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판(神判)의 마스터 변호인

5화: 보따리 속의 시간
임시 증거라는 붉은 글자가 사라진 뒤에도 법정의 공기는 풀리지 않았다.
박덕순은 털신 한 짝을 가슴에 안고 서 있었다. 아이 이름의 첫 음절을 겨우 되찾았을 뿐인데 그 한 음절은 오히려 더 깊은 빈칸을 만들었다.
귀마가 기록대를 내려다봤다.
“망자가 아이를 업고 이동했고 서문 진료소 대기열에 도착했다는 부분만 임시로 적겠다. 그 뒤는 없다. 얼굴 없는 자에게 아이를 맡겼다는 말은 증거가 아니다.”
“그래서 그 뒤를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찢긴 출입 장부를 가리켰다.
“대기 인원과 이송 완료 사이가 비어 있습니다. 그 구간의 이송표와 봉인 목록을 대조하겠습니다.”
귀마의 가면 아래에서 낮은 웃음이 흘렀다.
“찢긴 종이 하나로 법정을 더 붙들겠다는 거냐. 없는 기록은 없는 것이다.”
“아닙니다. 찢긴 기록은 누군가가 있었던 자리일 수 있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방청석의 망자들이 숨을 삼켰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고 누군가는 허공에 뜬 자기 명부를 바라보았다.
귀마가 손가락뼈로 판석을 두드렸다.
“이송표가 있었다 해도 박덕순의 아이와 연결할 수 없지. 이름조차 잊은 아이 아니냐.”
박덕순의 손이 떨렸다.
나는 그녀 앞에 무릎을 굽혔다.
“보따리 안을 다시 보여 주시겠습니까?”
박덕순은 한참 망설이다 매듭을 풀었다. 털신 아래에는 낡은 솜과 마른 쑥잎 몇 장이 있었다. 그 사이에는 불길에 그을린 천 조각도 끼어 있었다.
그녀가 안감을 더듬자 풀린 바느질 틈에서 손톱만 한 푸른 천이 떨어졌다.
서문 진료소 천막과 같은 빛이었다.
가장자리는 새카맣게 타 있었고 가운데에는 검은 먹물이 번져 있었다. 누군가 물에 젖은 글자를 급히 덧쓴 듯 글자는 흐렸지만 숫자 세 개만은 남아 있었다.
이태가 몸을 숙였다.
“서문. 칠. 삼.”
귀마가 즉시 손을 들었다.
“손대지 마라. 천 조각에 마음대로 뜻을 붙일 셈이냐.”
“뜻은 붙이지 않겠습니다.”
나는 천을 털신 옆 판석 위에 놓았다.
“서문 진료소가 대기자에게 표식을 줬는지 확인하면 됩니다. 있었다면 이 번호를 이송 기록과 맞춰 보겠습니다.”
서리가 장부를 다시 넘겼다. 종이를 넘기는 손끝이 이전보다 더 떨렸다.
“구호소 임시 규정에 대기 표식이 있습니다. 환자나 보호자가 군중 속에서 흩어지지 않도록 푸른 천을 손목에 묶습니다. 이송 때 회수해서 표식함에 넣고 명단과 대조합니다.”
“표식함은 어디에 보관합니까?”
“이송함 안입니다.”
귀마의 시선이 서리에게 꽂혔다.
서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장부 아래쪽을 짚었다.
“화재 당일 이송함 목록은 별도 봉인입니다.”
“그 봉인 목록을 제출해 주십시오.”
귀마가 차갑게 말했다.
“기각한다. 대기 표식은 사람을 세는 물건일 뿐이다.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까지 말해 주지는 않는다.”
“맞습니다.”
나는 푸른 천의 숫자를 가리켰다.
“그래서 이송 완료를 입증하자는 게 아닙니다. 박덕순 님이 아이를 방치하고 도주했다는 명부 문장과 이 표식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지 확인하자는 겁니다.”
“천 조각 하나가 무엇을 바꾸지?”
“번호가 아이에게 묶였고 회수 절차가 있었다면 아이는 적어도 누군가의 관리 아래 들어갔을 가능성이 생깁니다. 확인할 기록을 닫은 채 방치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박덕순이 푸른 천을 바라보았다.
“제가 그걸 떼어 냈어요.”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아이 손목에 묶어 줬는데 너무 젖었어요. 불씨가 날아와서 천 끝이 타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떼어 내서 제 보따리 안감에 넣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 사람에게 아이를 넘길 때 이걸 보여 줬어요. 아이 손목에 다시 묶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새 천을 줬습니다. 제 것은 젖어서 안 된다고요.”
“새 천에는 뭐가 적혀 있었습니까?”
박덕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글자는 못 봤어요. 아이가 제 옷깃을 잡았거든요.”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도윤아. 엄마가 금방 올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법정이 조용해졌다.
박덕순은 자기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도윤이었어요. 제 아이 이름이 도윤이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되 곧바로 기록대 쪽을 보았다. 기억 하나가 돌아왔다고 모든 빈칸이 메워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 떠오른 이름은 기록하겠습니다. 다만 이 표식이 도윤 군의 것이라고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박덕순이 눈물을 닦았다.
“압니다.”
“하지만 도윤 군이 당신 손을 떠난 뒤 어떤 절차에 들어갔는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녀는 푸른 천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름을 불렀다는 건 압니다. 버리고 도망친 게 아니에요.”
이태가 천 조각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먹물 냄새가 장부랑 같아요.”
그가 찢긴 장부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둘 다 약초 냄새 밑에 쇠 냄새가 있어요. 같은 인장 먹물이에요. 이 천은 글자가 찍힌 뒤 젖었고 장부는 넘길 때 같은 먹물이 가장자리에 묻었어요.”
귀마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감각 하나로 기록을 단정하지 마라.”
“단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천과 장부를 나란히 놓았다.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쓰였을 가능성을 확인하는 겁니다. 봉인 목록을 열어 서문-칠-삼이라는 번호가 존재했는지만 대조해 주십시오.”
팔찌가 차갑게 조여 왔다.
서문 임시 진료소 대기 표식과 화재 당일 이송함 봉인 목록의 대조를 신청함.
붉은 글자가 떠오르자 귀마의 눈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는 방청석을 한 번 훑었다. 망자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누구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미 장부의 찢긴 자리와 손안의 푸른 천을 모두 보았다.
귀마가 검은 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목록만이다. 봉인 안의 내용까지 보려 들면 즉시 중단한다.”
기록대 뒤편에서 나졸 둘이 나무 상자를 들고 나왔다. 상자는 작은 관처럼 길고 좁았다. 봉인 끈은 오래전에 끊겼지만 뚜껑 한가운데에는 검은 삼각 표식이 찍혀 있었다.
이태가 숨을 멈췄다.
“그 표식이에요.”
박덕순도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 손목에 있던 것과 같아요.”
귀마가 서둘러 말했다.
“승인 표식일 뿐이다. 사람의 정체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 점은 동의합니다.”
나는 상자를 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니 표식의 주인을 묻지 않겠습니다. 번호와 이송 분류만 보겠습니다.”
서리가 봉인 목록을 펼쳤다. 첫 줄부터 번호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서문-칠-일.
서문-칠-이.
그다음 줄은 먹물로 두 번 덧칠되어 있었다.
서문-칠-사.
칠-삼이 없었다.
귀마가 말했다.
“보아라. 빠진 번호 하나가 무슨 증거가 되지?”
나는 장부의 찢긴 자리와 목록의 덧칠을 번갈아 보았다.
“일반 이송 목록에는 없습니다.”
“그게 전부다.”
“아직 아닙니다.”
나는 서리에게 물었다.
“화재 당일 이송함은 하나뿐이었습니까?”
서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둘이었습니다.”
귀마의 고개가 아주 느리게 돌아갔다.
“서리.”
“기록에 있습니다.”
서리는 떨면서도 목록 뒷장을 펼쳤다. 앞장의 번호는 진료 이송함에 들어간 사람들의 것이었다. 뒷장에는 별도 인장이 찍힌 짧은 목록이 있었다.
“하나는 진료 이송함입니다. 다른 하나는 보호 전환 이송함입니다. 보호자와 떨어진 아이나 의식이 불분명한 자를 따로 분류합니다. 두 이송함의 수량도 장부에 적혀 있습니다.”
그가 글자를 짚었다.
“진료 이송함 스무 개. 보호 전환 이송함 세 개.”
박덕순의 손이 푸른 천을 움켜쥐었다.
“도윤이는 열이 높았어요. 제 손도 못 잡을 만큼 뜨거웠어요.”
“보호 전환은 구조를 뜻하지 않는다.”
귀마가 잘랐다.
“분류일 뿐이다. 그리고 그 상자는 명부 요약에 올리지 않는 봉인 기록이다.”
“바로 그 사실이 중요합니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박덕순 님 명부는 아이가 길 위에서 굶어 죽었다고 단정합니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아이가 보호 전환 절차에 들어갔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번호와 별도 이송함이 있습니다.”
귀마가 대꾸했다.
“가능성이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보전해야 합니다.”
나는 상자의 검은 삼각 표식을 가리켰다.
“도윤 군이 살았다고 선언하지 않겠습니다. 박덕순 님이 무죄라고도 아직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아이를 방치했다는 문장과 보호 전환 기록은 함께 놓고 검증해야 합니다.”
박덕순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녀에게도 같은 말을 들려주어야 했다.
“기록을 열면 듣고 싶지 않은 사실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곧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열어 주세요.”
박덕순은 푸른 천을 털신 위에 올려놓았다.
“도윤이가 어디에 갔는지 모른 채 죄인으로 남을 수는 없어요. 그 아이 이름까지 명부에서 사라지게 둘 수는 없어요.”
방청석의 누군가가 작게 말했다.
“내 이름도 저런 상자에 있었을까.”
귀마가 방청석을 노려보자 목소리는 사라졌다. 그러나 침묵은 전과 달랐다. 망자들의 눈에는 두려움 말고도 질문이 남아 있었다.
귀마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보호 전환 이송함의 봉인 경로와 서문-칠-삼의 분류 기록만 보전한다. 내용 열람은 허가하지 않는다. 이 사건의 죄목 심문은 계속한다.”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서문 임시 진료소 보호 전환 이송함의 봉인 경로 및 서문-칠-삼 분류 기록을 보전함.
박덕순의 어깨가 무너졌다. 그녀는 울면서도 푸른 천을 가슴에 눌렀다.
“도윤아.”
이번에는 이름이 끊기지 않았다.
서리가 봉인 목록 아래쪽을 더듬다가 굳었다.
“판관님. 봉인 경로의 최종 인계지가 적혀 있습니다.”
나는 그를 보았다.
“어딥니까?”
서리는 검은 먹물로 쓰인 글자를 읽었다.
“북문 기록고.”
이태가 상자의 표식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그런데 이미 누군가 열람 신청을 냈어요.”
그의 손끝이 목록 맨 아래의 새 붉은 도장을 가리켰다.
신청 시각은 내가 법정에서 입을 열기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