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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1화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1화: 교수대의 사기꾼

시놉시스

제국 최고의 사기꾼 카일은 사형대에서 잊힌 주문을 외워 악신 파멸의 별과 계약한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변방의 미신 마을로 달아나기로 한다.

비가 오기 직전의 새벽이었다.

카일은 교수대 아래로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분노, 호기심, 피로. 자신을 보러 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들 제국 최고의 사기꾼이 죽는 장면을 구경하러 왔을 뿐이다.

그 사실은 생각보다 모욕적이었다.

그는 두 손을 묶은 쇠사슬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집행관님. 지금이라도 거래하지 않겠습니까?”

집행관 브람은 대답 대신 밧줄의 매듭을 당겼다. 실밥 하나까지 각을 맞춘 제복 소매가 축축한 새벽 안개에 젖어 있었다.

“남부 관세 장부의 진짜 사본이 어디 있는지 알려 드리죠. 백작부인께서 그 장부를 얼마나 찾으셨는지도 압니다.”

브람의 손끝이 아주 잠깐 멈췄다.

카일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사본은 없었다. 애초에 장부는 그의 사기판에 쓸 미끼였을 뿐이다. 하지만 브람이 백작부인의 하수인에게 빚을 졌다는 소문은 들었다. 사형수의 말에 반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흔들린 셈이었다.

“너는 교수대에서도 값을 부르는군.” 브람이 낮게 말했다.

“그게 제 장점입니다. 죽은 뒤에야 가격이 오르는 물건도 있으니까요.”

군중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가 곧 욕설에 묻혔다. 카일은 웃음을 들은 척하지 않았다. 이 순간의 웃음은 목숨을 살리지 못한다.

대신 경비대장 하론을 바라봤다.

하론은 군중이 아니라 성벽 위를 보고 있었다. 오른손은 검자루에 얹힌 채였다. 새벽부터 성벽을 확인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반란을 준비했거나 누군가가 자신을 노린다고 믿거나.

어젯밤 하론의 부관이 몰래 태운 편지 냄새가 아직도 카일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는 감방 창살 너머로 그 장면을 봤다. ‘집행식에 화살이 날아든다’는 익명의 경고장.

“대장님.” 카일이 불렀다. “밧줄을 당기기 전에 성벽도 한 번 보시죠. 죽은 사기꾼보다 살아 있는 귀족의 복수가 더 무서울 테니까.”

하론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브람은 카일을 노려봤다. “시간 끌기는 끝이다.”

그가 손을 내렸다.

발판이 꺼졌다.

목이 조여 오자 세상에서 가장 값진 물건들이 전부 하찮아졌다. 금화도 작위도 남을 속여 얻었던 박수도 숨 한 번보다 못했다.

카일은 밧줄을 긁었다. 손가락 끝이 닿지 않았다. 시야가 좁아지고 군중의 얼굴이 물속처럼 일그러졌다.

그때 기억나지 않던 문장이 혀끝에 떠올랐다.

압수된 고대 문헌의 가장자리에서 본 낙서였다. 열두 번이나 읽었는데 뜻은 모르던 글. 감방에서 할 일이 없어서 외워 둔 글.

“별이여. 버려진 자의 숨을 거두지 말고 빚으로 묶어라.”

세상이 검게 접혔다.

눈을 뜬 카일은 별 하나 없는 밤에 서 있었다.

바닥도 하늘도 없었다. 발밑의 어둠은 발목을 붙잡고 있었고 머리 위의 어둠은 눈꺼풀을 누르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너무 가까운 검은 눈동자가 떠 있었다.

눈동자의 테두리에서는 붉은 불꽃이 젖은 종이처럼 번졌다.

―살고 싶은가.

카일은 목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렀다. 숨이 붙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 목은 아직도 조여 왔다.

“당연하지.”

―그렇다면 네 공포를 내놓아라. 네가 모을 공포도.

카일은 웃으려다 실패했다. 목구멍에서 피 섞인 숨만 새었다.

“내 공포만으로는 모자랄 텐데.”

―사람들은 잘 부서진다. 부서진 자리에는 나를 위한 길이 난다.

그 말은 제안이 아니라 설명이었다. 카일은 그 속에서 거래의 냄새를 맡았다. 먹이를 기다리는 짐승에게는 값을 깎을 수 없지만 목줄을 조금 느슨하게 할 수는 있다.

그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내 몸은 안 된다. 내 목숨도 안 된다.”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오늘만 빌린다. 네가 내 목숨을 살리면 네 굶주림을 해결할 길을 찾겠다. 하지만 내가 부서지면 너도 오래 굶겠지.”

―네가 내게 조건을 붙이는가.

“사기꾼의 마지막 예의입니다.”

어둠이 카일의 발목을 더 세게 감았다. 차가운 것이 살갗을 뚫고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자기 것이 아닌 기억이 한순간 흘러들었다. 무너진 도시, 울부짖는 사람들, 별빛을 향해 뻗은 수천 개의 손.

카일은 이를 악물었다. 그 기억은 곧바로 검은 파도에 삼켜졌다.

“공포 말고 믿음을 팔겠습니다.”

처음으로 눈동자가 멈췄다.

“믿음은 공포보다 비싸게 팔리니까.”

붉은 불꽃이 눈동자 안쪽에서 타올랐다.

―거짓말쟁이가 믿음을 말하는군.

“제가 거짓말을 잘하니 믿게 만들 방법도 잘 압니다.”

―계약은 성립한다.

카일은 다시 교수대에 매달려 있었다.

밧줄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밧줄에 새겨진 강화 룬부터 검게 바스러졌다. 마력을 삼킨 검은 가루가 카일의 뺨을 스치자 귓속에서 낮은 웃음이 울렸다.

사형장 주변의 횃불이 하나씩 꺼졌다.

“악신이다!”

누군가 외쳤다.

군중의 비명이 솟구치자 그 소리는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카일의 가슴 안쪽에 빈 방 하나가 생기고 그 방이 비명으로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속이 뒤집혔다.

―더 내놓아라.

별의 목소리가 귀 안쪽을 긁었다.

카일은 발판 끝에 간신히 걸친 발끝으로 몸을 버텼다. 살아난 게 아니라 조금 늦게 죽게 된 것뿐일지도 몰랐다. 손발은 여전히 묶여 있었고 목에는 밧줄이 감겨 있었다.

아래에서 하론이 검을 뽑았다.

“병력 정렬! 사형수부터 제압한다!”

겁먹은 병사들은 아직도 대장의 명령을 기다렸다. 브람은 발판 쪽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뒤에 섰다. 자기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을 두려워하는 눈이었다.

카일은 피가 넘어오는 목으로 외쳤다.

“집행관이 반역자를 풀어 줬다! 성벽을 보라!”

하론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브람의 입술이 파래졌다. “저놈이 거짓말을 합니다!”

“그럼 왜 경고장을 숨겼지?” 카일은 하론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대장님. 당신 부관이 본 문장 그대로 말해 줄까요? 집행식에 화살이 날아든다고.”

하론의 눈이 브람에게 돌아갔다.

브람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은 카일이 만든 거짓말보다 더 그럴듯했다.

카일은 손목을 비틀었다.

족쇄의 룬이 검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뜨거운 쇠가 살을 벗겨 내는 듯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두 번째 고리를 잡아당겼다. 별이 마력을 먹어 치우는 동안 고리까지 얇아졌다.

카일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깨가 찢어질 듯 아팠다. 시야가 번쩍였지만 그는 구르며 충격을 흘렸다. 젖은 흙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병사 하나가 창을 들고 달려들었다.

카일은 창을 피할 실력이 없었다. 검을 잡아 본 적도 드물었다. 그래서 피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몸을 웅크린 뒤 손바닥을 들었다.

검은 별빛이 병사의 눈앞에 번졌다.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창을 놓쳤다. 그가 무엇을 봤는지는 카일도 몰랐다. 다만 병사가 어린아이처럼 무릎을 끌어안고 떨기 시작하자 카일의 속이 다시 뒤집혔다.

그건 기적이 아니었다. 남의 가장 약한 곳에 손을 넣는 짓이었다.

―달다.

“닥쳐.” 카일은 숨을 몰아쉬었다.

군중이 먼저 무너졌다. 사람이 많았고 공포는 사람보다 빨랐다. 누군가는 넘어진 아이를 끌어안고 달렸고 누군가는 서로를 밀쳤다.

카일은 잠시 그 광경을 봤다. 자신이 만든 소동이었다.

그러나 뒤에서 하론의 고함이 들렸다.

“사형수를 잡아라!”

카일은 미안하다는 생각을 접었다. 사과는 살아남은 다음에도 할 수 있었다.

그는 버려진 창을 짚고 사형장 아래 배수구로 뛰어들었다.

하수의 냄새가 목구멍을 태웠다. 낮은 천장에 어깨가 부딪히고 풀린 손목에서는 피가 흘렀다. 뒤에서 추격 나팔이 울렸다.

―공포는 달다.

“알아. 그런데 너무 많이 먹으면 탈이 나.”

카일은 이를 악물고 어둠 속을 더듬었다. 사흘 전 브람의 마차가 감방 앞에 섰을 때였다. 그는 식사 그릇을 엎고 호송병을 불러 세운 뒤 바퀴 아래에 작은 꾸러미를 밀어 넣었다. 사형이 취소될 가능성은 낮았다. 그래서 준비는 취소되지 않을 가능성에 맞춰 두는 편이 옳았다.

배수구 격자 너머에서 꾸러미가 손에 잡혔다.

동전 스무 닢, 낡은 외투, 지도 한 장.

카일은 물에 젖은 지도를 펼쳤다. 수도에서 가장 먼 곳은 갈고리 골짜기였다. 세금 징수관도 잘 가지 않는 가난한 광산 마을. 미신은 많고 신전의 손은 약했다.

사기꾼이 새 장사를 시작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수배 전단을 꺼내 하수에 던졌다. 잉크가 번지며 카일이라는 글자가 검은 물에 녹았다.

“거기서 네 먹이를 구해 주지.”

―공포를?

카일은 지도를 접어 품에 넣었다.

“아니. 믿음을.”

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슴 안의 빈 방이 아주 조금 따뜻해졌다. 그 온기는 약속을 받아들였다는 표시처럼 느껴졌다.

카일은 몸을 떨었다. 악신이 약속을 믿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무서웠다.

멀리서 추격 나팔이 다시 울렸다.

카일은 젖은 외투의 깃을 세웠다. 이제 살아남을 사람은 카일이 아니었다. 사형대에서 죽었다가 돌아온 누군가여야 했다.

그는 어둠을 향해 걸었다.

사기꾼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거짓말을 시작하는 게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들키지 않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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