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없이 세계 최강 네크로맨서

3화: 길 잃은 영웅의 영혼
"다음 실험은 대화부터 시작하지요."
카엘의 말이 공방 안쪽의 금속 선반 사이로 낮게 퍼졌다.
여성형 프레임은 은빛 장검 앞에 멈춰 있었다. 손에는 연습검이 들려 있었고 빈 눈구멍 안쪽에는 검푸른 빛이 깃들어 있었다. 실습동의 사체에서 올라오던 탁한 잔류혼과는 전혀 달랐다.
어둠 속에서 오래 길을 잃은 사람이 마침내 문틈의 빛을 본 듯했다.
모르가트 교수는 명부를 다시 펼치지 못했다.
"대화라."
그의 막대 끝이 바닥을 짚었다.
"사환술 실습에서 영혼과 협상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군."
"그래서 지금 보여 드리는 겁니다."
카엘은 새 장갑의 손목끈을 조였다. 그가 발끝으로 바닥 룬의 중심을 건드리자 공방 가장자리에서 은선들이 차례로 빛났다. 격리 원이었다. 영혼이 코어 밖으로 흩어져도 공방을 벗어나지 않게 하는 안전장치였다.
동시에 퇴로이기도 했다.
카엘은 원의 한쪽을 일부러 닫지 않았다.
바르토스가 낮게 웃었다.
"영혼에게 예의를 차리겠다니. 네가 정말 로엔의 피를 받았는지 의심스럽다."
"로엔의 피가 더러운 절차를 좋아한다는 뜻이라면 저도 의심스럽습니다."
실습생 몇 명이 숨을 삼켰다.
카엘은 프레임의 손에서 연습검을 빼앗지 않았다. 대신 작업대 위의 은빛 장검을 들어 프레임 앞에 세웠다. 아직 날은 세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칼등과 손잡이에는 머리카락보다 얇은 감각 룬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검을 원하셨지요."
프레임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이름보다 먼저 묻겠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기입니까. 몸입니까. 아니면 전장입니까."
검푸른 빛이 흔들렸다.
처음에는 금속 마찰음만 났다. 이어 흉갑 깊은 곳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올라왔다.
"몸은."
공방 안의 모든 사람이 굳었다.
"썩었느냐."
카엘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혐오가 아니라 이해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아니요."
그는 프레임의 흉갑을 가리켰다.
"강철과 은합금입니다. 내부 관절은 청동 축과 백철 베어링을 썼습니다. 코어 하우징은 부패하지 않습니다. 피도 고름도 냄새도 없습니다."
"감옥인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제가 퇴로를 닫는다면."
카엘은 조각칼을 들어 흉갑 왼쪽 룬의 빈 공간을 보여 주었다.
"이 획은 일부러 닫지 않았습니다. 전신 정착이 실패하거나 당신이 거부한다면 이 길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모르가트 교수의 눈썹이 올라갔다.
"정착률을 스스로 낮추겠다는 뜻이냐."
"강제로 붙잡은 영혼은 매개체를 부순 뒤 도망칩니다. 또는 미쳐 버리지요. 그걸 성과라고 부르는 취향은 제게 없습니다."
바르토스의 얼굴이 굳었다.
로엔 가문 지하실이라는 말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프레임의 빛이 은빛 장검 위로 내려앉았다.
"내 검은."
"아직 완성하지 않았습니다."
"왜."
"당신의 손에 맞춰야 하니까요."
카엘은 장검의 손잡이와 프레임 손바닥을 번갈아 보았다.
"영혼이 쥐는 검은 무게보다 기억이 먼저 맞아야 합니다. 억지로 세운 날은 관절 반응을 망칩니다."
프레임은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공방 밖 실습동에서 오래된 문이 삐걱이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다 목소리가 다시 났다.
"나는 이름을 잃었다."
"기억나는 조각부터 말씀하십시오."
"비. 진흙. 흰 깃발."
프레임의 손이 연습검 손잡이를 조였다.
"등 뒤의 창."
실습생들 사이에서 낮은 탄식이 흘렀다. 바르토스는 지루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지만 손가락의 검은 은실은 다시 감기고 있었다.
카엘은 프레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대신 기사에게 무기를 바치는 장인처럼 검을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당신은 기사였군요."
"기사는 이름으로 서약한다."
검푸른 빛이 흔들렸다.
"레오노르."
그 한마디가 나오자 공방의 룬들이 동시에 떨렸다.
"레오노르 폰 바르크."
모르가트 교수의 막대가 바닥을 짚었다.
"폰 바르크라면 북부 전쟁의 기사 가문이다. 백 년 전에 끊긴 이름인데."
카엘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본인이 방금 말했습니다."
"잔류혼이 이름을 꾸며낼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검술이 먼저 부정했을 겁니다."
레오노르의 손목이 은빛 장검을 향해 움직였다. 아직 전신이 깨어난 것은 아니라 손과 팔꿈치만 떨렸다. 그러나 그 각도는 자연스러웠다.
바르토스가 그 순간 끼어들었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그는 웃지 않았다.
"고위 영혼이면 로엔 가문에 보고해야 한다. 특히 가문의 차남이 우연히 끌어낸 자원이라면 더더욱."
"자원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영혼은 사환술사의 자산이다."
"썩은 사체에 남은 잔향이나 그렇게 다루시지요."
바르토스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검은 은실이 바닥을 타고 뻗었다. 이번에는 프레임 발목이 아니라 흉갑의 코어를 향했다. 고위 영혼을 잠깐이라도 묶으면 가문 인장을 새길 수 있었다. 로엔 가문식 강제 소유권이었다.
카엘은 이미 보고 있었다.
"오염원 격리."
청동 방어 인형 셋이 선반 아래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검은 은실은 빨랐다. 실은 방어 인형 사이를 비집고 코어 하우징 앞까지 닿았다.
레오노르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연습검 끝이 허공을 그었다.
탁.
은실이 끊어졌다. 잘린 끝은 바닥 룬에 닿기도 전에 푸른 불꽃에 타들어 갔다.
프레임은 카엘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았다.
검을 든 손이 자기 몸의 자유를 지켰다.
바르토스의 눈이 차가워졌다.
"네가 무엇을 깨웠는지 모르는군."
"적어도 형님처럼 묶어 둘 생각은 없습니다."
카엘은 레오노르를 향해 돌아섰다.
"계약 조건을 제시하겠습니다. 썩지 않는 몸. 당신의 손에 맞춘 검. 강제 명령 없는 전투 권한. 대가로 저는 당신의 검술과 판단을 빌리겠습니다."
레오노르의 목소리가 낮았다.
"내가 거부하면."
"퇴로를 열겠습니다."
"내가 너를 베면."
"그 전에 제 공방 바닥이 당신의 첫걸음 각도를 읽을 겁니다. 그래도 걱정되면 검의 날은 아직 세우지 않겠습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프레임 안에서 아주 희미한 웃음 같은 소리가 났다.
"이상한 사환술사로군."
"위생적인 사환술사입니다."
"나는 더러운 전장에 묻혔다. 이름도 표식도 없이."
레오노르의 빛이 장검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카엘에게 돌아왔다.
"내 검은 항복한 자를 베지 않는다. 썩은 몸으로 끌려다니지도 않는다. 그 조건을 지킬 수 있나."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럼 몸을 달라."
카엘은 코어 앞에 섰다.
"모르가트 교수님."
"무엇이냐."
"이제부터는 장치술이 아니라 사환술입니다. 위험하면 중지 명령을 내리셔도 됩니다."
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흉갑의 미완성 룬에 못 박혀 있었다. 평생을 시체의 근섬유와 잔류혼으로 가르쳐 온 사람이 무생물 매개체와 고위 영혼의 자발적 계약을 눈앞에서 보고 있었다. 중지해야 한다는 판단보다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이 먼저 올라온 얼굴이었다.
카엘은 흉갑의 끊어 둔 룬을 하나씩 이었다.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퇴로는 얇게 남겨 두고 감각로만 열었다.
찰칵.
척추축의 태엽이 풀렸다.
찰칵. 찰칵.
어깨 관절이 내려앉고 고관절의 잠금핀이 빠졌다. 손목에서 팔꿈치로, 팔꿈치에서 어깨로 은빛 문자가 번졌다. 목 뒤의 작은 톱니바퀴가 회전하자 빈 눈구멍에는 검푸른 빛이 차올랐다.
카엘은 손가락 끝으로 코어 하우징의 압력을 쟀다.
붉은 과열선이 올라오려는 순간 그는 오른쪽 흉갑의 보조 룬을 열었다. 압력이 손바닥 감각로로 빠져나갔다. 레오노르의 손가락이 떨렸지만 코어는 깨지지 않았다.
"무겁군."
그녀가 말했다.
"좋은 몸은 원래 적당히 무겁습니다."
카엘은 은빛 장검을 손잡이부터 그녀의 손에 맞췄다. 프레임의 손가락이 장검을 받아 들었다. 이번에는 연습검이 아니었다. 아직 무딘 날이지만 자신의 검이었다.
레오노르의 무릎 잠금핀이 풀렸다.
모르가트 교수의 막대가 바닥을 긁었다.
"서려는 건가."
프레임의 발끝이 바닥 룬에 닿았다.
첫걸음은 흔들렸다. 두 번째는 무게를 찾았다. 세 번째에 그녀는 완전히 섰다.
소형 인형의 세 걸음과는 달랐다.
이것은 평가 조건을 만족시키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죽음에서 돌아온 기사가 새 몸의 균형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순간이었다.
레오노르가 장검을 세웠다. 날 없는 검끝이 바르토스를 향하지 않고 바닥을 향했다. 그것만으로도 위협은 충분했다.
"나는 레오노르 폰 바르크."
금속 목소리가 공방 안에 울렸다.
"썩은 살도 검은 사슬도 거부한다. 이 몸을 만든 자와 계약한다."
바르토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카엘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카엘 로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 전장은 어디지."
모르가트 교수가 명부를 천천히 접었다.
"아카데미 정기 평가가 곧 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시체 언데드와의 대련 항목도 포함되어 있지."
바르토스가 이를 드러냈다.
"좋다. 그때 보자. 금속 인형이 진짜 죽음 앞에서도 기사 흉내를 낼 수 있는지."
레오노르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죽음은 흉내 내는 것이 아니다."
카엘은 장갑 끝을 정리했다.
"그리고 썩은 고기는 전장이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하지요."
그 말에 실습생들 중 누군가가 결국 웃음을 삼키지 못했다.
바르토스는 돌아섰다. 검은 예복 자락이 공방 문턱을 스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 오염도 남기지 못했다.
레오노르는 세 번째 걸음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카엘의 옆에 서서 은빛 장검을 내려다보았다.
"날이 없다."
"정기 평가 전까지 맞춰 드리겠습니다."
"날을 세우면 먼저 무엇을 벨 생각이지."
카엘은 실습동 쪽에서 흘러오는 썩은 냄새를 느끼고 아주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가능하면 냄새부터요."
레오노르의 금속 손가락이 검 손잡이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녀의 빈 눈구멍 안쪽에서 오래된 전장의 어둠이 조금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