굴을 가린 수상쩍은 로브 차림으로 홀로 나타날 리가 없었다. 교단과 제국 정부의 삼엄한 감시가 밤낮으로 그의 뒤를 따르고 있을 텐데 말이다.
"교단에서 보낸 고위급 스파이인가? 아니면... 진짜 본인인가?"
에블린은 테이블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재무부나 교단에서 보낸 고도의 세무 스파이라면 영지의 비밀 수익과 탈세 장부를 지키기 위해 즉시 쫓아내거나 경계해야 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카일 본인이라면?
자신이 영지의 마나를 통째로 쏟아부어 만든 '마나 정화의 성소'와 '마나 미풍'이라는 고급 덫을 물고 제 발로 찾아온 진짜 월척이라면?
"이건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야."
에블린의 입가에 뻔뻔하고도 장사꾼 같은 미소가 걸렸다. 위험을 피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그 위험을 내 돈줄이자 방패막이로 삼아버리는 것이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서빙용 은쟁반을 집어 들었다. 그 위에는 에셀 던전의 시그니처 디저트인, 투명하고 맑은 슬라임 모양의 달콤한 청포도 푸딩 젤리가 예쁘게 놓여 있었다.
"손님맞이는 영주가 직접 해야 제맛이지."
에블린은 옷매무새를 가볍게 정돈하고, 발걸음을 2층 계단 아래로 옮겼다.
카일은 민트 슬라임 '멜로'의 젤리 같은 감촉과 따뜻한 차가 주는 여유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성흔의 지독한 고통이 마침내 가라앉자 찾아온 평온함 속에서, 그는 평생 동안 유지해 왔던 숨 막히는 긴장감을 아주 잠시 내려놓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 몇 가닥이 로브의 틈새로 흘러내려 그의 창백한 뺨을 부드럽게 덮었다.
탁.
테이블 위에 가벼운 그릇 소리가 울렸다. 카일은 반사적으로 몸을 굳히며 멜로를 감싸고 있던 손가락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귀한 손님. 에셀 던전에 처음 방문해 주신, 아주 독특하고 고귀한 분위기의 고객님께 드리는 특별 서비스입니다."
붉은 기가 도는 탐스러운 머리카락에 영리함과 눈치가 가득 담긴 녹색 눈동자.
에블린 에셀 영주가 활짝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일은 로브의 짙은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제국 신문에서나 보았던 가난한 변방 영주가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생각보다 더 가냘픈 체구였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그 어떤 대귀족 앞에서도 기죽지 않을 단단한 실리와 자신감이 차고 넘쳤다.
"난 이런 것을 주문한 적이 없다."
카일이 목소리를 낮추어 차갑게 말했다. 마도 로브의 마력 변조 기능 덕분에 낮고 잠긴 기계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블린은 그의 서늘한 적대감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고, 은쟁반을 옆구리에 낀 채 뻔뻔할 정도로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진짜 명품 서비스라는 건 고객님이 원하기 전에 먼저 찾아가는 법이랍니다. 저희 던전의 자랑인 '슬라임 푸딩'이에요. 드셔보시면 던전의 마나 맛이 한층 더 향긋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에블린은 슬그머니 맞은편 의자의 등받이를 잡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로브를 아주 깊게 쓰셨네요. 이 맑고 화창한 날씨에 답답하진 않으신가요? 혹시 저희 던전의 공기가 마음에 안 드신다거나..."
"아니."
카일은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공기는... 제국 그 어디보다 마음에 드는군."
"어머, 다행이네요! 저희 던전의 공기 청정 마법은 아주 특별하거든요. 특히 마력의 질에 민감한 S급... 아니, 아주 훌륭한 수준의 모험가분들일수록 저희 던전의 깨끗한 마나를 금방 알아보시고 감탄하시곤 하죠."
에블린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S급'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 카일의 서늘한 청안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거나, 이미 파악하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카일은 눈앞의 영주를 다시금 평가했다. 그녀는 매우 영리하고 위험한 여자였다.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면서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은밀하게 미끼를 던지며 반응을 관찰하고 있었다.
"비밀이 많은 던전이군."
카일이 툭 내뱉듯 중얼거렸다.
"세상에 비밀 없는 사업장이 어디 있겠어요? 특히나 세무조사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장부를 뒤져대는 불쌍한 변방 영지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에블린은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그녀의 황당하면서도 기발한 대답에 카일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제국 재무부를 향해 대놓고 탈세를 언급하는 영주라니, 소문보다 훨씬 더 뻔뻔하고 흥미로운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공하는 이 신성한 마나와 평화로운 공간은 현재 카일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더 이상 이곳에 오래 머물며 눈길을 끄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 교단의 추적 사제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카일은 테이블 위의 슬라임 멜로를 그릇으로 조심스럽게 밀어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움이 되었다."
그는 품에서 아까 환전했던 에셀 코인 세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가볍게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에블린이 붙잡을 새도 없이, 검은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카페 출구가 아닌 던전의 더 깊은 심층부로 향하는 어두운 통로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어머, 손님! 그쪽은 일반 고객용 구역이 아니라 던전 심층부..."
에블린이 뒤늦게 그를 부르려 했으나, 검은 로브의 실루엣은 이미 통로 너머의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에블린은 멍하니 그가 사라진 어두운 통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세 개의 에셀 코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에셀 코인을 조심스럽게 집어 올린 순간.
웅-.
코인의 표면에 묻어 있던 극미량의 마력이 에블린의 손가락 끝을 타고 흘러들어와 그녀의 던전 마스터 시스템과 즉각 공명했다.
[알림: 수집된 마나 잔여물 분석 완료.][속성: 신성 (정화의 빛)][대상 식별: 제국 1위 S급 헌터 '카일 폰 델마르'의 고유 마나 패턴과 99.8% 일치.][특이 상태: 마력 폭주 억제 상태, 성흔 오염 정화 반응 감지.]
에블린의 손등 위에 떠오른 반투명한 시스템 경고 창을 바라보며, 그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천천히 올라갔다.
"진짜였어."
제국 최고의 인기 스타이자, 교단의 움직이는 성물이자, 자신의 골치 아픈 탈세 장부를 완벽하게 세탁해 줄 제국 최고의 방패막이 후보.
그 카일 폰 델마르가 제 발로 에셀 던전에 들어왔다. 그것도 마나 정화 효과에 취해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태로.
에블린은 세 개의 코인을 손 안에서 가볍게 굴리며 그가 사라진 어두운 통로를 향해 깊고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어가 제 발로 그물 가장 깊숙한 곳에 기어들어 갔네. 한스에게 손님맞이 준비를 철저히 하라고 일러야겠어."
그녀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달콤한 민트 향 공기 속으로 은밀하게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