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3화: 사흘짜리 약속의 값
새벽이 오기 전부터 폐창고의 문이 두드려졌다.
카일은 눈을 뜨자마자 품에 넣은 동전 주머니를 만졌다. 열세 닢 중 두 닢은 어젯밤에 빵과 붕대에 썼다. 남은 돈으로는 사흘을 버티기 어렵다. 약속을 어기면 이 골짜기에서 한 끼도 얻기 어려웠다.
문밖에서는 로웨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들어가겠습니다. 날 밝기 전에요.”
“혼자요?”
“도안은 내 동생입니다.”
카일은 잠시 말이 없었다. 실종된 두 광부 중 하나가 로웨의 동생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그가 그 사실을 숨긴 이유는 쉽게 짐작됐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사람을 위험에 밀어 넣는다고 보일까 봐였을 것이다.
“그러면 더더욱 혼자는 안 됩니다.”
창고 안에는 마렌과 마을 사람 넷도 들어와 있었다. 마렌의 얼굴은 밤새 장부를 붙들고 있었던 사람처럼 잿빛이었다.
“말은 그럴듯하군.” 마렌이 말했다. “하지만 어제 자네가 멈춘 건 물줄기 하나였지. 갱도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네.”
“그래서 모르고 들어가면 안 됩니다.”
카일은 빈 곡물 상자를 끌어다가 뒤집었다. 그 위에 숯 조각으로 줄을 그었다.
“들어가는 사람 둘, 입구에서 밧줄을 잡는 사람 둘. 줄을 한 번 당기면 멈추고 두 번 당기면 끌어냅니다. 셋은 도망입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이 규칙은 안 바꿉니다.”
“사람을 숫자로 세는군.” 로웨가 낮게 말했다.
“숫자로 안 세면 죽은 사람을 셀 겁니다.”
로웨의 눈이 매서워졌다. 카일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차라리 화를 내는 쪽이 나았다. 희망에 취한 사람은 명령을 잊지만 화난 사람은 조건을 기억한다.
마렌이 낡은 가죽 서류 뭉치를 상자 위에 던졌다. 신전의 붉은 인장이 찍힌 문서였다. 카일은 펼쳐 보지 않아도 내용의 절반을 알 수 있었다. 가난한 마을에 도착한 신전 문서는 대개 축복보다 청구서에 가까웠다.
‘봉인 정기 점검 및 정화 비용.’
마렌의 손가락이 마지막 줄을 짚었다.
“일곱 해 전 수리 때 납을 입힌 못과 송진을 썼다더군. 신전 사람은 이걸 내밀며 돈부터 냈어야 한다고 했네.”
카일은 문서의 도장을 살폈다. 사제 이름은 비어 있었다. 담당 신전의 인장은 있었지만 서명란이 긁혀 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못이 남아 있습니까?”
“옛 공구창고에 조금은.”
“송진도요?”
“광차 바퀴에 칠하던 게 있을 걸세.”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을 먹는 힘으로 봉인을 새로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새는 물길을 막고 부식된 틈을 덮는 일이라면 재료와 손이 더 중요했다.
그는 숯을 내려놓았다.
“수색을 나가는 동안 마렌 씨는 납못과 송진을 모으십시오. 아무도 제게 주지 말고 상자째 입구에 놓으세요. 로웨는 저와 들어갑니다. 나머지는 밧줄과 횃불을 맡고요.”
마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자네에게 맡기지 않지?”
“제가 훔치면 오늘 안에 쫓아낼 수 있게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카일은 그 틈에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수도를 떠나기 전에 훔친 장부의 빈 뒷장이었다.
“그리고 여기 적으십시오. 누가 무엇을 가져왔는지, 누가 들어갔는지, 무엇을 약속했는지. 제가 한 일도 못 한 일도요.”
“기록을 남기겠다고?”
“기적이라는 말은 아직 쓰지 맙시다. 나중에 말이 바뀌면 서로 피곤해지니까.”
카일은 종이를 상자 위에 똑바로 폈다. 말은 쉽게 늘어난다. 특히 살 길을 찾은 사람들 앞에서는 더 그랬다. 그가 약속하지 않은 것까지 적어 두어야 내일도 거짓말의 크기를 정할 수 있었다.
마렌은 종이를 오래 보다가 로웨에게 넘겼다. 로웨가 제 이름을 가장 먼저 적었다. 손끝은 떨렸지만 글씨는 반듯했다.
파멸의 별이 가슴 안에서 웃었다.
―겁쟁이들은 종이를 좋아하는군.
‘겁쟁이라서 산다.’
―안으로 들어가면 종이는 먹히지 않는다.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갱도 앞에 도착했을 때 아침 안개는 검은 물 위에서만 낮게 깔려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어제보다 멀리 떨어져 섰다. 다들 손에는 모래주머니나 천 조각이 들려 있었다. 명령을 믿어서라기보다 손을 놀리지 않으면 공포가 커질 것 같아서였다.
카일은 납못 상자를 열었다. 못은 손바닥 길이였고 표면은 둔한 은빛이었다. 송진 항아리에서는 씁쓸한 소나무 냄새가 났다.
“이걸로 입구를 막을 수 있습니까?” 마렌이 물었다.
“입구의 물길만요. 안쪽 봉인은 모르겠습니다.”
그는 일부러 모른다는 말을 크게 했다. 사람들은 대답보다 확언에 매달리기 쉽다. 그런데 확언은 갱도처럼 한 번 무너지면 매몰된다.
로웨가 밧줄을 허리에 감았다.
“동생을 보면 바로 끌고 나옵니다.”
“살아 있으면요.”
“그 말을 꼭 해야 합니까.”
“해야 합니다.”
카일은 자기 허리에도 밧줄을 묶었다. 매듭은 세 번 확인했다. 사기꾼은 사람의 표정을 읽는 데 익숙했지만 밧줄은 표정을 읽어 주지 않았다.
갱도 안은 낮보다 검었다. 횃불을 앞세우자 젖은 벽에 노란 빛이 흔들렸다. 검은 물은 발목에 닿지 않는 곳을 골라 얕은 도랑으로 흘렀다. 물가에 떨어진 나무 조각은 검게 변해 있었다.
―배고프다.
‘조용히 해.’
―저 물은 아래에서 올라온다. 피하지 말고 마셔라.
카일은 벽을 짚었다. 바닥의 기울기는 바깥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런데 검은 물은 반대로 안쪽에서 솟아 바깥으로 흘렀다. 누수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물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로웨가 횃불을 낮췄다.
“이쪽입니다. 옛 배수로가 있어요.”
벽에는 손톱 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그 아래로 광부의 장갑 한 짝이 떠 있었다. 로웨가 그것을 집어 들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도안 거예요.”
“소리 지르지 마세요.”
카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쪽에서 둔탁한 두드림이 울렸다.
쿵. 쿵.
사람 손의 박자였다.
로웨가 달려가려 하자 카일이 밧줄을 잡았다. 로웨가 돌아보는 눈에는 분노가 먼저였다.
“규칙.” 카일이 짧게 말했다.
“저기 있습니다.”
“그러니 같이 갑니다.”
둘은 무너진 지지목을 넘었다. 그 너머에는 광차 한 대가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광차 아래에 남자가 반쯤 깔려 있었다. 도안이었다. 얼굴은 검은 핏줄로 얼룩졌고 입술 사이로 검은 물거품이 샜다.
로웨가 무릎을 꿇었다.
“도안.”
도안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손목에서 검은 실 같은 것이 뻗어 나와 로웨의 팔을 감았다.
로웨가 비명을 삼켰다. 검은 실이 가죽 장갑을 녹이며 피부를 파고들었다.
카일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도망치면 아직 늦지 않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창고의 장부와 로웨가 적은 첫 번째 이름이 떠올랐다. 그 종이는 갱도 안에서 쓸모없어도 바깥으로 나갈 이유는 됐다.
별이 속삭였다.
―둘 다 두려워한다. 좋은 냄새다.
‘먹으면 어떻게 되지?’
―저것은 약하다. 전부 삼키면 된다.
전부라는 말이 카일의 귓가에 오래 남았다. 전부를 삼키면 도안 안에 남은 것까지 사라질지 모른다. 별은 그 차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카일은 무릎을 꿇고 도안의 목에 손가락을 댔다. 맥박은 아주 느렸다. 아직은 살아 있었다.
“로웨. 광차를 들어요.”
“팔이 안 움직여.”
“움직여야 합니다.”
카일은 도안의 가슴에 손바닥을 댔다. 차가운 감각이 손목을 타고 올라와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눈앞에 검은 우물이 열리고 그 바닥에서 수많은 손이 벽을 긁었다.
그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어.
카일은 이를 악물었다.
“이 사람을 살릴 만큼만.”
―명령하는가?
“계약했잖아.”
검은 별빛이 손바닥 아래로 번졌다. 도안의 핏줄을 따라 움직이던 검은 실이 뒤틀리며 카일의 손으로 몰려왔다. 역겨운 냉기가 팔을 타고 올라오자 카일의 시야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
로웨가 광차 아래에 어깨를 넣었다. 녹아 내리던 장갑이 벗겨지고 맨손에서 피가 흘렀다. 그는 이를 악물고 광차를 밀었다.
“지금!”
카일이 외치자 로웨가 도안을 끌어냈다. 검은 실은 절반쯤 카일의 손목으로 사라졌고 나머지는 도안의 어깨에 검은 멍처럼 남았다.
도안의 입술이 떨렸다.
“열어.”
로웨가 얼어붙었다. “도안?”
도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시 까무러친 그의 손가락이 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카일은 바닥에 손을 짚었다. 속이 비어 가는 느낌과 함께 별의 기쁨이 밀려왔다.
―더 아래에 있다.
횃불 빛이 흔들린 벽면에는 금빛 룬이 새겨져 있었다. 룬은 절반이 벗겨졌다. 그 아래에는 임시 제단 돌에서 본 것과 같은 문양이 드러나 있었다. 부서진 원과 검은 별.
문양 한가운데에는 금이 가 있었다. 금 너머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쿵.
이번에는 벽 뒤에서 두드렸다.
“가요.” 카일이 말했다.
로웨는 벽을 보았다. “안에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도안을 데리고 나가는 게 우선이에요.”
그는 도안의 검은 어깨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약속한 건 확인입니다. 전부 구하겠다는 말은 안 했습니다.”
그 말은 비겁하게 들렸지만 필요한 말이었다. 카일은 로웨가 그 비겁함을 미워하길 바랐다. 그래야 이 남자가 다음에도 무턱대고 목숨을 던지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로웨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입구에 닿자 밧줄이 세 번 당겨졌다. 밖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줄을 끌어당겼다. 빛이 쏟아졌다.
도안이 바닥에 눕혀지자 마렌이 숨을 들이켰다. 주민들은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그를 보았다. 도안의 가슴은 오르내렸지만 어깨의 검은 멍은 남아 있었다.
“살았습니까?” 누군가 물었다.
카일은 물통을 받아 손을 씻었다. 물은 금세 검게 변했다.
“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낫는다는 약속은 못 합니다.”
“그럼 안에 있던 건?”
“모릅니다. 봉인 벽 뒤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이 굳었다. 카일은 그 공포를 느꼈다. 별이 배를 채우려 몸을 기울이는 감각도.
그는 서둘러 마렌을 보았다.
“기록하십시오. 도안은 살아서 나왔습니다. 몸에 검은 흔적이 남았습니다. 벽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마렌은 대답 없이 종이를 꺼냈다. 손이 떨렸지만 한 글자씩 적었다.
카일은 납못과 송진을 가리켰다.
“입구 틈은 오늘 막습니다. 물길을 줄이는 거지 갱도를 봉하는 건 아닙니다. 내일은 벽의 룬을 조사한 뒤 결정하죠.”
“내일까지 기다리자고?” 로웨가 물었다.
“도안을 살필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금 벽을 열면 우리 셋 말고 마을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어요.”
마렌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못과 송진은 쓰게. 대신 내일 들어갈지 말지는 장부 앞에서 정하겠네.”
“좋습니다.”
카일은 처음으로 안도했다. 적어도 누구 하나의 명령만으로 갱도가 열리지는 않을 것이다.
주민들은 입구의 갈라진 틈에 송진을 밀어 넣고 납못을 박았다. 카일은 가까이 가지 않고 손끝으로 아주 얇은 검은 빛만 보탰다. 송진 아래에서 부글거리던 검은 물이 잦아들었다.
그날 밤 임시 제단 앞에는 촛불이 여섯 개 놓였다. 어제보다 세 개 늘었다. 카일은 그 숫자를 세고 싶지 않았지만 가슴 안의 빈 방은 불빛 하나하나를 기억했다.
―저들은 너를 믿는다.
‘아직은 내가 한 일을 믿는 거지.’
―다르지 않다.
‘아주 다르다.’
카일은 제단 돌을 보았다. 낮에 갱도 벽에서 본 문양이 촛불 그림자 속에서 겹쳐 보였다.
돌 아래에서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쿵. 쿵.
그리고 갱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이번에는 그의 귀 바로 옆에서 속삭였다.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