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없이 세계 최강 네크로맨서

4화: 이단아의 시험
공방의 새벽은 금속이 식는 소리로 시작됐다.
카엘은 은빛 장검을 고정대 위에 눕히고 확대 렌즈를 내렸다. 밤새 새긴 세각 룬이 칼등을 따라 희미하게 이어져 있었다. 아직 마지막 획 하나가 비어 있었다.
그 획을 닫으면 검은 단순한 금속이 아니게 된다.
레오노르의 손이 칼자루를 자기 손처럼 기억하도록 돕는 두 번째 감각로가 될 터였다.
레오노르는 작업대 맞은편에 서 있었다. 전날보다 자세는 안정되어 있었지만 흉갑 안쪽 코어의 검푸른 빛은 장검을 향해 조용히 맥동했다.
"날을 세우면 기억도 깨어나나."
"검을 쥐던 감각은 더 선명해질 겁니다."
카엘은 새 장갑의 손목끈을 당겼다.
"원치 않는 기억이 따라오면 이쪽 감각로를 끊겠습니다."
"명령인가."
"선택 가능한 안전장치입니다."
레오노르의 눈구멍 안쪽에서 빛이 가늘어졌다.
"기사는 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딘 검을 들고 평가장에 세울 생각도 없습니다."
카엘은 조각칼을 들었다. 칼끝이 장검 위를 움직였다. 금속을 긁는 소리는 거칠지 않았다. 얇은 유리에 빛을 새기는 듯 맑고 낮았다.
마지막 획이 닫히자 장검 안쪽에서 짧은 울림이 퍼졌다.
레오노르가 한 걸음 다가왔다. 발목 관절이 바닥 룬을 스쳤고 은선들이 잠깐 응답했다. 카엘은 검을 손잡이부터 내밀었다.
그녀는 천천히 쥐었다.
처음에는 손목이 흔들렸다. 이어 손가락 마디의 태엽이 차례로 자리를 찾았다. 검의 무게가 팔을 끌어내리지 않고 손목에서 팔꿈치로, 팔꿈치에서 어깨로 흘렀다.
레오노르는 아주 느리게 검을 들어 올렸다.
날 끝에서 푸른 선이 한 번 지나갔다.
"가볍군."
"부족합니까."
"아니. 오래된 피가 묻지 않아 가볍다."
카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평가는 마음에 듭니다."
문밖에서 조교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엘 로엔. 정기 평가장으로 이동하라는 교수 명령입니다."
카엘은 벽시계를 보았다. 예정 시간보다 조금 빨랐다. 바르토스가 기다리지 못한 것이리라.
"가시지요."
레오노르는 장검을 내려 세웠다.
"전장은 어디지."
"아카데미 평가장입니다."
"전장이라 부를 수 있나."
"오늘 상대가 썩은 시체라면 위생 검사장에 가깝습니다."
레오노르의 금속 목소리 안에 희미한 웃음이 섞였다.
아르켄 왕립 아카데미의 사환술 평가장은 지하 원형 경기장에 있었다.
천장에는 검은 방지석이 박혀 있었고 바닥에는 사체가 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구속 룬이 겹겹이 새겨져 있었다. 중앙의 철제 문 뒤에서는 젖은 흙과 오래된 피 냄새가 흘러나왔다.
카엘은 손수건을 꺼내 코앞에 가볍게 댔다.
"환기 설비부터 다시 설계해야겠군요."
관람석의 실습생들이 술렁였다. 전날 공방에서 웃음을 잃었던 이들도 무리를 이루자 다시 목소리를 찾았다.
"진짜 데려왔어."
"갑옷이 걷는군."
"시체 언데드랑 맞붙으면 다르겠지."
레오노르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중앙 철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모르가트 교수는 평가석에 서 있었다. 명부와 막대는 평소와 같았지만 눈 밑은 어두웠다. 그는 밤새 자신이 본 장면을 기존 학문 안에 밀어 넣을 문장을 찾았을 것이다.
"카엘 로엔."
"예."
"네 방식은 아직 사환술학과의 정식 분류가 아니다. 오늘 평가는 네 주장을 인정하는 자리가 아니다. 위험성과 한계를 확인하는 자리다."
"좋습니다. 위험성은 썩은 사체 쪽에서 더 많이 나올 겁니다."
관람석에서 웃음이 터졌다가 곧 사라졌다.
반대편 출입구가 열렸다.
바르토스 로엔이 검은 예복을 끌며 들어왔다. 손가락에는 검은 은실이 감겼고 뒤따라온 조교 둘은 쇠사슬로 묶인 관을 끌고 있었다. 관 옆면에는 로엔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카엘의 시선이 인장에 닿았다.
"평가장에 가문 물건을 반입하셨습니까."
바르토스가 웃었다.
"정식 기증품이다. 아카데미는 우수한 실습 재료를 거부하지 않지."
"기증품이라면 포장을 풀기 전에 검역이 필요합니다."
"입만은 여전히 깨끗하구나."
바르토스가 손짓하자 조교들이 관의 못을 뽑았다.
뚜껑이 열렸다.
냄새가 먼저 나왔다. 오래된 갑옷 틈에 눌어붙은 부패취였다. 관 안에는 기사 사체가 누워 있었다. 흉갑은 녹슨 철판으로 덧대져 있었고 목에는 검은 은실이 여러 겹 감겨 있었다.
부러진 투구에는 흰 천 조각이 묶여 있었다.
레오노르의 코어가 낮게 흔들렸다.
카엘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장검 칼등의 세각 룬이 아주 짧게 떨렸다가 가라앉았다.
"흰 깃발을 장식으로 쓰는 취향은 처음 봅니다."
"전장에서는 흔한 물건이지."
바르토스의 눈이 레오노르에게 향했다.
"누군가에게는 마지막으로 본 색일 수도 있고."
레오노르의 손가락이 장검 손잡이를 조였다. 칼등의 푸른 빛이 번졌지만 과열선은 올라오지 않았다.
카엘은 그녀에게 명령하지 않았다.
대신 흉갑 옆의 퇴로 룬을 아주 조금 열었다. 검푸른 빛이 그녀의 어깨에서 손목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매개체와 영혼 사이의 길은 닫히지 않았다.
"필요하면 물러나셔도 됩니다."
관람석의 술렁임이 커졌다.
바르토스가 웃었다.
"대련 전에 도망칠 길을 열어 주는 사환술사라니. 네 인형은 참 복이 많군."
"도망칠 길이 없는 영혼은 결국 주인을 벱니다."
카엘은 레오노르를 보았다.
"선택하십시오. 계약을 유지할지. 여기서 벗어날지."
레오노르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시체 기사의 목에서 진득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바닥 룬이 그것을 붙잡고 검은 연기를 냈다. 카엘의 미간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레오노르가 말했다.
"저 흰 천은 항복의 표식이 아니다."
"그렇습니까."
"항복한 자를 모욕하는 장식이다."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가 물러나면 저것은 전장의 이름을 더럽힌다."
카엘은 퇴로 룬을 닫지 않았다.
"그럼 계약은 유지하는 겁니까."
"유지한다. 그리고 하나를 더 요구하지."
"말씀하십시오."
"저 시체를 쓰러뜨린 뒤 흰 천은 태워라. 더는 썩은 목에 매달리지 않게."
"위생적 처리까지 포함하겠습니다."
레오노르가 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걸음은 전날보다 안정되어 있었다. 발목의 태엽은 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찰칵이는 금속음은 평가장의 축축한 냄새와 섞이지 않고 차갑게 울렸다.
실습생들의 웃음은 완전히 멎었다.
모르가트 교수가 막대를 들어 올렸다.
"대련 항목은 명령 수행력과 방어 돌파력 평가다. 한쪽이 움직임을 잃거나 원 밖으로 밀려나면 종료한다."
평가장의 네 방향에는 조교들이 수정판을 들고 섰다. 수정판은 명령 전달 속도와 매개체 손상률을 기록하는 장치였다. 시체 사환술사에게는 익숙한 도구였지만 레오노르의 관절음이 울릴 때마다 판 위의 눈금은 아직 읽을 값을 찾지 못한 듯 흔들렸다.
카엘은 그 흔들림을 보고 눈매를 낮췄다.
"측정 장치도 갱신해야겠군요."
"질문이 있습니다."
카엘이 말했다.
교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냐."
"상대 사체에 로엔 가문 인장이 있습니다. 중간에 외부 조작이 들어오면 평가를 무효로 처리합니까."
바르토스가 낮게 말했다.
"내 실력을 의심하는 것이냐."
"아니요. 형님 성격을 확신하는 겁니다."
몇몇 실습생이 숨을 삼켰다.
모르가트 교수는 바르토스를 보았다. 바르토스는 웃고 있었지만 손가락의 은실은 움직이지 않았다.
"평가 시작 후 외부 명령 개입은 금지한다."
"기록해 주십시오."
"이미 들었다."
카엘은 원 밖의 보조 룬 앞에 섰다. 그의 손에는 명령용 은실이 없었다. 세각 조정용 조각칼 하나와 얇은 압력계만 들려 있었다.
바르토스가 그 모습을 보고 비웃었다.
"사환술사가 실도 없이 전투를 보겠다니."
"오염된 실은 장갑을 더럽힙니다."
"그럼 네 인형이 제멋대로 움직이다 부서져도 할 말 없겠군."
"그녀는 제멋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검술이란 원래 그런 겁니다."
중앙 철문 앞의 조교가 사체 기사에 감긴 쇠사슬을 풀었다.
바르토스가 입술을 움직였다.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관 안의 사체가 일어났다. 목뼈가 삐걱였고 무릎 관절에서 썩은 액체가 흘렀다.
검은 은실이 힘줄처럼 떨렸다. 흉갑 안쪽의 로엔 인장은 죽은 살에 박힌 못처럼 붉게 빛났다. 단순한 평가용 사체라기에는 구속이 지나치게 촘촘했다.
레오노르는 검을 들었다.
은빛 장검의 날이 평가장의 흐린 빛을 받아 차갑게 반짝였다.
시체 기사가 녹슨 검을 끌어 올렸다. 투구에 묶인 흰 천이 흔들렸다.
바르토스가 말했다.
"보아라. 이것이 진짜 죽음이다."
카엘은 손수건을 접어 코트 안쪽에 넣었다.
"진짜 죽음은 저렇게 냄새를 남기지 않습니다. 저건 관리 실패입니다."
모르가트 교수의 막대가 바닥을 쳤다.
"시작."
시체 기사가 첫걸음을 내디뎠다. 바닥 룬이 검게 흔들렸다.
레오노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빈 눈구멍 안쪽에서 검푸른 빛이 조용히 깊어졌다.
"나는 레오노르 폰 바르크."
금속 목소리가 원형 경기장에 울렸다.
"항복의 표식을 더럽히는 자를 기사라 부르지 않는다."
그녀의 검끝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가 다시 떠올랐다.
카엘은 명령하지 않았다.
그 순간 썩은 검이 휘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