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2화: 갈고리 골짜기의 첫 제단
갈고리 골짜기에 닿았을 때 카일의 주머니에는 동전 열세 닢만 남아 있었다.
수도에서 빠져나오는 데 이틀이 걸렸다. 하수로의 냄새는 외투에 배었고 발뒤꿈치는 물집이 터져 피가 났다. 그는 길가의 도랑물로 얼굴을 씻은 뒤 수배 전단에 그려졌을 법한 표정을 지웠다.
사기꾼은 얼굴보다 걸음걸이로 먼저 들킨다. 쫓기는 사람은 자꾸 뒤를 돌아본다. 돈이 떨어진 사람은 숙소 간판을 오래 본다.
카일은 어느 쪽도 하지 않았다.
골짜기는 지도에 그려진 것보다 좁았다. 양쪽 절벽은 해가 지기도 전에 길을 어둡게 만들었다. 움푹 팬 길을 따라 낡은 수레가 한 대 내려오고 있었다. 수레 위에는 젖은 광석 자루 대신 창백한 광부 하나가 누워 있었다.
광부가 몸을 일으키려다 검은 물을 토했다.
수레를 몰던 노인이 고삐를 놓쳤다. 말이 놀라 뒷걸음쳤고 광부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길가에서 비명을 질렀다.
카일은 본능처럼 한 발 물러났다. 검은 물은 흙을 적시지 않았다. 물웅덩이 가장자리에 박힌 녹슨 못을 만나자 못의 표면이 서서히 가루가 됐다.
가슴 안쪽의 빈 방이 미세하게 떨렸다.
―배고프다.
별의 목소리는 귀가 아니라 갈비뼈 사이에서 들렸다.
‘저걸 먹을 수 있다는 말은 하지 마.’
―저 안에는 마력이 있다. 썩은 약속의 냄새도.
카일은 대답 대신 외투 깃을 끌어올렸다. 길가에 모인 사람들이 그를 보았다. 낯선 행색에 수도식 외투를 걸친 남자. 이 마을에서는 그 자체로 의심받을 만한 모습이었다.
“뭘 봐.” 수레 곁의 사내가 거칠게 말했다. “구경거리는 저쪽에 없어.”
“구경하러 온 건 아닙니다.” 카일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잠깐 몸을 녹일 곳을 찾는 중이라서요.”
“여긴 여관도 없어. 돌아가.”
돌아갈 길은 없었다. 카일은 그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골짜기 안쪽에서는 종소리가 세 번 울렸다. 사람들은 수레의 광부를 들어 올려 낮은 판잣집으로 옮겼다. 카일은 아무도 보지 않는 틈에 검은 물이 흐른 자국을 살폈다. 자국은 광산 쪽으로 이어졌다. 막혀 있어야 할 갱도 입구 아래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새고 있었다.
그 앞에는 흰 천을 두른 돌기둥이 서 있었다. 천에는 금빛 태양 문양이 찍혀 있었지만 비와 먼지에 반쯤 지워져 있었다.
“신전 사람들이 세운 봉인입니까?”
뒤에서 낮고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카일이 고개를 돌리자 검은 수염이 듬성듬성 난 남자가 서 있었다. 손등은 광석 가루로 갈라져 있었고 손가락 두 개에는 새 붕대가 감겨 있었다.
“외지인이 그걸 왜 묻지?”
“봉인이라면 저렇게 물이 새는 건 좋지 않아 보이니까요.”
사내는 비웃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멀리서 아이 하나가 기침을 했다. 마른 기침 끝에 검은 점액이 섞여 나왔다.
“사흘 전부터 저렇소.” 사내가 말했다. “광산은 닫혔고 신전은 더 깊이 들어가지 말라 했지. 그런데 봉인비를 내라더군. 광산세도 미루지 말라고 했고.”
“그럼 식량은요?”
사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카일은 손바닥을 보였다. 돈을 빌리겠다는 뜻도 기적을 판다는 뜻도 아니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광산이 닫히면 수레도 안 오겠죠. 장부를 가진 사람이라면 먼저 곡물부터 셀 겁니다.”
“사흘치.” 사내가 짧게 답했다.
그 숫자가 카일의 머릿속에서 동전 열세 닢보다 더 크게 울렸다.
사내는 자신을 로웨라고 소개했다. 소개라기보다 누군가가 묻기 전에 내뱉은 이름에 가까웠다. 로웨는 카일을 마을 안쪽의 창고까지 데려갔다. 창고 앞에서는 회색 머리의 여자가 장부를 덮고 있었다.
“또 누구를 데려온 거야.” 여자가 로웨를 쏘아봤다.
“길에서 봤습니다. 봉인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어요.”
“그것만으로 먹을 게 생기나?”
여자의 시선이 카일에게 꽂혔다. 마렌이라는 이름은 곧바로 들었다. 촌장이며 마을의 곡물 열쇠를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카일은 창고 문틈으로 보이는 자루들을 훑었다. 보리 자루는 열일곱 개. 콩은 여섯 자루. 일부는 이미 젖어 있었다. 사람 수를 생각하면 로웨의 사흘도 넉넉한 계산이 아니었다.
“먹을 건 생기지 않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하지만 왜 물이 새는지는 볼 수 있겠죠.”
마렌이 헛웃음을 쳤다. “신전의 사제가 닷새를 보고도 못 찾은 걸 자네가?”
“사제보다 잘난 사람은 아닙니다.”
카일은 갱도 쪽을 바라봤다.
“다만 사제는 봉인을 지켜야 하고 저는 살아야 합니다. 보는 방식이 조금 다르겠죠.”
마렌은 그 말에 더 경계하는 얼굴이 됐다. 카일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말 잘하는 외지인이 굶주린 마을에 나타났다면 가장 먼저 문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그는 마렌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창고 벽에 기대어 놓인 삽 하나를 집었다.
“해 지기 전까지만 보겠습니다. 마음에 안 들면 제가 먼저 떠나죠.”
로웨가 마렌의 눈치를 봤다. 마렌은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갱도 입구에는 나무판자가 덧대어져 있었다. 검은 물은 그 틈 아래에서 숨 쉬듯 부풀었다가 꺼졌다. 카일은 삽날로 물을 건드리지 않고 주변 흙을 조금씩 걷어 냈다.
흙 아래에는 손바닥만 한 돌 조각이 박혀 있었다. 금빛 룬이 새겨진 조각이었다. 룬의 선은 가운데에서부터 새까맣게 녹아 있었다.
카일은 손끝을 가까이 댔다가 멈췄다.
―먹어라.
‘아직은 안 돼.’
―저들은 네가 무서워하는 모습을 원한다.
‘저들은 먹을 걸 원해.’
카일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별이 무슨 말을 하든 지금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순서였다. 룬 하나가 무너지면 물이 새고 물이 새면 사람들은 병든다. 누군가가 봉인을 제대로 고치지 않았거나 애초에 고칠 수 없는 상태였다는 뜻이다.
그때 갱도 안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쿵.
판잣집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울음을 삼켰다. 로웨가 삽을 움켜쥐었다.
“들어가면 안 됩니다.” 카일이 말했다.
“안에 사람이 있어.”
“사흘 동안 봉쇄했다면서요.”
“어제부터 두 명이 안 나왔어.”
로웨의 턱이 떨렸다. 마렌이 멀리서 소리쳤다. 광산에 더 가까이 가지 말라는 목소리였다.
카일은 입구의 깨진 룬을 다시 봤다. 두 광부가 안에 있다면 그들을 살려야 했다. 하지만 카일에게는 밧줄도 횃불도 사람을 들고 나올 힘도 없었다. 별을 부르면 마력을 먹을 수는 있다. 대신 공포가 커질수록 별도 커진다.
그 선택지가 그의 목을 조여 왔다.
쿵!
이번에는 검은 물줄기가 나무판자를 밀어냈다. 물은 발목 높이로 번졌다. 로웨가 뒤로 물러나지 못하고 굳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세요!” 카일이 외쳤다. “창고 뒤 언덕으로. 물길을 막을 천과 모래를 가져와요!”
누군가가 웃었다. 낯선 사람이 명령한다는 사실이 우스웠을 것이다.
그러나 검은 물이 삽날을 스치며 반쪽을 녹여 버리자 웃음은 끊겼다.
카일은 마렌을 똑바로 봤다.
“사흘치 식량을 지키고 싶으면 움직이십시오. 이 물이 창고까지 닿으면 끝입니다.”
마렌의 얼굴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는 사람들을 불러 모래주머니와 낡은 천을 가져오게 했다. 로웨는 이를 악물고 광부 둘과 함께 물길 쪽에 말뚝을 박기 시작했다.
카일은 그들이 뒤로 물러날 때까지 입구 앞에 남았다.
―이제 공포를 내놓아라.
별의 목소리가 달콤해졌다.
카일은 검은 물 위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감각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눈앞이 잠깐 흔들리자 낯선 광산이 보였다. 같은 골짜기였지만 판잣집은 돌집이었고 갱도 앞에는 수백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누군가가 금빛 룬을 바닥에 새기며 울고 있었다.
‘누구 기억이지?’
별은 답하지 않았다.
카일은 이를 악물었다. 손끝에서 검은 빛이 번져 깨진 룬 조각을 감쌌다. 조각 속의 마력이 빨려 나오자 별의 굶주림이 잠깐 조용해졌다.
그러나 조각 하나가 가루가 된 뒤에도 물은 멈추지 않았다.
카일의 무릎이 꺾였다. 콧속에서 피가 떨어졌다. 별이 마력을 삼키는 사이 그의 머릿속에는 무너지는 천장과 사람들의 비명이 겹쳐 들렸다.
“외지인!”
언제부터 그가 쓰러질 듯 보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로웨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카일은 검은 물에서 손을 떼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물이 더는 불어나지 않았다. 입구의 틈은 남아 있었지만 물길은 가느다란 줄기로 줄었다.
마렌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공포가 있었고 그보다 먼저 계산이 있었다. 이 낯선 남자가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물이 멈춘 것은 보았다.
―아주 조금이다.
별이 불만스럽게 속삭였다.
그때 로웨가 카일의 손등을 붙잡았다. 거친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 한마디가 가슴 안으로 떨어졌다.
카일은 숨을 멈췄다. 별이 먹이를 삼킬 때와는 다른 온기가 빈 방을 채웠다. 타인의 공포가 밀려들 때처럼 속이 뒤집히지 않았다. 작고 맑은 불씨 하나가 어둠에 걸린 듯했다.
―이것은 뭐지.
카일도 대답하지 못했다.
마렌이 물었다. “자네는 대체 뭡니까?”
정답을 말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사형수라고 하면 쫓겨난다. 악신과 계약했다고 하면 돌에 맞아 죽는다. 기적을 부린 사람이라고 하면 더 많은 기적을 요구받는다.
카일은 피 묻은 손바닥을 외투에 닦았다.
“이름은 카일입니다.”
그는 갱도 아래의 검은 틈을 가리켰다.
“저건 오늘 다 막지 못합니다. 봉인 조각을 갈아 끼워야 하고 안에 남은 사람도 확인해야 합니다. 제게 사흘을 주십시오.”
“사흘 뒤에 뭘 내놓겠다는 거지?” 마렌이 물었다.
“물이 마을로 넘치지 않게 하겠습니다. 가능한 만큼은 사람도 데려오죠.”
“대신?”
카일은 이번만큼은 바로 대답했다.
“폐광 아래 창고를 빌려 주십시오. 식량은 하루치만. 그리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제가 한 일과 못 한 일을 기록할 사람을 정해 주세요.”
마렌의 눈썹이 움직였다. “기적을 팔러 온 사람이 검증을 원한다고?”
“기적은 아닙니다.” 카일이 말했다. “제가 못 하는 걸 약속하지 않으려는 겁니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자신에게 하는 경고처럼 들렸다.
마렌은 오래 침묵했다. 로웨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는 비어 있습니다. 내가 증인이 되죠.”
다른 광부들도 웅성거렸다. 믿는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모래주머니를 나르던 여자가 자기 아이를 안고 카일에게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는 깨끗한 천 조각을 내밀었다.
카일은 그것을 받았다.
그날 밤 마을 사람들은 갱도에서 가장 먼 빈터에 돌 세 개를 세웠다. 신전의 기둥 아래 있던 오래된 받침돌을 옮겨 온 것이었다. 돌 표면에는 바람에 닳은 문양이 남아 있었다. 금빛 태양과는 전혀 다른 문양. 부서진 원 안에 검은 점 하나가 박힌 별.
카일은 그 뜻을 몰랐다.
별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로웨가 촛불 하나를 돌 앞에 놓았다. “이름이 있어야 부르기 쉽지 않겠소?”
카일은 촛불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없습니다.”
그는 거짓 이름을 아무렇게나 붙이고 싶지 않았다. 이름은 결국 약속을 묶는 줄이었다. 별에게도 자신에게도.
“대신 사흘 동안은 여기서 증명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촛불을 하나씩 더 놓았다. 불빛은 작았다. 그러나 가슴 안의 빈 방은 그 불빛들을 빠짐없이 받아들였다.
―공포보다 느리다.
‘대신 덜 역겨워.’
―부족하다.
‘그러니 사흘 안에 방법을 찾는다.’
카일은 제단 돌에 손을 얹었다. 낮에 터진 상처에서 피 한 방울이 떨어졌다. 피가 문양의 검은 점에 닿자 돌 아래에서 낮은 진동이 올라왔다.
갱도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돌을 두드렸다.
쿵.
이번 소리는 물이 아니라 사람의 손에서 났다.
카일은 촛불 너머의 어둠을 보았다.
사흘이라는 약속은 생각보다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