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조사 피하려다 국민 헌터의 계약 연인이 되었다

3화. 눈물겨운 장부 조작의 미학
"에셀 코인? 이게 대체 뭔가요, 영주님?"
금빛 자수가 깃깃이 박힌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제국 남부의 영애가 콧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섬세한 손가락 끝에는 손톱만 한 크기의 연분홍빛 마법 주화가 들려 있었다. 주화 중앙에는 몽글몽글하고 앙증맞은 슬라임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소장 욕구를 마구 자극하는 모양새였다.
"에셀 영지의 특산품 교환용 마법 토큰이랍니다, 영애님. 오늘부터 에셀 던전 내의 모든 서비스와 촉감 체험, 기념품 구매, 그리고 음료 시음은 오직 이 '에셀 코인'으로만 이용하실 수 있어요."
에블린은 세상에서 가장 영업적이고 상냥한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입구에 마련된 환전소에서 제국 골드를 코인으로 아주 손쉽게 바꿔 드리고 있으니, 전혀 불편함은 없으실 겁니다. 던전을 모두 즐기시고 나가실 때 남은 코인은 언제든 다시 골드로 환불해 드리니까요."
"어머, 주화가 너무 사랑스럽잖아! 굳이 환불하지 않고 그냥 기념품으로 가져가도 되겠어요! 얘, 나 이거 열 개만 더 바꿔 줘!"
영애는 기쁜 얼굴로 지갑을 털어 골드 주화를 잔뜩 내놓았다.
에블린의 기획은 완벽하게 적중했다. 방문객들은 환전 절차를 귀찮아하기는커녕, 오히려 '던전 테마파크 전용 마법 화폐'라는 신선하고 몰입감 넘치는 설정에 흥미를 느끼며 환호했다. 게다가 주화 자체가 워낙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보니, 퇴장할 때 환불을 받지 않고 기념품이나 액세서리용으로 소장하겠다며 그대로 주머니에 넣어가는 이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이 평화롭고 활기찬 광경을 피가 거꾸로 솟는 심정으로 노려보는 사내들이 있었다.
"에블린 에셀 영주! 지금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사기극이지?!"
온몸에서 끈적한 분홍빛 마시멜로 슬라임 점액을 씻어내느라 억지로 붉은 사제복을 얻어 입은 베르나르가 군화 소리를 복도가 울리도록 요란하게 내며 다가왔다. 그의 뒤에는 마력이 깃든 로브를 잔뜩 구겨 입은 감찰반 소속 마법사들이 독기 서린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아직도 씻어내지 못한 달콤하고 끈적한 딸기 우유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어머, 국장님. 슬라임 방에서의 힐링은 만족스러우셨나요? 얼굴 피부가 아주 매끄럽고 촉촉해지셨네요."
"헛소리는 집어치우시오! 감찰반이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대놓고 사설 화폐를 유통해 세금을 포탈하려 들다니! 제국 화폐법 위반 및 불법 금융 행위로 즉시 영지를 봉쇄하고 당신을 체포할 수도 있소!"
베르나르가 삿대질을 해대며 살기등등한 기세를 뿜어냈다. 주변에 줄을 서 있던 제국 영애들과 상인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감찰반을 향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검지손가락을 세워 안경을 천천히 치켜올렸다.
"체포라니요, 국장님. 법을 집행하시는 고위 공무원분께서 제국법을 이리 오해하시면 곤란하죠. 제국 상법 제4조 3항에 따르면, 영지 내에서 통용되는 일회성 놀이용 매개체나 기호용 토큰은 '단순 물품 교환 쿠폰'으로 규정되어 화폐법의 규제를 받지 않습니다. 제국 어디에도 축제용 쿠폰을 발행했다고 영주를 체포하는 법은 없답니다."
"이, 이중 과세 회피를 노린 비열한 꼼수일 뿐이다!"
"천만에요. 저희는 골드를 코인으로 바꿀 때 발생하는 교환 총액을 장부에 아주 성실히 기록하고 있답니다. 다만, '던전 자치 조약' 제12조에 의거해 던전 내부에서 코인으로 소비되는 상세 품목과 재화의 개별 이동은 영지의 영업 비밀이자 자치권 영역에 속하죠. 즉, 재무부의 직접 감사 범위 밖이라는 뜻입니다."
에블린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맑고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주변의 상인들이 감탄 섞인 눈빛으로 에블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국장님 때문에 손님들의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있네요. 제국의 소중한 납세자분들의 편의를 방해하는 행위 또한 감찰관 행동 강령 위반일 텐데요? 국장님의 상급자이신 재무부 차관님께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 여쭤볼까요?"
"으, 으윽..."
베르나르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주변 귀족들의 따가운 눈총과 에블린의 한 치의 틈도 없는 법률 공세에 그는 차마 더는 우기지 못했다. 법적으로 완벽히 무장한 에블린 앞에서는 그 어떤 억지도 통하지 않았다.
"두고 보자, 에셀 영주. 이 가당치도 않은 꼼수가 언제까지 통할지 내 눈으로 지켜보겠어!"
베르나르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감찰반 임시 막사로 물러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에블린은 입가에 비열하고도 짜릿한 웃음을 흘렸다.
1단계 방어는 성공이었다. 하지만 진짜 돈을 지키기 위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은밀한 촛불만이 방 안을 밝히고 있는 영주 성의 비밀 집무실.
에블린과 집사 한스는 책상 위에 수십 권의 두툼한 장부를 사방으로 펼쳐 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한스의 눈 밑에는 이미 짙은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앉아 있었고, 그의 손은 깃펜을 쥔 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영, 영주님... 정말로 장부를 이렇게 작성해도 괜찮은 겁니까? 제 평생 동안 이런 기상천외하고 뻔뻔한 회계 처리는 머리털 나고 처음 봅니다."
한스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에블린은 눈을 반짝이며 새로 정렬한 장부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한스, 회계는 숫자의 예술이야. 그리고 감찰반의 눈을 속이는 장부 조작은 눈물겨운 미학이지. 잘 봐."
에블린이 가리킨 공식 제출용 장부에는 에셀 영지의 재정이 '처참한 적자 및 현상 유지 상태'로 묘사되어 있었다.
"우리가 슬라임 카페로 벌어들인 진짜 골드는 전부 에셀 코인으로 환전되었어. 이 환전 대금은 '던전 보수 및 환경 개선을 위한 반환 예치금' 항목으로 묶어 뒀지. 제국 세법상 예치금은 최종 소비가 일어나거나 환불 기간이 만료되기 전까지 매출로 잡히지 않아."
"그렇다면 던전 내부에서 실제로 소비된 부분은 어떻게 감추는 겁니까?"
"그건 전부 '교환 쿠폰' 사용에 불과해. 장부상으로는 던전 내부에서 발생한 음료 서비스와 슬라임 촉감 체험은 손님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된 '마케팅 비용'과 '기념품 홍보 손실'로 처리했어. 여기 봐. '민트 슬라임 점성 조절 실패로 인한 드레스 변상 및 파손 비용: 3,000 골드'."
"사, 삼천 골드씩이나요?! 드레스 하나에?!"
한스가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듯 속삭였다.
"그뿐만이 아니야. 던전 바닥에 흘러내린 슬라임 점액을 청소하기 위해 특수 정화 약품을 대량 구입했다며 '던전 안전 및 청결 유지비'로 5,000 골드를 지출한 것으로 올렸어. 물론 그 약품은 우리 영지 농가에서 짠 맹물에 식초를 섞은 것에 불과하지만, 세무 영수증은 제국 상단 법률에 맞춰 완벽하게 발행해 뒀지."
에블린의 펜 끝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그녀는 현대 한국에서 지긋지긋하게 겪었던 스타트업 세무 회계와 비용 처리 기법을 제국 법률에 맞게 완벽히 대입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번에 새로 설치한 '마나 정화의 성소'는 장부상에 '던전 내 공기 질 개선 및 미세 마나 필터 보수 비용'으로 올려뒀어. 던전 환경을 정비하는 비용은 전액 면세 대상이거든. 이렇게 하면 공식 장부상 에셀 영지는 던전을 운영하느라 막대한 초기 투자 비용과 관리비를 소모해 매달 적자를 면치 못하는 불쌍하고 가난한 영지가 돼. 베르나르가 밤새워 뒤져도 가져갈 수 있는 세금은 푼돈뿐이지."
"하지만 영주님, 아공간 금고에 쌓여 있는 그 막대한 진짜 금화들은 결국 어떻게 세탁해서 쓰실 겁니까? 장부상으로는 적자인데 영지 개발에 갑자기 돈을 쓰면 바로 꼬리가 잡힐 텐데요."
한스의 뼈를 때리는 질문에 에블린은 미소를 거두고 책상 한편에 놓인 신문 속 카일의 사진을 지시했다.
"그래서 제국 최고의 S급 헌터, 카일 폰 델마르가 필요한 거야. 그가 우리의 공식 '스폰서'가 되어 막대한 후원금을 영지에 제공하는 형식으로 돈을 세탁해야 해. 그의 명의로 들어오는 면세 후원금을 통해 아공간 금고의 골드를 양성화하는 거지. 그러기 위해선..."
에블린은 창밖, 깊은 어둠에 잠긴 던전 제5구역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녀가 전 가용 마나를 쏟아부어 만든 '마나 정화의 성소'가 숨쉬고 있었다.
"그가 내가 보낸 이 맑고 깨끗한 마력의 미끼를 물어야 해. S급의 감각을 가진 자라면 반드시 알아챌 거야."
한편, 에셀 영지에서 수백 리 떨어진 제국 수도의 델마르 길드 본부.
가장 깊숙하고 삼엄한 결계가 쳐진 마력 정화실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방 안은 숨이 막힐 정도로 차갑고 무거운 마력의 파동이 가득했다.
"하아... 윽...!"
방 한가운데 주저앉은 카일 폰 델마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가슴팍을 꽉 움켜쥐었다. 얇은 가죽 상의 틈새로 드러난 그의 쇄골 부근에는 핏빛으로 붉게 타오르는 성흔이 기괴한 그물망 무늬를 그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빛 속성의 강력한 S급 마력이 그의 혈관을 타고 제어할 수 없이 폭주하듯 내달렸고, 그때마다 영혼이 통째로 찢겨 나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카일은 입안을 짓씹으며 신음을 삼켰다. 차가운 청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지독한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바닥에는 교단 사제들이 성흔을 안정시킨다며 억지로 쥐여준 '성물 정화액' 유리병들이 깨진 채 뒹굴고 있었다. 카일은 흘러내린 은발 사이로 바닥의 정화액을 노려보았다.
'정화액이 아니라... 나를 묶어두기 위한 독약이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교단이 성흔을 치료해 준다는 명목으로 제공하는 이 약물은, 실은 그의 마력 회로를 서서히 오염시키고 약물에 중독되게 만들어 교단의 구속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사슬이라는 것을. 약을 마실수록 당장의 불타는 고통은 일시적으로 무뎌졌지만, 그의 마력은 점점 더 제어하기 힘들어졌고 영혼은 갉아먹히고 있었다.
하지만 대중 앞에서는 제국의 영웅이자 교단의 살아있는 성자, '완벽한 카일'의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이 지독하고 부조리한 인형극을 끝내지 않는 한, 그의 남은 수명은 길지 않을 터였다.
그때, 마력 정화실의 결계가 해제되며 최측근 보좌관이자 부하 헌터인 렌이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길드장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성흔의 상태가 점점..."
"말해. 무슨 일이지."
카일은 일순간에 고통의 흔적을 지우고, 평소와 다름없는 서늘하고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렌은 들고 온 마법 문서철을 펼쳐 보이며 낮게 속삭였다.
"교단에서 길드장님의 다음 달 던전 레이드 일정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부 변방의 감시 거점 쪽에서 아주 기묘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북부 변방?"
카일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예. 에셀 영지 인근의 던전 부근에서 비정상적일 정도로 극도로 순수하고 깨끗한 마력 반응이 감지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기류 변화인 줄 알았으나, 대기 중으로 방출되는 마력의 오염도가 완전히 '0%'에 수렴하는 믿기 힘든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오염도 0%라고?"
카일의 청안에 번뜩이는 이채가 서렸다.
이 제국에 존재하는 모든 던전과 마력석은 흉포한 마수의 탁한 기운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심지어 교단이 자랑하는 성소조차도 인위적인 마법으로 덮어씌운 탓에 거부감이 드는 미세한 마력 왜곡이 존재했다. 오염도 0%의 마나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태초의 신성한 영역 외에는 존재할 수 없는 수치였다.
카일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S급 헌터로서의 압도적인 감각을 뻗어, 수백 리 장벽을 넘어 북쪽의 하늘을 더듬었다.
그의 초감각이 북부의 척박한 땅에 도달한 순간, 거짓말처럼 아주 가늘고 은은하지만 뒤틀려 상처 입은 그의 마력 회로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청량한 마나의 흐름이 감지되었다.
'마나 미풍 (Mana Breeze).'
그것은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죽어어가던 그에게 허락된 단 한 줄기의 생명줄과도 같았다. 요동치던 심장의 고동과 불타던 성흔의 통증이 순간적으로 기적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 어떤 교단의 약물로도 느끼지 못했던 온전한 구원이었다.
카일이 스르륵 눈을 떴다. 은빛 머리칼 아래 서늘한 눈동자 속에 억눌려 있던 야성적인 갈망이 깨어났다.
"에셀 영지라 했나."
"예, 그렇습니다만... 고작 슬라임이나 기어나오는 아주 가난한 변방 영지입니다. 최근에 무슨 이상한 체험형 던전인지 뭔지로 소소하게 귀족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더군요."
보좌관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카일은 확신했다. 그 머나먼 변방 영지의 던전에, 자신의 부서져 가는 영혼을 치유하고 해방해 줄 완벽한 성역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교단의 사슬을 끊고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도, 이 실바람 같은 구원의 신호를 놓칠 수는 없었다.
"렌. 내일부터 사흘간 공식 일정을 전부 비워라."
"예? 하지만 교단 사제들이 그림자처럼 지켜보고 있습니다. 갑자기 자리를 비우시면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움직일 거다."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려 있던 칠흑 같은 마도 로브를 거머쥐었다. 얼굴을 가리고 마력 신호조차 지울 수 있는 특수 아티팩트였다.
"수도에는 대역을 세워라. 나는 개인적인 조사를 위해 홀로 북부로 향한다."
"길드장님...!"
렌이 다급히 만류하려 했으나, 카일의 결연하고 차가운 시선에 짓눌려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교단의 삼엄한 눈을 속이고, 제국 최고의 헌터가 비밀리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발걸음의 끝은, 자신을 낚기 위해 완벽하게 계산된 치유의 덫을 설치해 둔 영주 에블린이 기다리는 땅이었다.
"기다려라, 에셀."
카일의 나지막한 독백이 차가운 결계 속에 길게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