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싹 쓸어서 만렙까지

2화: 버려진 힘을 주웠다
눈을 뜨자 천장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었다. 천장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강도현의 시야가 흔들렸다.
검붉은 정수가 있던 자리에는 검은 재만 남아 있었다. 재는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붉은 점막 틈으로 스며들었다.
도현은 한쪽 무릎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장갑 안쪽 손바닥이 뜨거웠다. 손등을 타고 올라왔던 금빛 선은 사라졌지만 맥박이 팔 안에서 낯설게 뛰었다.
대상 접촉 확인.
눈앞의 문장이 다시 밝아졌다.
유일 특성 [부산물 흡수(EX)]가 각성합니다.
마수 부산물에 잔존한 능력 정보와 마력 잔향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주의: 과도한 흡수는 신체 과부하를 유발합니다.
도현은 눈을 세 번 깜빡였다.
문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력계가 망가졌을 때 보던 노이즈도 아니었다. 글자는 허공에 붙어 있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어두운 시야 안쪽에서 또렷했다.
"특성?"
목소리가 갈라졌다.
F급 각성자에게도 상태창 비슷한 감각은 있다. 하지만 등급 확인과 마력 수치 정도가 전부였다. 스킬을 배웠다는 사람은 관리청 장비에 손을 얹고 진단부터 받는다.
그런데 유일 특성이라니.
도현은 웃으려다 기침을 했다. 가슴 안쪽이 뜨거운 물로 가득 찬 듯 답답했다.
삐이이익.
허리춤의 마력계가 다시 울었다. 깨졌던 화면에는 숫자가 아닌 방향 표시가 떠 있었다. 화살표는 바로 옆의 보스 시체를 향했다.
그때 새 문장이 겹쳤다.
흡수 가능 대상이 감지됩니다.
도현의 시선이 잘린 흉곽으로 향했다.
태성이 마석을 뽑아 간 보스의 시체. 피와 뼈와 내장이 방 한가운데 널브러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처리 비용이나 불려 줄 폐기물에 불과했던 것들이다.
지금은 달랐다.
뼛조각 하나마다 희미한 빛이 붙어 있었다. 물건의 가격표를 읽듯 감각이 먼저 의미를 알아냈다.
변종 독각수의 견갑 파편.
잔여 근력 정보: 18%
부패 진행: 41%
도현은 숨을 멈췄다.
독각수. 공식 보고서에 적힌 보스 이름은 붉은 뿔 멧돼지였다. 태성이 제출한 기록에는 그저 보스급 한 마리를 처리했다는 문장만 있었다.
바닥의 시체가 그 보스와 같은 종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정수가 박혀 있던 작은 시체와 어떤 관계인지는 더더욱 몰랐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태성이 남긴 이 부산물에는 평범한 마석 조각보다 훨씬 진한 힘이 남아 있었다.
"강도현! 들리냐?"
박계장의 목소리가 무전을 찢었다.
"왜 기록 신호가 또 끊겨? 폐쇄까지 삼 분 남았어. 안 나오면 네 장비째로 문 닫힌다!"
도현은 피가 묻은 견갑 파편을 내려다봤다.
삼 분.
보고서를 들춰볼 시간도 없었다. 손에 넣은 특성이 진짜인지 확인할 시간도 길지 않았다.
하지만 청소부는 마감 직전일수록 순서를 안다. 비싼 것부터가 아니라 먼저 터질 것부터 치운다.
도현은 견갑 파편을 집었다.
차갑고 거친 뼈였다. 손바닥에 닿자마자 검은 피가 실처럼 풀렸다.
[부산물 흡수(EX)]가 발동합니다.
대상: 변종 독각수의 견갑 파편.
잔여 근력 정보를 흡수합니다.
뼛조각이 손안에서 바스러졌다.
동시에 어깨가 아래로 푹 꺼졌다. 몸에 보이지 않는 모래주머니가 매달린 느낌이었다. 다음 순간 그 무게가 팔과 등으로 퍼졌다.
우드득.
손가락 관절이 저절로 굽혔다 펴졌다. 방호복 소매가 팽팽해졌다.
근력 +3
도현은 손에 남은 가루를 털었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지만 팔은 이상할 만큼 가벼웠다.
그는 옆에 있던 뼈토막을 집어 들었다. 평소라면 양손으로 들어야 할 굵기였다. 그런데 한 손으로 가볍게 들렸다.
확인이 더 필요했다.
도현은 바닥에 박힌 철제 갈고리를 잡았다. 원래라면 굳은 혈액에 반쯤 잠긴 갈고리를 빼려면 몸무게를 실어야 했다.
그는 손목만 한 번 비틀었다.
푹.
갈고리가 너무 쉽게 빠져 나왔다. 도현의 팔이 뒤로 젖혀질 뻔했다. 손잡이는 멀쩡한데 그 주변 점막만 크게 찢어졌다.
도현은 얼른 갈고리를 내려놓았다.
힘이 세진 건 확실했다. 문제는 몸이 그 힘의 감각을 아직 모른다는 것이었다. 작업 도중 힘 조절을 못 해 장비를 부수면 박계장이 물어내라고 할 게 뻔했다.
그는 장갑 낀 손을 펴고 접었다. 관절은 전과 같아 보였다. 그런데 손가락 끝마다 낯선 탄성이 들어차 있었다.
"숨길 것도 하나 더 늘었네."
"말도 안 되지."
중얼거린 순간 바닥의 피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피 사이로 검은 줄이 엉겨 있었다. 보스가 죽기 전 뿜어낸 독성 마력의 흔적이었다.
변종 독각수의 응고 혈액.
잔여 마력 정보: 12%
흡수 시 신체 부담: 낮음
도현은 장갑을 다시 조였다. 피를 흡수한다는 발상이 불쾌했지만 청소 작업에서 피를 중화 탱크에 퍼 담는 것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혈액 가장자리를 눌렀다.
피가 장갑 위를 기어 올라왔다.
차가운 감각이 손목을 지나 팔꿈치까지 번졌다. 이번에는 무릎이 꺾일 뻔했다. 머릿속에 있던 웅웅거림이 한순간에 커졌다.
마력 +2
과부하 경고: 체온 상승.
도현은 벽을 짚었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방독 마스크 안으로 뜨거운 숨이 차올랐다.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
그는 바닥을 훑어보았다. 뼛조각마다 희미한 문장이 떠올랐다. 어떤 것은 근력. 어떤 것은 마력. 어떤 것은 이미 부패가 심해 흡수 효율이 낮았다.
전부 먹을 수 있다고 전부 먹어서는 안 됐다.
도현은 가장 진한 반응을 보이는 갈비뼈 파편 하나만 더 골랐다. 나머지는 중화제 통으로 밀어 넣었다. 청소부가 욕심을 내다 사고를 내면 현장 전체가 날아간다.
갈비뼈에 손을 얹자 문장이 떴다.
동일 계열 반복 흡수. 효율이 감소합니다.
근력 +1
역시였다.
도현은 짧게 웃었다. 공짜로 강해지는 능력은 아니었다. 신선한 것과 다른 종류를 가려야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세상이 뒤집힐 만했다.
"강도현!"
박계장이 거의 비명을 질렀다.
"문 닫는다!"
도현은 정신을 차렸다.
바닥의 오염도 표시가 42%에서 19%로 내려가 있었다. 흡수한 피와 뼈가 사라진 자리마다 붉은 점막의 꿈틀거림도 약해졌다.
특성이 부산물의 힘만 가져가는 게 아니었다. 오염의 뿌리까지 함께 비워 버리고 있었다.
이걸 들키면 끝이다.
관리청은 특성을 검사한다. 태성은 보스방에 무엇이 더 있었는지 묻는다. 박계장은 자기 손을 더럽히기 싫어 도현을 먼저 내민다.
도현은 재빨리 중화제를 뿌렸다. 남은 피를 흡착포로 덮고 원래부터 있던 파편은 폐기물 포대 깊숙이 넣었다. 바닥의 긁힌 자국에는 태성 대원의 발자국과 장비 자국이 겹쳐 있었다.
변종 마수의 시체가 있던 벽 틈에는 타버린 내장과 검은 가시 조각 하나를 밀어 넣었다. 정수가 녹아든 자리만 너무 깨끗하면 이상해 보일 터였다.
그 가시 조각은 흡수하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순간 다른 부산물과 달리 묵직한 저항이 느껴졌다. 지금 몸 상태로 건드렸다가는 과부하 경고가 현실이 될 것 같았다.
도현은 가시를 밀봉 주머니에 넣어 폐기물 포대 맨 아래에 감췄다.
잔여 오염도 11%
도현은 수치를 보고 중화제 밸브를 조금 더 열었다. 정상적인 장비를 쓴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면 결과도 너무 완벽하면 안 됐다.
"박계장님. 방폭 처리 끝냈습니다. 나갑니다."
"지금 당장 뛰어!"
도현은 폐기물 포대를 어깨에 걸었다.
평소 같았으면 허리가 휘었을 무게였다. 하지만 포대는 가볍게 들렸다. 강화된 몸이 낯설어 발걸음이 순간 빨라졌다.
통로 입구에 들어서자 천장의 붉은 결정 하나가 떨어졌다.
퍽.
도현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결정은 손바닥 위에서 멈췄다.
그는 잠깐 굳었다. 손가락이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이건 연습이 필요하겠네."
출구의 빛이 보일 때쯤 누군가 앞을 막아섰다.
태성 길드의 대원이었다. 보스방에서 도현에게 방폭 처리를 떠넘기던 남자였다. 대원은 통로 벽에 기대어 있다가 포대를 내려다봤다.
"아직 안 나갔네."
"청소가 남아서요."
"그 포대 내려놔 봐요."
도현의 손이 포대 손잡이를 쥐었다.
"폐기물입니다. 위험물 반출 절차 밟아야 합니다."
"폐기물?"
대원이 웃었다.
"우리 쪽에서 챙겨야 할 물건이 하나 비는 것 같아서 말이지. 보스방 구석에 이상한 거 없었어요?"
도현의 목덜미가 식었다.
태성도 무언가를 놓쳤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상한 거면 감독관 입회부터 받아야죠. 제가 임의로 열면 절차 위반입니다."
"야. 우리가 공략한 던전이야. 열어 보라면 열어."
대원이 포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도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툭.
대원의 손이 먼저 미끄러졌다. 억지로 당긴 쪽은 대원인데 포대는 도현의 발치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원의 표정이 굳었다.
도현도 놀랐지만 마스크 뒤에서 천천히 웃었다.
"그러니까 위험물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는 포대 안쪽을 힐끗 봤다.
밀봉 주머니 속 검은 가시 조각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현의 눈앞에 또 다른 문장이 떠올랐다.
희귀 잔향 감지.
대원의 손이 다시 포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