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신교의 수석 소믈리에

19화 천마의 혀
봉인 상자 안의 병은 조용했다.
조용해서 더 위험했다.
준영은 천련극문수에 적신 천을 새것으로 갈았다. 천을 걷을 때마다 병목 안쪽의 작은 검은 점이 드러났다. 말 모양처럼 보이는 그 자국은 유리에 묻은 것이 아니었다.
마개에서 흘러내린 것도 아니었다.
그 점이 지나간 자리에서만 향이 비었다.
과실 향도 산미도 적열마근의 매운 뿌리 냄새도 그 주위에서는 얇게 잘려 나갔다. 냄새가 약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자리처럼 비어 있었다.
"이 병은 올리지 않습니다."
준영이 말했다.
석덕의 손이 멈췄다. 문칠은 모래 주머니를 들고 있다가 입을 벌렸다. 위천은 기록판에 적던 글자를 끝내지 못했다.
다아만 바로 대답했다.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작업방 밖에서 호법 시종들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교주께서 오늘 밤 술을 원하십니다."
"거절하지 않습니다."
준영은 봉인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대신 마시게 하지 않습니다."
다아의 눈매가 차갑게 굳었다.
"그건 거절보다 나쁠 수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교주께서는 향만 맡으려고 기다리신 것이 아닙니다."
"술은 혀에 닿기 전에도 일을 합니다. 향이 코를 지나고 입술에 닿고 온도가 살갗을 건드립니다. 오늘은 거기까지만 봅니다."
문이 열렸다.
호법 시종 셋이 안으로 들어왔다. 가장 앞선 자가 봉인 상자를 보았다.
"술을 가져오라 하셨다."
준영이 상자 앞을 막아섰다.
"제가 함께 갑니다."
"명은 병만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이 병은 병만 가면 독입니다."
시종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소믈리에가 절차를 맡는다. 교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깨진 병이 아니라 술이다."
시종들은 다아를 보았다.
그녀의 입술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피빛이 남아 있었다. 병입 때 열기를 막아 낸 흔적이었다. 그래도 그녀의 검집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시종들이 길을 열었다.
천마의 내전으로 이어지는 복도는 이상할 만큼 냄새가 없었다.
보통 사람의 거처에는 아무리 비워도 먼지와 기름과 약재의 숨이 남는다. 그런데 그 길의 공기는 누군가가 냄새라는 층을 칼로 깎아 낸 듯했다.
준영은 봉인 상자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상자 안쪽에서 아주 희미한 냉기가 손잡이를 타고 올라왔다.
병목의 점이 깨어 있는 것이다.
천마는 침상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맨발로 서 있었다. 흰 의복은 어깨에서 반쯤 흘러내렸고 검은 머리는 등 뒤로 마른 강처럼 늘어졌다. 두 눈은 열려 있었으나 시선은 한곳에 머물지 못했다.
그가 웃었다.
"늦었다."
한 마디뿐인데 방 안의 촛불이 납작해졌다.
호법 시종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다아도 한쪽 무릎을 내렸다.
준영은 봉인 상자를 내려놓았다.
"늦게 올 만큼 아직 불완전합니다."
"불완전한 것을 가져왔느냐."
"완전하다고 속이는 것보다 낫습니다."
천마의 눈이 준영에게 고정됐다.
공기가 뜨거워졌다가 곧 차가워졌다. 열과 냉기가 서로의 목을 문 듯한 압박이 방 안을 메웠다.
준영은 병부터 꺼내지 않았다.
먼저 천련극문수에 적신 흰 천을 펼쳤다. 그 위에 가는 유리침 하나와 손가락 마디만 한 옥잔을 올렸다.
천마가 물었다.
"잔이 왜 작으냐."
"마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호법 시종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무례하다."
천마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시종의 목소리가 끊겼다.
"말하게 둬라."
준영은 봉인 상자를 열었다.
방 안의 온도가 반 걸음 내려갔다. 병 안의 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병목 안쪽의 검은 점만 아주 느리게 유리면을 긁듯 움직였다.
천마의 시선이 그 점으로 향했다.
그 순간 병 안의 푸른 냉기가 가늘게 떨었다.
준영은 그 반응을 마음속에 표시했다.
천마의 기운에 반응했다.
하지만 아직 따라간 것은 아니다.
"병을 열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을 가져왔느냐."
"병이 낸 땀입니다."
준영은 마개 위에 맺힌 아주 작은 물기를 유리침 끝으로 받았다. 술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적은 양이었다. 그는 그것을 옥잔 안쪽에 묻혔다.
향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서늘했다.
곧 어린 과실의 껍질 같은 향이 입천장을 스치는 듯 번졌다. 뒤이어 매실 발효액의 산미가 가늘게 살아났고 마지막에 적열마근의 열기가 실처럼 따라붙었다.
천마가 한 걸음 다가왔다.
다아의 손이 검집으로 갔다.
"물러서십시오."
준영이 낮게 말했다.
다아가 멈췄다.
천마는 잔을 들려고 했다.
준영이 잔 가장자리를 눌렀다.
"입술만입니다."
"내가 명하면 네 손은 없어질 수 있다."
"손이 없어져도 마시는 양은 늘지 않습니다."
방 안이 잠겼다.
천마는 준영의 손등을 보았다. 병입 때 생긴 작은 화상과 냉상이 같은 손 위에 남아 있었다.
"왜 막느냐."
"모르기 때문입니다."
"두려워서가 아니고?"
"두려워서 더 막습니다."
천마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좋다."
준영은 옥잔을 들어 천마의 입술 끝에 가까이 댔다.
액체가 흐르지는 않았다.
잔 안쪽에 묻은 향과 차가운 물기만 천마의 입술을 스쳤다.
천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처음에는 분노처럼 보였다.
그다음에는 통증이었다.
그는 숨을 들이쉬다 멈췄다. 혀끝이 입술 안쪽을 아주 느리게 눌렀다. 맛을 보려는 움직임이라기보다 잊고 있던 감각을 확인하는 반사에 가까웠다.
방 안의 열기가 한 치 물러났다.
천마가 낮게 말했다.
"소운."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소운이었나."
호법 시종 하나의 어깨가 떨렸다.
천마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목이 가늘었다. 잔을 들 때 손목을 떨었다. 내가 그 아이에게 잔을 던졌지."
목소리가 갑자기 늙어 있었다.
"죽였나."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준영은 잔을 뒤로 뺐다.
천마의 손이 따라왔다.
"더."
"안 됩니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었느냐."
"들었습니다."
"그러면 더 가져와라. 방금 열린 문이 닫히기 전에."
"문인지 상처인지 모릅니다."
천마의 기운이 폭발하듯 일었다.
촛불이 꺼졌다. 벽의 그림자가 바닥으로 엎어졌다.
다아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준영의 말이 먼저 나갔다.
다아는 이를 악물고 멈췄다. 멈추는 것만으로도 내상이 건드려졌는지 그녀의 입가에 피가 다시 맺혔다.
천마의 손은 준영의 목 앞에서 멈춰 있었다.
"네가 감히 내 기억을 붙잡고 값을 매기느냐."
"값을 매기는 게 아닙니다."
준영은 목 앞의 손을 보지 않았다.
병을 보았다.
"흐르는 것을 한 번에 들이부으면 기억도 사람도 같이 무너집니다. 좋은 술은 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돌아올 길을 남깁니다."
천마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때 병목 안쪽의 검은 점이 움직였다.
점은 병목을 한 바퀴 돌더니 길게 늘어났다. 말 모양이 잠깐 혀처럼 보였다. 그 주변에서 다시 향이 비었다.
준영은 즉시 말했다.
"방금 반응했습니다."
다아가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무향의 점입니다. 교주께서 이름을 떠올리자 움직였습니다."
천마의 눈이 병으로 향했다.
"내 안의 것이냐."
"아직 모릅니다."
"내 밖의 것이면."
"더더욱 마시면 안 됩니다."
천마는 오래 병을 보았다.
그의 숨이 조금씩 내려앉았다. 광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날뛰던 불길이 벽을 찾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타는 상태에 가까웠다.
"소운 말고 또 있었다."
천마가 말했다.
"하운. 명치 아래를 잡고 웃던 아이. 주방에서 늘 매운 뿌리를 훔치던 놈."
호법 시종의 이마가 바닥에 닿았다.
위천은 그제야 기록판을 들었다. 손이 떨려 글자가 비뚤어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천마는 자신의 손을 오래 보았다.
"내가 왜 잊었지."
그 말은 명령이 아니었다.
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척할 수는 없었다.
다아가 천마를 보았다. 그녀의 검집을 쥔 손이 조금씩 풀렸다. 교주는 사람을 도구로 쓰는 존재라고 그녀는 오래 믿어 왔다. 그런데 지금 그 사람은 자신이 도구로 만든 이들의 이름을 붙잡고 있었다.
천마가 고개를 들었다.
"준영."
"예."
"다음 방울은 언제냐."
"비교군 검사가 끝난 뒤입니다. 병목의 점과 첫 반응을 분리해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명하면 지금이다."
"그 명령은 듣지 않겠습니다."
호법 시종들이 숨을 멈췄다.
다아도 준영을 보았다.
천마는 웃었다. 이번 웃음은 방을 누르지 않았다. 피곤한 사람이 자기 손에 묻은 피를 처음 발견했을 때 흘리는 웃음이었다.
"내가 사람 말을 듣지 않으면 네가 나를 막겠다는 것이냐."
"예."
"술로?"
"기록과 절차로 막겠습니다."
잠시 뒤 천마가 눈을 감았다.
"그게 칼보다 오래 가겠군."
그는 봉인 상자를 가리켰다.
"가져가라. 내 손 닿는 곳에 두지 마라."
준영은 바로 병을 상자에 넣었다.
천마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내일 백화원주를 불러라."
준영의 손이 멈췄다.
"병을 공개하실 겁니까?"
"술은 공개하지 않는다. 네가 나를 굶긴 이유를 공개한다."
호법 시종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 중 하나는 이미 문 쪽으로 반 걸음 물러서 있었다. 명령이 끝나기도 전에 보고가 달려 나갈 준비였다.
천마는 그를 보지 않았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그 말은 너무 낮아서 처음에는 바닥에 떨어진 줄 알았다.
"괴물이 된 적은 많다. 하지만 지금 이 혀가 소운의 이름을 기억했다. 그러니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그는 다아를 보았다.
"너도 도구가 아니다."
다아의 손이 멎었다.
천마는 다시 준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를 사람으로 남게 해라."
준영은 대답하기 전에 봉인 상자 안의 병목을 보았다.
검은 점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주변의 무향 구역은 조금 더 넓어져 있었다.
성공은 아니었다.
실패도 아니었다.
문이 열린 것이었다.
그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직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준영은 봉인 상자를 닫았다.
그 순간 내전 밖에서 발소리가 이어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백화원주가 오고 있었다.
향을 모르는 자들이 술의 권한을 논하러 오는 발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