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한 남편이 예언을 속이려 나를 미워한 줄 몰랐다

2화: 무심한 반응
마차가 발렌티노 대공저의 긴 담장을 벗어나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가방 안쪽 주머니에는 이혼 서류가 들어 있었다. 종이 한 장이 사람의 삶을 이렇게 가볍게도, 무겁게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카시안 데 발렌티노의 서명은 단정했고, 마지막까지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오히려 쉬웠다.
그가 망설였더라면, 아주 조금이라도 붙잡는 기색을 보였더라면, 나는 내 결심을 다시 설명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늘 그랬듯 무심했다. 서류를 받고, 서명하고, 나를 보내주었다.
"부인, 곧 동문 거리로 들어섭니다."
"부인이 아닙니다."
나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로제 양이라고 불러주세요."
마부가 어색하게 고삐를 고쳐 잡았다.
"예, 로제 양."
그 호칭이 낯설게 귓가에 감겼다. 누구의 아내도 아닌 이름. 오래전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이름이 다시 손에 들어왔다.
그때, 마차 뒤편으로 흐릿한 색이 번졌다.
검붉은색.
분노와 탐욕이 섞인 색이었다. 나는 창틀을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사람은 표정을 숨길 수 있어도 감정의 색까지 숨기지는 못한다. 내 능력은 늘 그렇게 나를 괴롭혔고, 때로는 살렸다.
"다음 모퉁이에서 곧장 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돌아주세요."
"하지만 그쪽은 돌아가는 길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마차가 방향을 틀었다. 덜컹, 바퀴가 젖은 돌바닥에 부딪히며 흔들렸다. 뒤따르던 검붉은 색도 잠시 멀어지는 듯하더니 곧 다시 붙었다.
우연은 아니었다.
대공저를 나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꼬리가 붙었다. 사교계의 구경꾼일 수도, 몰락한 로제 가문에 아직 남은 빚이 있다고 믿는 채권자의 심부름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색깔이 지나치게 탁했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탐욕만으로는 저렇게 검게 가라앉지 않는다.
"로제 양, 혹시 불편하십니까?"
"아니요. 속도만 조금 올려주세요."
마부는 더 묻지 않았다. 낡은 마차가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햇빛이 지붕 사이로 잘게 부서졌고, 시장의 소음이 멀어졌다.
그 순간 뒤편에서 짧은 금속음이 들렸다.
챙.
뒤이어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 그리고 침묵.
마부가 놀라 뒤를 돌아보려 했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멈추지 마세요."
검붉은 색이 끊어졌다. 마치 칼로 잘라낸 실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아주 짧은 순간, 마차 지붕 위를 스치는 무채색의 그림자가 보였다.
카시안의 색과 비슷했다.
나는 곧장 그 생각을 지웠다. 그럴 리 없었다. 그는 나를 붙잡지도 않았고,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의 무심함은 조금 전 서류 위에 남은 서명처럼 명백했다.
그러니 내가 본 것은 착각이어야 했다.
같은 시각, 발렌티노 대공저의 집무실에는 피 냄새가 없었다.
카시안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 냄새는 신전의 눈을 부른다. 비명은 소문을 만들고, 소문은 예언의 먹이가 된다.
"첫 번째 추적자는 처리했습니다."
검은 복면의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카시안은 책상 위에 펼쳐진 수도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에블린의 새 거처가 있는 골목에는 붉은 핀이 꽂혀 있었다. 그 주변으로 신전 소유의 약방, 헌금소, 고아원이 촘촘히 표시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믿고 있었다.
그 믿음만큼은 지켜주고 싶었다.
"흔적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신전 쪽 표식이 하나 떨어졌습니다. 회수 중입니다."
카시안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짓눌렀다.
"회수가 늦었다."
사내의 고개가 더 낮아졌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는 것으로 끝낼 수 있는 죄였으면 편했겠지."
카시안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낮았다. 하지만 창밖을 향한 눈동자만은 한순간 무너졌다. 에블린이 탄 마차가 사라진 방향. 그곳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 될 정도로 뜨거웠다.
그는 손등을 움켜쥐었다. 피부 아래로 검은 문양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신전이 예언을 내린 날, 그의 몸에 박힌 낙인. 사랑을 감지하면 조여오는 쇠사슬.
"대공 전하."
바르텔이 조용히 들어와 봉인된 편지를 내밀었다.
"태양 신전의 부제관이 보낸 것입니다. '계약 종료를 축하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카시안은 편지를 뜯지 않고 촛불 위에 얹었다. 황금빛 봉인이 녹으며 독한 향을 냈다. 신전의 축복문에는 감시 주문이 섞여 있을 때가 많았다.
"축하는 필요 없다."
재가 된 편지는 은빛 가루를 남기며 오그라들었다. 카시안은 그것을 칼끝으로 눌러 완전히 뭉갰다.
"그녀의 거처에 보내는 물자는 세 번 손을 바꿔라. 발렌티노의 이름이 닿아서는 안 된다. 로제 상회가 자기 힘으로 거래를 따낸 것처럼 만들어."
"예."
"오늘 밤 문 앞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게 해. 그녀가 눈치채면 실패다."
카시안은 잠시 말을 멈췄다. 에블린은 생각보다 훨씬 예리했다. 그가 지난 3년 동안 지키려고 했던 거리도, 무심한 척 던졌던 말들도, 그녀는 상처로 받아들이면서도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멀리 밀어내야 했다.
그녀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만큼.
그녀가 자신을 증오해도 좋으니 살아남을 만큼.
"신전의 두 번째 꼬리는."
"이미 거처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카시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럼 늦지 마라."
새 거처는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다.
회색 벽돌로 지어진 이층집. 아래층은 창고와 작은 응접실, 위층은 침실과 작업실로 쓸 수 있었다. 발렌티노 대공저의 방 하나보다 좁았지만, 나는 문고리를 잡는 순간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이곳에서는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됐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문을 연 것은 라일라였다. 로제 가문이 몰락하기 전부터 나를 따르던 하녀였고, 지난 3년 동안 밖에서 나의 일을 도와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서 번지는 색은 따뜻한 녹색이었다. 걱정과 반가움이 뒤섞인 색.
"정말 나오셨군요."
"계약이 끝났으니까."
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라일라는 내 얼굴을 살피더니 울음을 삼키듯 입술을 깨물었다.
"전하께서 순순히 보내주셨습니까?"
"서류에 바로 서명하셨어."
말하고 나니 이상할 정도로 담담했다. 라일라의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 장부부터 보자."
응접실의 낡은 탁자 위에는 내가 부탁해둔 물건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북부에서 들어온 말린 약초, 향차 견본, 작은 유리병에 담긴 진정제 원료. 그리고 황실 별궁 하녀장에게 보낼 납품 제안서 초안.
로제 상회.
아직 간판도 달지 못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대공부인이라는 호칭보다 훨씬 값졌다.
"하녀장 쪽 답은?"
"내일 오전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별궁 납품은 신전 약방과 오래 거래해온 터라 쉽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쉽지 않으니까 기회가 있는 거야. 신전 약방은 품질보다 축복문 값을 받지. 우리는 실제로 잠이 오는 차를 팔면 돼."
라일라가 처음으로 웃었다.
"아가씨답습니다."
나는 견본 봉투를 열어 향을 맡았다. 쌉싸래한 약초 냄새 사이로 은은한 꽃향이 올라왔다. 대공저에서는 한 번도 맡지 못한 냄새였다. 그곳의 모든 것은 비싸고 완벽했지만, 숨 쉴 틈이 없었다.
여기는 달랐다.
삐걱대는 바닥, 맞지 않는 창틀, 어딘가 새는 벽난로. 불완전했지만 내 것이었다.
"오늘 밤 안으로 제안서를 고치자. 별궁 사람들이 원하는 건 고상한 문장이 아니라 확실한 효능이야. 하녀들이 밤새 귀족들의 변덕을 견디려면 잠이 얼마나 귀한지 누구보다 잘 알 테니까."
"그럼 가격표도 낮출까요?"
"아니. 첫 거래부터 싸구려로 보이면 오래 못 가. 대신 첫 납품분에 작은 휴대용 향낭을 붙여. 사용해보면 다시 찾게 될 거야."
나는 빈 종이를 당겨 문장을 고쳤다. '태양의 축복을 받은 숙면'이라는 표현을 지우고, 그 자리에 '검증된 북부 약초 배합'이라고 적었다. 신전의 문구에 기대지 않고도 팔리는 물건을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발렌티노의 이름 없이 살아남는 첫 증명이 될 테니까.
말을 이어가던 순간, 바깥에서 낮은 비명이 들렸다.
아주 짧았다.
라일라가 굳었다. 나 역시 숨을 멈췄다. 곧이어 벽 너머에서 무언가 끌리는 소리가 났고,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아니."
나는 촛대를 들었다.
"같이 가."
문밖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달빛이 축축한 돌바닥 위에 희미하게 고여 있었다. 비명도, 발소리도, 싸움의 흔적도 남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나는 문턱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검은 깃털 장식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평범한 새 깃털이 아니었다. 얇은 금속 심지가 박혀 있었고, 끝부분에는 발렌티노 기사단의 암호처럼 보이는 작은 홈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지 않았다. 대신 그 옆에 있는 조각을 보았다.
은색 태양 문양.
신전의 하급 사제들이 망토 고리에 다는 장식이었다. 반쯤 부러진 그것에서 희미한 감정의 잔향이 피어올랐다. 검붉은색. 아까 마차 뒤를 따라오던 색과 같았다.
돌바닥에는 젖은 발자국이 세 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네 번째 발자국은 없었다.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공중으로 사라진 것처럼, 흔적이 갑자기 끊겨 있었다.
"아가씨, 이게 왜 여기에……."
"라일라."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차갑게 나왔다.
"오늘 밤 창문마다 빗장을 걸어. 그리고 내일 별궁에 보낼 사람은 네가 직접 고르지 마. 내가 고를게."
"혹시 대공저에서 사람을 보낸 걸까요?"
나는 검은 깃털과 은색 태양 조각을 번갈아 보았다.
카시안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 집무실에서 서류에 서명하던 무심한 손. 내 상단 이야기를 듣고 희미하게 찌푸려지던 미간. 그리고 끝내 나를 붙잡지 않던 차가운 눈.
"그럴 리 없어."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확신은 이상하게 흔들렸다.
발렌티노의 무채색과 닮은 그림자가 마차 위를 스쳤던 순간이 계속 떠올랐다. 그러나 그가 나를 지킬 이유가 없었다. 이유가 있었다면, 3년 동안 한 번쯤은 내게 따뜻하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은색 태양 조각을 손수건으로 감싸 집 안으로 가져왔다.
자유가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 그것을 더럽히려 했다. 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였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내 새 삶에 손을 뻗었는지 알아내는 것.
그날 밤, 나는 이혼 서류 옆에 신전의 부러진 문양을 나란히 놓았다.
하나는 끝난 인연의 증거였고, 다른 하나는 이제 막 시작된 위협의 증거였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발렌티노 대공저를 벗어났다고 해서, 전쟁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