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曄判)의 마지막 변호인

4화 기억 증거 요청
“박덕순 님의 생전 기억을 증거로 채택해 주십시오.”
내 말이 끝나자 칼산 법정의 붉은 빛이 한 번 흔들렸다.
천장에 박힌 칼날들이 서로를 스치는 듯 가느다란 울음소리를 냈다. 방청석의 망자들은 숨을 죽였다. 누군가는 고개를 저었고 누군가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명부에 적힌 글자보다 자기 손이 더 믿을 만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생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승에서는 그 말이 쉽게 통하지 않았다.
귀마가 뼈 가면을 조금 기울였다.
“망자의 기억은 가장 값싼 변명이다. 살았을 때의 후회가 죽은 뒤에는 사실인 양 떠오른다.”
“그래서 전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보따리 위에 놓인 털신을 가리켰다.
“이 물건과 맞춰 볼 수 있는 한 장면만 열람하겠습니다. 아이를 버렸다는 기록과 충돌하는지 확인하면 됩니다.”
귀마의 손가락뼈가 판석을 두드렸다.
“기억 열람은 망자의 혼을 헤집는 절차다. 틈이 열리면 거짓도 함께 흘러든다. 변호인이 질문 몇 마디로 없는 길을 만들 수도 있지.”
“그러니 질문의 범위도 제한하겠습니다.”
나는 법정 중앙의 붉은 선을 가리켰다.
“물건에 닿은 감각만 확인하십시오. 손으로 붙잡았던 것, 발로 밟았던 것, 몸으로 견딘 것. 그 감각이 남은 물건이나 원기록과 맞지 않으면 증거에서 빼면 됩니다.”
귀마의 시선이 털신으로 옮겨 갔다.
“칼산 법정의 제한 열람은 기억을 그대로 믿는 절차가 아니다. 기억이 물건을 가리키고 물건이 다시 기억을 가리킬 때만 허용한다.”
“그 기준에 따르겠습니다.”
내 대답 뒤로 잠깐 정적이 흘렀다.
박덕순은 털신 한 짝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손등의 주름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손을 놓으면 마지막으로 남은 아이의 온기까지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제가… 기억하지 못하면요?”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모른다고 말해도 됩니다.”
나는 박덕순을 똑바로 보았다.
“기억나는 것만 말하십시오. 기억나지 않는 부분은 빈칸으로 남기겠습니다. 빈칸을 억지로 메우는 순간 그건 증거가 아니라 이야기가 됩니다.”
박덕순의 손가락이 털신의 해진 끈을 만졌다. 한참 뒤 그녀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귀마가 차갑게 선언했다.
“제한 열람을 허가한다. 물건과 직접 닿은 감각만 기록한다. 변호인이 답을 유도하면 즉시 중단한다. 기억 속 인물의 정체는 별도 증거 없이는 인정하지 않는다.”
붉은 글자가 허공에 떠올랐다.
박덕순의 생전 기억 중 보따리 속 아이 털신과 직접 연결된 감각의 제한 열람을 개시함.
털신의 털이 바람도 없이 일어섰다.
박덕순의 눈동자가 멀어졌다.
불 냄새가 법정에 번졌다.
처음에는 마른 나무가 타는 냄새였다. 다음에는 젖은 천과 머리카락이 타는 냄새가 뒤섞였다. 붉은 칼날 사이에 좁은 골목이 열렸다. 돌담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바닥에는 사람들이 흘린 물과 재가 얕게 고여 있었다.
박덕순의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등에 아이가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뜨거워요. 등이 너무 뜨거워서… 업은 아이가 아니라 불덩이를 안은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발이 허공에서 비틀거렸다. 털신 밑창에 묻었던 검은 흙이 법정 바닥으로 가루처럼 떨어졌다.
“아이의 상태를 보았습니까?”
이번에는 내가 천천히 물었다.
“이마가 젖어 있었어요. 땀이 아니라 열 때문이었어요. 숨이 짧았고 다리를 접지 못했습니다. 걷게 하면 울지도 못할 것 같아서 업었어요.”
귀마가 끼어들었다.
“어디로 가고 있었지?”
“몰라요. 아니… 서문입니다.”
박덕순의 손이 아이의 발을 감싸는 모양으로 굳었다.
“서문 쪽에 약을 나눠 주는 천막이 있다고 들었어요. 푸른 줄을 친 천막이요.”
“들은 말이다. 직접 확인한 사실이 아니다.”
“약초 냄새를 맡았습니다.”
박덕순의 눈가가 떨렸다.
“쑥보다 쓰고 비 냄새보다 차가운 냄새요. 아이 손목에 천 조각을 묶어 준 사람이 있었어요. 그 천에서도 같은 냄새가 났습니다.”
나는 털신을 들어 붉은 빛 아래에 비췄다. 오래된 그을음 아래로 미약한 약초 향이 남아 있었다. 불이 지나간 뒤에도 남는 냄새였다.
“판관님. 털신의 그을음과 진흙은 이동 흔적입니다. 그리고 약초 냄새가 남아 있습니다. 방치된 집 안에서 생길 냄새가 아닙니다.”
귀마가 말했다.
“누군가에게 옮겨진 뒤 묻었을 수도 있다. 아이를 버린 뒤 죄책감에 물건만 챙겼을 수도 있지.”
그 말에 박덕순의 어깨가 움찔했다.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물었다.
“아이를 내려놓은 적이 있습니까?”
박덕순의 얼굴이 무너졌다.
“한 번요. 담장 아래에서요. 숨이 막혀서… 아이가 숨을 쉬는지 보려고요.”
“그 뒤에는?”
“다시 업었습니다.”
그녀가 두 팔을 끌어안았다.
“울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무서웠습니다. 울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요.”
골목의 기억이 흔들렸다. 불길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검은 소매 하나가 높이 들렸다.
‘서문은 막혔다. 동쪽으로 돌아!’
박덕순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 사람이 길을 알려 줬어요. 그런데 제 팔을 잡았을 때 손목에 검은 표식이 있었어요. 세모처럼 꺾인 자국.”
이태가 내 옆에서 낮게 숨을 들이켰다.
귀마가 그를 노려보았다.
“보조자는 입을 다물어라.”
“표식이 아니라 방향이요.” 이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 사람은 동쪽을 가리키면서 발은 서문으로 향하고 있어요. 기억 속에서 말과 움직임이 어긋납니다.”
나는 그 어긋남을 놓치지 않았다.
“박덕순 님은 그 사람을 따라갔습니까?”
“아니요. 아이 발이 차가워서… 천막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서문으로 갔습니다.”
기억 속 골목 끝에 푸른 천막이 나타났다.
천막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아이를 안은 사람들이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없는 이름도 있었다. 박덕순은 그 줄의 끝에서 무릎을 꿇었다.
“여기였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또렷해졌다.
“아이를 받아 간 사람이 있었어요. 흰 앞치마는 아니었어요. 검은 팔토시를 끼고 손목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안고 안쪽으로 들어갔어요.”
“그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기억의 푸른 천막이 찢어진 종이처럼 흔들렸다.
“안에서 누가 제 이름을 물었어요. 그런데… 그다음이 없어요.”
귀마가 손을 들었다.
“충분하다. 이름도 얼굴도 없는 그림자다. 기억의 빈틈을 추측으로 채울 생각은 버려라.”
“채우지 않겠습니다.”
나는 법정 기록대 쪽으로 돌아섰다.
“서문 임시 진료소의 화재 당일 출입 장부와 구조 대기 기록을 제출해 주십시오.”
서기가 머뭇거렸다.
“명부 요약본에는 그런 시설이 없습니다.”
“요약본이 아니라 원기록을 말했습니다.”
내 손목의 팔찌가 차갑게 조여 왔다.
원기록 대조를 신청함.
기록대 뒤편의 검은 문이 열렸다. 잠시 후 낡은 장부 세 권과 봉인된 나무 상자가 판석 위로 옮겨졌다. 장부 표지에는 ‘서문 구호소 임시 출입’이라는 흐린 글씨가 남아 있었다.
방청석에서 낮은 술렁임이 일었다.
이태가 첫 장을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
“여기만 비어 있어요.”
서문 진료소의 장부는 화재가 난 날 한가운데가 통째로 찢겨 있었다. 앞 장에는 대기 인원 스물세 명이 적혀 있었고 뒷장에는 이송 완료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두 기록 사이에 있어야 할 이름과 시간은 없었다.
나는 박덕순의 명부를 장부 옆에 놓았다.
“명부상 박덕순 님은 해 질 무렵 아이를 방치한 뒤 도주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부의 대기 시작 시각은 그보다 앞입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었다.
“그리고 이송 완료 시각은 명부가 말하는 도주 시각과 겹칩니다. 박덕순 님이 아이를 업고 줄에 서 있었다는 기억과 시간대가 맞습니다.”
귀마의 가면 아래에서 금속성 목소리가 낮아졌다.
“찢긴 장부로 무엇을 입증하겠다는 거지?”
“찢긴 부분만으로는 아무것도 단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장부의 찢긴 면을 가리켰다.
“하지만 없던 일이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그 빈칸 앞뒤의 시간은 남아 있고 박덕순 님의 기록만 그 틈을 피해 방치로 적혀 있습니다.”
이태가 장부 가장자리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여기 결재 자국이 남아 있어요.”
그가 검게 번진 잉크 자국을 가리켰다.
“세모가 한쪽으로 꺾인 모양입니다. 도장이 찍힌 게 아니라 손목으로 눌렀을 때 생긴 자국 같아요.”
박덕순이 털신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 팔목에 있던 것과 같아요.”
법정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방청석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장부가 비면 사람도 사라지는 건가.”
귀마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목소리는 곧 끊겼다.
나는 귀마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기억 전체가 아니라 세 가지 사실만 임시 채택해 주십시오. 박덕순 님이 아이를 업고 서문 진료소로 이동한 사실. 진료소 앞 대기열에 도착한 사실. 그리고 그 구간의 원기록이 누락됐다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는 기억이 아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원기록으로 제출합니다. 기억은 첫째와 둘째만 뒷받침합니다.”
귀마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칼산의 칼날들이 침묵 속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박덕순은 눈을 감지 못한 채 털신만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는 이 결정 하나가 아이를 되돌려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아이를 버렸다는 문장 하나가 전부가 아니게 될 수는 있었다.
마침내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박덕순의 생전 기억 중 물건 및 원기록과 교차하는 부분을 임시 증거로 채택함.
박덕순의 입술이 떨렸다.
“도….”
“무엇이요?”
“아이 이름이요.”
그녀는 털신 한 짝을 가슴에 댔다.
“도… 그다음이 안 떠오릅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지금 붙잡은 한 음절까지 억지로 끌어내면 기억은 다시 상처가 될 수 있었다.
대신 찢긴 장부를 바라보았다.
검은 삼각 표식은 잉크가 아니라 누군가 남긴 손자국처럼 선명했다.
아이의 이름을 지운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먼저 기록에서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