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신교의 수석 소믈리에

17화: 독이 든 충성
검은 침전은 냉기를 피해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설아가 손을 거두자 술 표면에 흩어졌던 점들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준우는 긴 집게로 잔을 밀폐함 안에 옮겼다.
“태운다.”
“무엇이 연기로 남는지 모릅니다.”
“그럼 땅에 묻어라.”
“같은 독이 다시 오면 또 모른 채 당합니다.”
설아의 눈이 차갑게 좁아졌다.
진소백은 이미 서쪽 교역소로 떠났다. 그가 배신할지 가족을 찾고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밀폐함 속 회색 가루뿐이었다.
천마의 잔을 노리고 들어온 독.
상대는 한 번 실패했다고 제조법까지 버리지는 않을 터였다.
“사람에게도 빙화주에도 대지 않겠습니다.”
준우는 빈 시험 접시들을 가리켰다.
“움직이는 조건만 찾겠습니다.”
설아는 한동안 밀폐함을 보았다.
“한 번이라도 뚜껑 밖으로 나오면 시험실째 얼린다.”
허락이었다.
준우는 장덕에게 밀폐함 둘을 더 만들게 했다. 판재 이음에는 밀랍을 두껍게 먹이고 투명하게 갈아 둔 얇은 수정판을 위에 끼웠다.
위철은 시험실 바닥의 배수 홈을 돌마개로 막았다. 노칠은 문밖에서 들어간 물건과 나온 물건의 수를 따로 적었다.
“독을 키우는 일에 우리 표식까지 남겨야 합니까?”
장덕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준우는 빈 장부 첫 줄에 제 이름부터 썼다.
“그래야 누가 무엇을 만졌는지 압니다. 원본은 이 방을 나가지 않습니다. 시험액은 한 번 쓴 뒤 모래로 덮어 함째 봉합니다.”
“술에 섞인 것은요?”
“사람도 짐승도 맛보지 않습니다.”
노칠은 그제야 준우의 이름 아래 먹점을 찍었다. 위철과 장덕도 차례로 표식을 보탰다.
첫 접시에는 물.
둘째에는 묽은 적양포 원주.
셋째에는 등잔기름을 담았다.
회색 독분은 바늘 끝보다 작게 나눴다. 원본 옥갑은 열자마자 다시 봉했다.
세 접시의 가루가 모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똑같아 보이는데요.”
노칠이 수정판 너머를 들여다봤다.
준우는 철편 네 개를 접시 가장자리에 걸었다. 같은 길이, 같은 무게였다.
세 철편 끝에는 봉혈산을 푼 밀랍을 아주 얇게 발랐다. 나머지 하나에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다.
봉혈산은 기운이 흐르는 길을 잠시 묶는다.
진기 그 자체는 아니어도 독이 반응할 길을 흉내 낼 수 있었다. 맨 철편은 독이 단순히 쇠를 좇는지 가려낼 대조였다.
무독 원주에도 봉혈산 철편 하나를 따로 걸었다.
“지금입니다.”
설아가 상자 밖에 손가락을 댔다.
냉기가 수정판과 접시 가장자리를 지나 철편으로 스며들었다.
물과 기름 속 침전은 움직이지 않았다.
원주 바닥의 검은 점만 떠올랐다.
점들은 맨 철편을 지나쳤다. 가느다란 가지처럼 갈라져 봉혈산이 발린 부분마다 붙었다.
무독 원주의 철편에는 서리가 고르게 이어졌다.
독분이 든 원주에서는 철편 위의 서리가 군데군데 끊겼다.
한 줄로 흘러야 할 냉기가 조각난 것이다.
설아가 손을 떼었다.
“냉기를 싫어하는 게 아니군.”
“기운이 흐르는 자리를 찾습니다. 붙은 다음 길을 끊고요.”
독분은 물에서 잠잠했다. 술이 독을 녹인 것도 아니었다.
술은 가루를 잘게 풀어 기운이 흐르는 곳까지 운반했다.
밀사가 굳이 천마의 술잔을 원한 이유였다.
준우는 새 상자를 준비했다.
이번에는 작은 이중 접시였다. 안쪽에는 같은 원주 두 잔을 놓고 바깥 접시 한쪽에 적염마근 조각을 넣었다.
적염마근이 술에 닿지는 않았다.
바깥에서 열기만 전달했다.
“그것까지 쓸 셈이냐?”
“천마신공을 그대로 시험할 수는 없으니까요.”
무독 대조 잔에는 잔잔한 붉은 아지랑이가 고르게 번졌다.
독분이 든 잔은 달랐다.
열기가 검은 침전을 피해 가장자리로 밀렸다. 갈라진 흐름은 사라지지 않고 서로 부딪치다가 한곳으로 몰렸다.
딱.
안쪽 접시에 실금이 갔다.
설아가 즉시 기운을 거두었다. 준우는 모래 주머니를 떨어뜨려 상자 안의 접시를 덮었다.
유출은 없었다.
그러나 실금 주변은 검붉게 변해 있었다.
“산공독.”
설아가 낮게 말했다.
“내공을 흩뜨려 무인을 폐인으로 만드는 독을 그렇게 부른다. 하지만 저건 다르다.”
“기운을 없애지 않습니다.”
“갈 길을 막고 한곳으로 몰아넣지.”
천마신공의 마기는 가만히 있어도 서로 물어뜯을 만큼 거칠었다.
길이 끊긴 마기가 단전으로 되밀리면 독이 천마를 죽이는 게 아니었다.
천마의 힘이 천마의 몸을 찢는다.
진소백이 전한 말 그대로였다.
설아의 손이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솟았다. 곧이어 그녀의 다른 손이 명치 아래를 짧게 눌렀다.
밤을 꼬박 새운 데다 냉기를 연달아 쓴 탓이었다.
준우가 미지근한 청련근 물을 내밀었다.
“다음 시험은 제가 준비할 때까지 쉬십시오.”
“이걸 만든 자를 찾으면 혀부터 뽑겠다.”
설아는 잔을 받아 들면서도 시선을 독분에서 떼지 않았다.
“찾기 전까지는 혀가 아니라 방법이 필요합니다.”
“방법?”
“독이 들어온 뒤 알아채면 늦습니다. 들어와도 버티는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준우는 첫 시험 잔을 보았다.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가 났다.
톡.
검은 침전 주변에서 작은 기포 하나가 올라왔다.
다른 효모는 독분을 넣은 직후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검은 침전과 맞닿은 붉은 찌꺼기 한 조각만 다시 부풀고 있었다.
살아남은 효모였다.
“독을 키우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독은 더 넣지 않습니다.”
준우는 가느다란 유리관을 불에 달군 뒤 식혔다.
“살아남은 것만 옮깁니다.”
미온풍 발효 구역의 가장 끝 칸이 비워졌다.
준우는 적양포 원주를 끓였다가 식힌 세 병을 준비했다. 첫 병에는 평범한 효모 찌꺼기를 둘째에는 열로 죽인 효모를 셋째에는 시험 잔에서 기포를 만든 붉은 찌꺼기만 옮겼다.
독분 원본은 폐쇄 시험실을 나오지 않았다.
세 병은 서로 다른 나무 상자에 들어갔다. 상자 사이에는 젖은 모래를 채웠고 각각 다른 색 끈으로 봉했다.
“무슨 차이를 보는 거요?”
장덕이 물었다.
“한 번 운 좋게 살아남았는지 살아남는 성질을 이어 가는지 봅니다.”
첫 반 시진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한 시진 뒤 평범한 효모 병에서 기포가 올랐다. 죽은 효모 병은 잠잠했다.
독에 노출됐던 효모 병은 가장 늦었다.
두 시진이 지나자 바닥에서 가느다란 기포가 이어졌다.
쇠를 말린 냄새 끝에 시큼한 적양포 향이 돌아왔다.
준우는 그 병의 윗부분 한 방울만 새 원주로 옮겼다.
첫 번째 이식 시각을 노칠이 적었다. 위철이 봉인을 확인한 뒤 문을 잠갔다.
밤이 깊어지자 장덕과 노칠이 번갈아 눈을 붙였다. 설아는 쉬라는 말을 듣지 않았지만 적어도 따뜻한 죽 한 그릇은 비웠다.
두 번째 병의 기포는 자정을 넘긴 뒤에야 생겼다.
준우는 다시 한 방울을 세 번째 원주로 옮겼다.
그 뒤에는 누구도 상자를 열지 않았다. 수정판에 맺힌 습기와 기포 수만 밖에서 기록했다.
동쪽 환기구가 희게 밝아질 무렵 세 번째 병 바닥에서도 기포가 줄지어 올랐다.
원본 독분을 더 넣지 않았는데 살아남는 성질이 이어졌다.
노칠이 장부에 세 개의 동그라미를 그렸다.
“독을 먹은 놈의 자식도 독을 견딘다는 겁니까?”
“아직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준우는 병 입구를 다시 불로 소독했다.
“다만 세 번 옮겨도 같은 향과 기포가 남았습니다. 씨로 쓸 가치는 있습니다.”
설아가 물었다.
“교주의 술에 넣을 셈이냐?”
“아닙니다.”
대답은 즉시 나왔다.
살아남았다는 것과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전혀 달랐다.
독의 흔적을 품고 있을 수도 있었다. 술 안에서는 얌전하다가 마기와 닿는 순간 산공독처럼 움직일 수도 있었다.
준우는 작은 병에 붉은 밀랍을 세 겹 둘렀다.
병목에는 장덕의 세모 표식, 위철의 눈금, 노칠의 먹점을 모두 남겼다.
“이름은 무엇으로 적을까요?”
노칠이 물었다.
준우는 병 안의 기포를 바라봤다.
독의 쇠 냄새를 밀어내고 살아남은 발효 향.
“독향 효모.”
“해독제입니까?”
“아직은 독 옆에서 살아남은 효모일 뿐입니다.”
준우는 그 문장까지 장부에 적게 했다.
독향 효모는 원본 독분과 다른 냉기 칸에 봉인했다. 빙화주 원액 청 일 번과 청 이 번의 봉인함도 열지 않았다.
대신 남은 적양포 시험 원주 한 병에 독향 효모의 세 번째 씨를 넣었다.
한쪽에는 설빙석 냉기를 반대쪽에는 적염마근의 간접 열기를 댔다.
빙화주의 두 기운을 흉내 낸 시험이었다.
처음에는 기포가 냉기 반대편으로 몰렸다.
이내 가운데로 돌아왔다.
차가운 향과 따뜻한 과실 향이 병 입구에서 겹쳤다. 어느 한쪽도 다른 쪽을 밀어내지 않았다.
설아의 굳은 손이 조금 풀렸다.
“가능성은 있군.”
“가능성만 있습니다.”
준우는 시험 병마저 봉인했다.
그때 중앙 숙성 구역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딱.
장덕이 고개를 들었다.
“방금 그건…….”
두 사람이 동시에 뛰었다.
병입을 기다리던 빙화주 시험 술독의 몸통에 머리카락보다 가는 선이 나 있었다.
선 틈에서는 차가운 김이 흘렀다.
그런데 술독 바닥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준우가 손을 뻗기도 전에 균열이 한 치 더 길어졌다.
딱.
냉기와 화기가 술독 안에서 서로를 밀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