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한 남편이 예언을 속이려 나를 미워한 줄 몰랐다

1화: 계약의 마침표
침묵은 때로 비명보다 더 날카롭게 고막을 찔렀다.
발렌티노 대공저에서의 3년은 내게 그런 침묵의 연속이었다. 화려하지만 온기 없는 대리석 벽, 매일 아침 차갑게 식은 채 제공되는 식사, 그리고 단 한 번도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던 남편.
제국의 북부를 지키는 철혈의 대공, 카시안 데 발렌티노. 그와 나의 결혼은 철저한 계약의 산물이었다. 몰락한 로제 자작가의 빚을 갚아주는 대가로, 나는 3년 동안 그의 '방패'가 되어주기로 했다. 그가 사교계의 귀찮은 혼담을 피하기 위한 허울뿐인 아내 말이다.
"드디어 오늘이군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낯설 만큼 단정했다. 몰락한 로제 자작가의 딸로 이 저택에 처음 들어올 때 입었던, 이제는 유행이 한참 지난 남색 드레스. 소매 끝동이 살짝 닳았지만, 정성껏 다림질한 덕에 기품은 잃지 않았다.
대공부인으로서 지급받았던 수많은 보석과 화려한 비단 옷들은 손 하나 대지 않고 벽장에 그대로 두었다. 금빛 실로 수를 놓은 드레스도, 남해의 진주로 만든 목걸이도 내 것이 아니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탐내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나는 손끝으로 눈동자를 살짝 눌렀다 다잡았다.
남들에게는 없는 나의 기이한 능력. 나는 타인의 감정을 색깔로 읽을 수 있었다. 분노는 타오르는 붉은색, 슬픔은 질척한 진흙빛, 환희는 눈부신 금색. 하지만 지난 3년간 내가 이 저택에서 본 색깔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무채색.
죽은 듯이 고요하고, 어떤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회색. 그것은 남편인 카시안 데 발렌티노의 색이었고, 동시에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 그 자체였다. 그는 나를 미워하지도,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에게 나는 저택 구석에 놓인 가구 하나보다 못한 존재였다.
"부인, 짐 정리는 모두 끝났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시녀의 목소리에도 색깔이 묻어 있었다. 옅은 갈색. 귀찮음과 약간의 경멸이 뒤섞인 무관심의 색. 그녀는 내가 이 저택을 나가는 것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작별 인사조차 생략한 채 문가에 서 있었다. 발렌티노의 하인들은 영리했다. 주인이 누구를 아끼고 누구를 무시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챘고, 나는 그들의 서열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었다.
"그래, 고생했어. 이 상자들만 마차에 실어주면 돼."
나는 덤덤하게 대답하며 작은 가죽 가방을 들었다. 3년의 대가로 내가 챙긴 것은 오직 내가 지난 세월 동안 잠을 줄여가며 몰래 벌어들인 작은 사업의 자금과, 처음 올 때 가져왔던 낡은 일기장 몇 권뿐이었다.
방을 나서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침실을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보냈던 수많은 밤. 혹시나 그가 술에 취해서라도, 혹은 서류 더미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이곳을 찾아오지 않을까 문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어린 날의 내가 그곳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결혼 초기의 나는 어리석게도 그에게서 온기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소녀는 없다. 3년이라는 시간은 기대를 포기로, 포기를 무관심으로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는 평소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구두 굽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마주치는 하인들은 예의를 갖추는 척 고개를 숙였지만, 그들의 어깨 너머로 흘러나오는 색깔들은 제각각이었다. 짙은 보라색의 조롱, 노란색의 호기심.
'대공에게 버림받고 쫓겨나는 공작부인.'
그것이 사교계와 이 저택 사람들이 나를 정의하는 수식어였다. 나는 그 시선들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걸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살짝 들어 올린 채. 몰락했다 할지라도 로제 가문의 자존심까지 버린 적은 없었다. 오히려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복도 곳곳에는 태양 신전을 상징하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신전의 예언이 제국을 지배하는 이 땅에서, 발렌티노 공작가는 늘 신전의 가장 큰 감시 대상이었다. 하인들 틈바구니에도 신전의 눈이 섞여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일까, 이 저택은 늘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집무실 앞, 거대한 흑철로 된 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발렌티노 가문의 문장인 굶주린 늑대가 나를 노려보는 듯했다.
"대공 전하를 뵙겠습니다."
나의 말에 집사 바르텔이 무표정하게 문을 열었다.
"들어가십시오, 부인.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방 안은 서늘했다. 창문을 모두 닫아놓은 탓인지, 아니면 카시안 그 자체가 내뿜는 냉기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책상 너머,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남자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과 얼음 조각처럼 날카로운 이목구비.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여전히 무심했다. 햇빛조차 차단된 그의 집무실은 마치 시간이 멈춘 공간 같았다.
"무슨 일이지? 바쁠 텐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내뱉는 목소리는 낮고 낮았다. 나는 미리 준비해온 서류를 그의 책상 위에 정갈하게 내려놓았다.
"오늘이 계약 종료일입니다, 전하."
그제야 카시안의 펜촉이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짙은 감청색 눈동자. 그 안에는 역시나 아무런 색깔도 없었다. 그저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고요한 무채색만이 가득했다. 3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시선이었다.
"그래서?"
"계약서 제7조 4항에 따라, 이혼 서류를 가져왔습니다. 이미 제 서명은 마쳤으니 전하께서도 끝을 맺어주셨으면 합니다."
카시안의 시선이 책상 위의 서류로 향했다. 한동안 방 안에는 시계 초침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1초, 2초.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심장박동이 빨라졌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단 한 번이라도 나를 붙잡아주길 바랐을까? 아니, 그건 예전에 이미 버린 기대였다.
"……준비가 빠르군."
그가 짧게 중얼거리며 펜을 들었다. 망설임 없는 손길이었다. 서류 위에 그의 필체가 거침없이 새겨지는 것을 보며, 나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미련일까. 아니면 3년이라는 세월이 주는 허무함일까. 종이 위에 사그락거리며 새겨지는 소리가 마치 우리의 인연이 끊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걸로 끝인가?"
사인을 마친 그가 서류를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정중히 가방에 넣었다.
"네, 전하. 지난 3년간 로제 가문을 후원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가문의 빚을 모두 청산하고 명예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가서 뭘 할 생각이지? 몰락한 가문의 여인이 연고도 없는 곳에서 혼자 살아남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을 텐데. 차라리 발렌티노의 별장 하나를 내어주마."
걱정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시혜에 가까운 말투였다.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미 작은 거처는 마련해두었습니다. 그동안 틈틈이 준비해온 상단 사업도 곧 시작할 예정이니, 굶어 죽지는 않을 겁니다."
카시안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의 무채색 눈동자에 처음으로 아주 작은 파동이 이는 것 같았다.
"상단? 언제 그런 걸 준비했지? 내 허락도 없이……."
"전하께서 저를 완벽하게 방치해주신 덕분이죠. 덕분에 저택의 서재를 마음껏 이용하고, 시장의 흐름을 읽을 시간이 아주 많았거든요. 전하의 무관심이 제게는 가장 큰 기회였습니다."
비꼬는 의도는 없었지만, 말에 뼈가 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카시안은 대답 대신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펜을 쥔 그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것이 그가 내게 보내는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더 이상 볼일 없으니 나가라는 뜻.
나는 우아하게 커트시를 해 보이고는 뒤를 돌았다. 집무실을 나서는 순간까지,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저택 정문에는 낡은 마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화려한 마차가 아닌, 내가 직접 고용한 외부 상단의 마차였다.
짐을 싣는 마부의 손길을 도우며, 나는 마지막으로 발렌티노 대공저를 올려다보았다. 3년 전, 두려움과 기대를 안고 들어왔던 그날처럼 하늘은 눈부시게 맑았다. 그때의 나는 사랑받고 싶어 했던 어린 신부였지만, 지금의 나는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독립된 인간이었다.
"부인, 출발할까요?"
"네, 가주세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곳이니까요."
마차에 오르자마자 덜컹거리는 진동과 함께 저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창밖을 보지 않았다. 대신 가방 속에 든 이혼 서류를 손으로 꼭 쥐었다. 이제 나는 자유다. 누구의 부인도 아닌, 에블린 폰 로제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비록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내 손으로 직접 일구어갈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탄 마차가 성문을 벗어나는 순간, 집무실 창가에 서서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나를 바라보던 카시안의 모습을.
그가 서 있던 자리, 책상 위에는 그가 움켜쥐었던 펜대가 산산조각이 난 채 흩어져 있었다는 것을. 그의 손등에는 분노가 아닌,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의 핏줄이 돋아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에블린."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이름은 비명보다 더 처절한 통곡이었지만, 이미 멀어진 마차 소리에 묻혀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카시안은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곳에는 신전의 예언이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공작이 사랑하는 여인은 그의 손에 죽으리라.]
그는 3년 동안 그 저주를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를 무채색으로 칠했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 그녀를 증오하는 연기를 해야만 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자신의 감정이 차가운 회색이 될 때까지, 그는 매일 밤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는 고통을 참아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견디면 됐는데. 신전의 감시가 느슨해질 때까지만이라도……."
그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무채색이 아닌, 깊고 진한 보라색의 애정 어린 슬픔이었다. 에블린은 보지 못한, 그의 진짜 영혼의 색깔이었다.
"가라, 에블린. 나에게서 멀리…… 죽음의 신이 너를 찾지 못할 곳으로."
카시안이 벽을 짚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그림자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부인을 지켜라. 단 한 톨의 먼지도 그녀에게 닿지 않게 해. 그녀가 마련했다는 거처와 상단도 비밀리에 후원해라. 그녀가 자신이 해냈다고 믿게 만들면서."
그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신전에서 보낸 쥐새끼들이 움직이는지 감시해라. 오늘 밤, 내 아내를 죽이려 드는 예언의 추종자들에게 피의 숙청이 무엇인지 보여줄 것이다."
마차는 이미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지만, 이제 막 시작된 전쟁의 서막은 발렌티노 대공저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에블린은 해방을 꿈꿨지만, 카시안은 이제 그녀를 지키기 위해 진짜 괴물이 될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