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조사 피하려다 국민 헌터의 계약 연인이 되었다

7화. 가장 뻔뻔한 은신처
정화석 옆 수정등이 붉게 점멸했다.
[외부 탐색 마법 감지.][추적 대상: 정화 계열 고유 마나 잔향.][감지 범위: 던전 입구 및 광장.]
카일이 금빛 마나 실이 이어진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창백했던 손등 위로 다시 힘줄이 떠올랐다.
"내가 나가겠다."
에블린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놈들이 찾는 건 나다. 내가 입구로 가면 너와 손님들은 안전해진다."
"그 반대예요. 카일 님이 저기서 모습을 드러내면 저쪽은 흔적이 맞았다고 확신할 거예요. 그다음에는 이 던전과 영지가 전부 표적이죠."
카일의 청안이 가늘어졌다.
"추적자는 내 쪽으로 붙는다."
"카일 님이 그렇게 믿고 싶으신 거겠죠. 하지만 제 손님이 다치는 위험을 믿음으로 계산할 수는 없어요."
에블린은 말끝을 끊고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올렸다.
정화석의 빛이 손끝을 따라 선으로 갈라졌다. 선은 입구 쪽 감시 수정구로 이어졌다.
수정구 위에 밤의 광장이 떠올랐다.
슬라임 카페 앞에는 늦은 시간인데도 줄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분홍 슬라임을 품에 안고 있었고 귀족 영애들은 환전소 앞에서 에셀 코인을 흔들며 사진 화가에게 포즈를 잡고 있었다.
그 머리 위로 은빛 실 한 가닥이 원을 그렸다.
카일의 턱선이 굳었다.
"저걸 건드리면 네 던전 마나가 드러난다."
"안 건드릴 거예요. 손님들 마나 속에 묻어 버릴 거예요."
에블린은 수정구를 향해 말했다.
"한스. 입구 카페에서 즉석 시음 행사를 열어 주세요. 민트 슬라임 쉐이크는 전량 반값으로요. 광장 손님은 카페 안쪽으로 천천히 들여보내고 환전소에서는 코인을 한 번씩 굴려 보라고 하세요."
수정구 저편에서 한스의 대답이 들렸다.
"안전을 위한 조치입니까?"
"네. 소란은 만들지 말고요."
"알겠습니다."
손님들은 갑자기 열린 시음 행사에 웃으며 카페 쪽으로 옮겨 갔다. 작은 잔에서는 민트 향과 옅은 정화 마나가 피어올랐다.
에블린은 던전의 공기 흐름을 미세하게 틀었다.
카페의 슬라임들이 내뿜던 순한 마나와 수십 개의 에셀 코인에 묻은 잔향이 광장 위로 퍼졌다. 카일이 남긴 강한 흔적은 수많은 작고 비슷한 빛 사이로 찢겨 나갔다.
은빛 실이 한 차례 크게 떨렸다.
카일이 낮게 말했다.
"그렇게 마나를 넓히면 네가 유지하는 정화 구역도 약해질 텐데."
"삼십 분 정도예요. 그동안 슬라임 카페를 쉬게 하면 됩니다."
"그 정도면 매출 손실이 적지 않겠군."
"손님이 다치는 것보다 싼 손실이에요."
에블린은 수정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은빛 실은 환전소로 내려갔다가 다시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잠시 뒤 낯선 목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정화 반응이 과도하다. 대상 하나가 아니다."
목소리는 불쾌할 만큼 차분했다.
"기록만 남겨라."
은빛 실이 스르르 풀리더니 밤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에블린은 손가락을 내렸다. 수정구가 꺼지고 귀빈 응대실에는 정화석의 낮은 울림만 남았다.
"오늘은 넘겼네요."
카일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를 붙잡은 영주는 위협이 닿자 던전의 돈줄부터 끊었다. 카일은 그 이상한 우선순위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만 넘긴 거지."
카일이 말했다.
"맞아요. 흔적은 사라졌어도 누군가는 이곳에 정화 계열 마나가 넘친다는 걸 기록했겠죠. 후원 계약만으로는 카일 님이 계속 에셀에 드나드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녀는 정화석 옆에 떨어진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빈 페이지가 푸른 빛 아래 희게 빛났다.
"그래서 더 뻔뻔한 방법이 필요해요."
카일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면서도 이상하게 숨을 죽였다.
에블린은 깃펜을 들어 빈칸 위에 제목을 적었다.
에셀 영주와 카일 폰 델마르의 한시적 개인 관계 약정
"저와 연인인 척해 주세요."
정화석이 한 번 크게 맥박했다.
카일의 얼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에블린의 손끝에서 한참 떠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봐."
"계약 연인이요. 기간은 짧게요. 카일 님은 제 던전의 비공개 후원자이자 안전 자문이 됩니다. 저는 후원금을 받을 합법적인 명분이 생기고요."
에블린은 새 서류를 기존 계약서 위에 나란히 놓았다.
"하지만 후원자만으로는 부족해요. 제국 1위 헌터가 변방 영지를 들락거리면 재무부는 거래를 캐고 교단 쪽 사람들은 카일 님을 찾겠죠. 반대로 영주의 연인이 개인적으로 머무는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관계가 먼저고 후원은 그 관계에서 나온 지원이 되니까요."
"거짓 관계가 들키면 더 큰 먹잇감이 된다."
"그래서 제국 전역에 떠들 생각은 없어요. 에셀 안에서만 먼저 자연스러운 그림을 만들 거예요. 여기 직원들은 영주가 손님을 챙기는 모습에 익숙하고요. 재무부에는 비공개 약정만 제출합니다. 누가 묻더라도 카일 님이 잠시 쉬러 왔다는 이유가 생기죠."
카일은 낮게 웃었다. 소리도 거의 나지 않는 웃음이었다.
"누가 봐도 네 쪽이 더 이득이군."
"네. 그러니까 카일 님 몫도 제대로 넣어야죠. 심층부 객실과 정화석 이용은 무료예요. 드나드는 동선도 제가 막고요. 무엇보다 카일 님이 이곳에 있는 사실을 제가 먼저 숨길 이유가 생겨요."
"내게 숨을 곳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라는 건가."
에블린의 녹색 눈이 잠깐 흔들렸다.
그녀는 평소 같으면 숫자와 조건으로 곧장 밀어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카일의 손목을 감싼 마나 실과, 그가 고통 속에서 놓지 말라고 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인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다만 여기 있는 동안은 혼자 버티지 마세요. 그게 제 조건이에요."
카일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로 올라왔다.
그 말은 거래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너는 내가 네게 어떤 위험을 끌고 올지 모른다."
"정확히는 모르죠."
"그런데도 내 연인인 척하겠다고?"
"제 영지 안에서 벌어진 일은 제가 관리해요. 카일 님을 쫓는 사람에게 제 던전의 손님과 직원을 내줄 생각도 없고요. 위험을 피해 영주 자리를 지킨 적은 없어요."
에블린은 이내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물론 세금을 피할 기회도 같이 지킬 거고요. 그건 부정하지 않을게요."
카일은 그녀를 오래 바라보았다.
교단의 사제들은 의무를 말했고 황실의 관리들은 영광을 말했다. 에블린만은 이익을 숨기지 않은 채 거절할 선택도 내주었다.
"조건이 있다."
에블린의 눈빛이 즉시 또렷해졌다.
"말씀하세요."
"기간은 칠 일이다. 재무부가 조사를 끝내지 못해도 연장은 내 동의를 받아."
"좋아요."
그녀는 곧바로 첫 조항에 적었다.
제1조. 약정 기간은 서명일로부터 칠 일로 한다. 연장은 양측의 서면 동의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내 신분을 수도에 알리지 마라. 초상화와 마력 기록석도 금지다. 기자나 화가를 부를 생각도 하지 마."
"그건 이미 약속했어요."
"사람들 앞에서 연기할 때도 네가 원할 때만 닿아. 나도 마찬가지다."
깃펜이 멈췄다.
카일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말 뒤에는 오래된 피로가 묻어 있었다. 타인의 손길이 언제나 허락을 구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에블린은 조항을 적었다.
제2조. 양측은 상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신체 접촉 및 초상 사용을 하지 않는다.
"제 조건도요."
"말해."
"에셀에 머무는 동안 정화석 연결을 끊고 혼자 사라지지 않는 것. 몸이 이상하면 저나 한스에게 바로 알리는 것. 그리고 제 손님과 직원이 위험하면 지켜 주는 것."
카일이 눈썹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마지막은 계약서에 없더라도 한다."
"그럼 서명하기 쉬워졌네요."
"그리고 하나 더."
카일은 그녀가 쥔 깃펜을 보았다.
"위험해지면 내가 널 먼저 숨긴다. 영지의 매출과 네 계획은 그다음이다."
에블린은 피식 웃으려다 멈췄다.
제국 최고의 헌터가 던진 말치고는 지나치게 단순했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 이상하게 가슴을 건드렸다.
"그건 카일 님이 정할 일이 아니에요. 저는 제 영지를 버리고 숨는 영주가 아니니까요."
"알고 있다."
카일의 청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는 거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에블린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계약서 마지막 줄을 손가락으로 톡 두드렸다.
"좋아요. 위험할 때는 서로 먼저 알리고 같이 결정하는 걸로 적죠. 혼자 사라지는 건 양쪽 다 금지예요."
카일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4조. 위협 발생 시 양측은 상대에게 상황을 고지하고 단독 이탈하지 않는다.
그는 깃펜을 받아 이름을 적었다.
카일 폰 델마르
서명 위로 정화석의 푸른 빛이 가늘게 스쳤다.
에블린도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에블린 에셀
두 줄의 잉크가 나란히 마르기도 전 카일이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한 가지 확인할 게 있다."
"뭔데요?"
"손을 잡아도 되나."
에블린은 그의 손끝을 보았다.
검을 쥔 손이라 거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닿기도 전에 멈춰 있었다. 방금 계약서에 적힌 조항을 지키려는 것처럼.
그 조심스러움이 그녀를 잠시 말문 막히게 했다.
"왜요?"
카일은 벽 쪽 감시 수정구를 턱으로 가리켰다. 꺼진 수정구 표면에는 아직 아주 희미한 은빛 잔광이 남아 있었다.
"저쪽이 정말 포기했는지 보자. 연인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
에블린은 웃었다.
"동의해요. 다만 제 손은 비싼 편이에요."
"계약서에 가격은 없던데."
"그건 추가 협상 사항입니다."
카일의 손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
차가운 손이었다. 그러나 손가락을 억지로 얽지 않고 그녀가 물러날 수 있을 만큼 느슨하게 잡았다.
에블린은 그를 따라 수정구 앞으로 걸었다. 카일은 손을 든 채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웃어."
"명령이에요?"
"연기 지시다."
에블린은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 손님에게 보이던 반듯한 영업 미소와는 달랐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체온이 신경 쓰여서 조금 늦고 조금 어색했다.
카일은 그 미소를 내려다보다가 낮게 말했다.
"그 미소는 나한테도 팔 건가."
"카일 님은 할인 없습니다."
"그렇군."
그의 입가가 희미하게 풀렸다.
그때 수정구가 맑게 울렸다.
한스의 목소리가 응대실에 닿았다.
"영주님. 재무부에서 급행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에블린의 미소가 사라졌다.
허공에 열린 작은 전달창에서 봉인된 서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셀 영지에 도착한 지시서였다.
에블린이 봉인을 풀었다.
재무부 감찰 사제 루시안 벨로크가 내일 오전 에셀 영지에 도착한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정화석보다 차가운 기운이 방 안을 훑었다.
예고장에 적힌 날짜보다 이틀이나 빨랐다.
에블린은 카일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서신을 다시 읽었다.
카일이 낮게 말했다.
"칠 일이라고 했지."
"네."
"그럼 내일 아침부터 제대로 연기해."
그의 청안이 서신 위에서 에블린에게로 향했다.
"네 세무조사관이 우리가 연인이라고 믿게 만들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