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싹 쓸어서 만렙까지

3화: 청소부가 챙긴 몫
"손 떼시죠."
강도현은 포대 손잡이를 쥔 태성 길드 대원의 손등을 내려다봤다.
대원은 웃었다. 하지만 손가락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조금 전 한 번 당겨 보고도 포대가 움직이지 않자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폐기물이라면서요. 폐기물이면 열어 봐도 되잖아."
"밀봉 전 위험물입니다. 반출 태그도 붙기 전이고요."
도현은 포대 옆에 매달린 노란 끈을 들어 보였다. 관리청 지급 태그였다. 아직 번호도 쓰지 않은 물건이었지만 현장 안에서는 그 자체로 개봉 금지 표시가 됐다.
"검사하려면 감독관 입회가 필요합니다. 열고 나서 독성 가스라도 새면 누가 책임집니까?"
"우리 길드 물건이면 우리가 책임지지."
"그럼 누락 물건이라는 내용도 적어 주시겠습니까?"
도현이 기록 단말을 내밀었다.
공략 길드 주장 부산물. 현장 미신고 물품. 개봉 요청자 서명.
대원의 입꼬리가 굳었다.
도현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이 남자는 무엇을 찾는지 모른다. 위에서 구석에 이상한 물건이 남았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서명하는 순간 태성이 공식 보고에서 누락한 물건을 먼저 인정하게 된다.
"장난하냐?"
"아닙니다. 절차입니다."
도현은 포대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대원 손이 손잡이에서 떨어졌다. 힘을 과하게 주지 않았는데도 포대가 바닥을 미끄러져 도현의 발뒤꿈치에 붙었다.
대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F급이 힘은 좀 세네."
"현장 일 하다 보면 손목은 단단해집니다."
대원이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도현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켰다. 통로 바닥에 그어 놓은 붉은 선 바깥이었다.
"안전선 밖으로 무단 진입하시면 출구 감시 기록에 남습니다."
"청소부가 말이 많아졌네."
"물건 찾으시는 분이 더 조심하셔야죠."
도현은 태그를 포대 입구에 감고 봉인 버튼을 눌렀다. 짧은 전자음과 함께 파란 불빛이 켜졌다.
검은 가시 조각은 포대 바닥에서 미동도 없었다. 그래도 도현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이 포대가 열리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아진다.
"뭐가 그렇게 급합니까?"
대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보스방 쪽을 한 번 돌아봤다.
그때 무전기에서 박계장의 목소리가 터졌다.
"강도현! 아직도 안 나왔어?"
"출구에서 공략 길드 측이 미신고 부산물 검사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도현은 일부러 또박또박 말했다.
"뭐?"
대원이 인상을 썼다. 박계장이 상황을 알면 귀찮아질 것이 뻔했다.
"제가 들은 건 없는데. 태성 쪽에서 그런 요청을 했다고?"
"네. 개봉 요청자 서명 받는 중입니다."
"누가 서명해?"
도현은 단말을 대원 쪽으로 기울였다.
대원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
"...됐어요. 그냥 들고 나가."
그는 손을 털며 물러났다. 지나가는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
"그 포대. 내일 다시 확인할 겁니다."
"언제든 감독관 모시고 오십시오."
도현은 포대를 끌고 출구를 통과했다.
밖 공기는 차가웠다. 그런데 방독 마스크 안쪽은 여전히 뜨거웠다. 열이 식지 않았다. 도현은 폐쇄문이 내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손바닥을 꽉 쥐었다.
임시 적재장은 던전 출구에서 백 미터쯤 떨어진 컨테이너 앞에 있었다. 박계장은 도현을 보자마자 다가왔다.
"태성하고 왜 시비를 만들어?"
"제가 만든 게 아닙니다. 포대를 열겠다고 하셔서요."
"열어 봤으면 됐잖아. 괜히 큰 길드 비위 건드려서 좋을 게 뭐 있어."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입가에는 웃음이 없었다.
"그럼 개봉 지시를 서면으로 남겨 주십시오. 미신고 위험 부산물이 나오면 처리 책임은 감독관님 명의로 올리겠습니다."
박계장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나 협박하냐?"
"아닙니다.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자는 말씀입니다."
도현은 단말 화면을 켰다. 던전 출구의 감시 기록과 마지막 오염도 수치가 나란히 떠올랐다.
잔여 오염도 11%
방폭 처리 완료. 폐쇄 승인.
"제가 처리한 현장입니다. 누락 물건이 있다면 태성 쪽에서 먼저 보고해야 하고요. 제가 포대를 열면 그 물건을 누가 빼돌렸는지부터 제 책임이 됩니다."
박계장은 화면과 포대를 번갈아 봤다. 서명을 받겠다는 말에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그럼 적재장에 넣어. 내일 아침에 처리반이 다시 확인한다."
"알겠습니다."
도현은 순순히 답했다.
적재장 구석에는 태성이 처리비만 남기고 간 부산물이 쌓여 있었다. 정식 인수표가 붙은 물건들이었다. 부러진 앞다리 힘줄, 마석 가루가 묻은 가죽 조각, 독성 폐낭 막. 값나가는 핵은 다 빠졌지만 청소부에게는 처리 순서가 있는 물건들이다.
"도현아."
컨테이너 안쪽에서 박기문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반장을 보자 어깨 힘이 조금 풀렸다. 박기문은 오래된 방호복 소매를 걷은 채 폐기물 목록을 훑고 있었다.
"이거 네가 정리해. 저 양반은 태성 눈치 보느라 손도 못 대겠대."
"네."
"너 얼굴이 왜 그러냐? 열 나?"
"마스크 오래 써서 그렇습니다."
"그럼 흡입기부터 달아. 청소부가 장비 아끼면 제일 먼저 골로 간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평소와 같았지만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그는 적재장 외곽 카메라를 확인하고 흡착포 상자를 끌어왔다. 카메라가 보는 쪽에는 중화제 통을 세웠다. 장비를 꺼내는 손은 익숙하게 움직였다.
청소는 아무거나 먼저 담는 일이 아니었다. 피가 굳기 전 독성부터 묶는다. 마석 가루가 날리기 전에 흡착포를 깐다. 그 뒤에 무게가 나가는 뼈와 가죽을 분류한다.
도현은 그 순서를 그대로 밟았다. 그 틈에 가장 안쪽에 있던 앞다리 힘줄을 집었다.
변종 독각수의 앞다리 힘줄.
잔여 체력 정보: 17%
신체 부담: 낮음
전과 다른 계열이었다.
도현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손가락을 힘줄 위에 얹었다.
[부산물 흡수(EX)]가 발동합니다.
말라붙은 힘줄이 검은 재로 풀렸다. 뜨거운 열이 종아리부터 허리까지 차올랐다. 숨이 막히는 대신 무너질 듯 무겁던 다리가 단단해졌다.
체력 +2
도현은 곧바로 손을 뗐다.
더 먹을 수 있다는 감각이 속삭였다. 그러나 이곳은 보스방이 아니었다. 사람도 카메라도 많다. 무엇보다 머릿속의 울림이 다시 커지고 있었다.
그는 마석 가루가 달라붙은 가죽 조각을 골랐다. 가죽 표면은 이미 굳어 있었지만 안쪽 힘줄에는 아직 마력이 남아 있었다.
변종 독각수의 경화 가죽.
잔여 근력 정보: 21%
신체 부담: 보통
도현은 가죽 조각을 흡착포 아래로 밀어 넣고 손바닥을 눌렀다.
검은 재가 흡착포 안에서 사라졌다. 어깨와 등이 당겨졌다. 낮에 얻은 힘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몸 중심이 바닥 쪽으로 깊게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근력 +4
도현의 손가락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바로 옆에 있던 폐기물 상자가 찌그러질 뻔했다. 그는 재빨리 손을 폈다.
이 정도면 관리청 훈련장에서 보던 E급 상위 인력의 악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등급 진단을 받는 순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열이 목까지 차올랐다. 도현은 이를 악물고 중화제 밸브를 열었다. 남은 가죽과 피를 녹색 거품 아래에 묻었다.
마력계 수치가 빠르게 내려갔다.
잔여 오염도 8%
너무 빠르다.
도현은 일부러 흡착포를 한 장 더 펼쳤다. 분해가 덜 된 뼈를 갈고리로 잘게 부수고 중화제 분사 시간을 늘렸다. 능력의 흔적을 감추는 것도 청소의 일부였다.
마지막으로 독성 폐낭 막이 눈에 들어왔다. 얇은 막 안에는 초록빛 액체가 굳어 있었다.
잔여 마력 정보: 9%
신체 부담: 높음
도현은 한참 망설였다.
마력은 지금도 필요했다. 하지만 손끝이 이미 저리고 있었다. 시야 가장자리에 희미한 불빛이 번졌다. 더 흡수하면 몸이 먼저 경고를 넘어설 수 있다.
그는 폐낭 막을 밀봉통에 넣었다. 뚜껑을 닫으려던 순간 포대 안쪽의 검은 가시가 떨었다.
검은 가시에서 뻗은 듯한 감각이 폐낭 막을 훑었다. 위험하다는 감각은 그대로였다. 다만 아까보다 훨씬 또렷하게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현은 손가락 끝으로 폐낭 막의 가장자리만 건드렸다.
[부산물 흡수(EX)]가 발동합니다.
차가운 기운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이어서 머릿속에 바늘 수십 개가 동시에 꽂혔다. 도현은 소리 없이 이를 깨물었다.
마력 +3
과부하 경고: 감각 과부하가 심화됩니다.
컨테이너의 형광등이 지나치게 밝았다. 멀리서 박계장이 컵을 내려놓는 소리도 귀를 찔렀다. 가죽을 자르는 갈고리의 금속음은 머릿속까지 긁어 댔다.
도현은 무릎을 짚었다. 흡수한 폐낭 막은 검은 재가 되어 장갑 위에서 흩어졌다.
욕심을 참겠다고 해 놓고 결국 손을 댔다. 하지만 그 대가는 분명했다. 다음 한 조각은커녕 지금 당장 장비를 잡는 것도 위험했다.
"이건 중화제로 간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도현은 남은 뼛가루를 손끝으로 쓸었다.
잔여 근력 정보: 6%
동일 계열 반복 흡수. 효율이 감소합니다.
그는 짧게 혀를 찼다. 욕심을 참는 판단이 맞았다. 뼛가루는 흡착포에 밀어 넣고 분해 장비를 작동시켰다.
그때 폐기물 포대 바닥이 미세하게 울렸다.
도현은 굳었다.
포대 안의 검은 가시 조각이 천천히 한쪽을 향하고 있었다. 적재장 외벽 너머. 북쪽 산자락에 붙은 폐쇄 던전 방향이었다.
희귀 잔향 감지.
문장이 떠오른 직후 박기문이 휴대 단말을 내려다봤다.
"도현아. 내일 새벽에 시간 되냐?"
"왜요?"
"북쪽 D급 던전에서 잔여 마력 수치가 튄다. 공략대는 빠졌는데 청소팀이 겁먹고 못 들어가겠대."
박기문은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위험 수당은 제대로 붙여 준다더라."
도현은 포대 안쪽의 떨림을 느꼈다. 검은 가시는 점점 더 빠르게 북쪽을 두드리고 있었다.
열이 남은 몸으로는 무리일지도 모른다. 방금 얻은 힘도 익숙해지기 전이다.
하지만 청소부는 안다. 던전에서 제일 위험한 건 크게 터진 곳이 아니다. 아직 터지지 않은 곳이다.
"부산물 처리 권한도 제가 갖습니까?"
박기문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먼저냐?"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도현은 포대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갑니다. 먼저 터질 것부터 치워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