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9화: 48시간의 질주
늦은 밤, 강지혁의 고급 세단이 매끄러운 엔진음을 내며 한남동 저택의 삼엄한 철문을 빠져나왔다.
차 안을 채운 것은 무겁고 가라앉은 침묵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주기적으로 창을 타고 들어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비췄다. 지혁은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끝을 가만히 매만지며 전방만을 주시하고 있었고, 은우는 보조석 창가에 기대어 차갑게 식은 유리창 너머로 흘러가는 도심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식사 자리에서 은우가 던졌던 서늘하고 단호한 한마디가 여전히 차 내부를 유령처럼 맴돌고 있었다.
“아버님, 저는 지혁 씨를 사랑해서 이 결혼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혁 자신이 먼저 제안했고, 계약서 제5조에도 명시된 명확한 사실이었다.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서로의 효용을 교환할 뿐, 사적인 감정은 철저히 배제한다는 조건. 그러나 정작 은우의 입술을 통해 회장 앞에서 그 명확한 한계선이 그어졌을 때, 지혁은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하게 울리는 씁쓸함을 느꼈다.
스스로가 원했던 완벽한 비즈니스 동업 관계. 하지만 왜 이리 마음 한쪽이 시려오는 것인지, 지혁은 스스로도 그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묵묵히 속도만을 높였다.
두 사람이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지혁의 펜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모던하고 미니멀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넓은 거실은 온통 차가운 대리석과 무채색 톤으로 가득 차 있어, 마치 사람이 사는 공간이라기보다 갤러리의 쇼룸 같았다. 은우는 거실 소파 테이블 위에 자신의 노트북을 펼쳐놓고 서둘러 신성생활 ‘에어핏’ 가습기 사태에 관한 기초 자료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48시간. 강태준 회장이 부여한 시한은 이미 가차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커피입니까, 차입니까?”
등 뒤에서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우가 고개를 돌리자, 재킷을 벗고 흰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지혁이 머그잔 두 개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따뜻한 보리차입니다. 밤새우려면 카페인보다는 수분 섭취가 나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전무님.”
은우는 지혁이 건넨 머그잔을 받아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자 몸에 쌓여 있던 피로가 조금은 씻겨나가는 듯했다. 지혁은 자연스럽게 은우의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최민규 과장이 긴급하게 공유해 준 신성생활의 내부 재무 제표와 부품 공급망 보고서를 은우의 노트북 옆으로 밀어주었다.
“신성생활의 김성태 대표는 강지성 부사장의 외가인 대성그룹과 줄이 닿아 있는 인물입니다. 이번 에어핏의 런칭 역시 지성 형의 지휘 아래 급박하게 추진되었죠. 리테일 매장의 혁신 실적을 보여주기 위해 무리하게 출시일을 앞당긴 겁니다.”
지혁의 설명에 은우는 노트북 화면의 부품 단가 원가 대조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역시 그렇군요. 부품 공급망 목록을 보니 스파크의 원인이 된 핵심 모터 콘덴서가 기존에 신성이 사용하던 검증된 협력사 제품이 아니에요. 단가가 무려 40%나 낮은 저가 외주 업체의 부품으로 대체되었네요. 부사장님이 대외적으로 '경영 효율화'와 '원가 절감 15%'를 자랑하셨던 그 실체의 이면이 바로 이 불량 부품이었던 겁니다.”
은우의 목소리가 한층 차분하고 정교해졌다.
“문제를 숨기거나 단순 기기 오작동으로 덮으려는 김성태 대표의 대응 방식은 전형적인 소탐대실입니다. 요즘 소비자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한 명이 유튜브에 전류 스파크 영상을 올리는 순간, 수억 원의 홍보비로 쌓아 올린 신성의 신뢰도는 단숨에 살해당합니다. 우리의 기획은 정면 돌파입니다.”
“정면 돌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지혁이 턱을 괸 채 은우를 깊은 눈으로 응시했다.
“문제를 먼저 솔직하게 고백하고 전량 리콜을 감행하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내지 않고, 소비자가 직접 에어핏의 안전 부품 설계와 기능 개선 과정에 아이디어를 내고 참여하는 '소비자 참여형 안심 캠페인'을 발족할 겁니다. 결함을 감추는 기업이 아니라,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고객과 함께 더 완벽한 제품을 완성해 나가는 투명한 기업이라는 스토리를 입히는 거죠.”
은우의 눈동자가 밤 조명 아래에서 투명하게 빛났다. 지혁은 자신의 안위보다 신성이라는 가문 전체의 브랜드 신뢰를 먼저 걱정하고, 위기를 기회로 치환하려는 은우의 명석함에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경탄을 삼겼다.
“리콜 비용만 대략 150억 원이 소요될 겁니다. 신성생활의 올해 영업이익의 상당 부분을 날려야 하는 결정이라, 내일 아침 본사 미팅에서 임원들의 반발이 극에 달할 겁니다.”
지혁이 냉정하게 현실적인 제약을 짚었다. 은우는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
“150억 원을 아끼려다 브랜드 가치 1,500억 원을 잃는 파산을 막는 것이 전략기획실의 역할 아닙니까? 임원들의 반발은 전무님과 제가 힘을 합쳐 누르면 됩니다. 지성 부사장의 눈치를 보느라 회사를 좀먹는 자들에게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줘야죠.”
은우가 말한 ‘우리’라는 단어에 지혁의 가슴속 씁쓸함이 묘하게 정화되었다. 그래, 비록 감정이 섞이지 않은 계약 부부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은우의 유일한 방패이자 칼날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는 자신뿐이었다.
“좋습니다. 내일 아침 9시, 신성생활 대회의실로 들어가죠. 서 대표가 설계한 무기를 던지면, 판을 깨부수는 것은 내가 맡겠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단단하게 얽혔다. 48시간의 제한 시간 중 첫 12시간이 그렇게 밤샘 기획과 함께 속절없이 흘러갔다.
다음 날 오전 9시, 서울 신성생활 본사 18층 대회의실.
방 안의 공기는 무겁다 못해 질척거렸다. 회의실 테이블 양옆으로 신성생활 김성태 대표를 비롯한 상무, 전무급 임원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어둡고 적대적이었다. 특히 상석에 앉은 김성태 대표는 팔짱을 낀 채 은우를 흘겨보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지혁 전무님, 바쁘신 와중에 계열사 일에 신경 써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만…….”
김성태 대표가 가래 끓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고작 인터넷 커뮤니티의 검증되지 않은 글 몇 개 때문에 런칭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신제품을 전량 리콜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게다가 이 기획안을 작성한 곳이 신규 마케팅 스튜디오 W&U 랩이라고요? 회장님 댁 며느님이 되신 분의 취미 생활에 우리 신성생활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이번 건은 기존 홍보팀의 가이드대로 언론사 광고 협조를 통해 기사를 막고, 피해 소비자에게 개별 보상안을 제시하는 선에서 조용히 정리하겠습니다.”
김성태의 비아냥거리는 태도에 회의실 안의 임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은우를 재벌가 남편의 등 뒤에 숨어 마케팅 놀이나 하러 온 철부지 취급하는 눈빛들이었다.
은우는 서두르지 않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는 프리젠터 포인터를 쥐고 대형 스크린 화면을 켰다. 화면 위로 실시간 유튜브 조회수와 각종 맘카페의 글들이 차례로 스캔되어 나타났다.
“김 대표님. 방금 언론사 광고 협조로 막으시겠다고 하셨습니까?”
은우의 목소리는 다이닝룸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리처럼 투명하고 정갈했으나, 그 깊은 곳에는 차가운 서리가 서려 있었다.
“과거의 아날로그 방식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유튜브와 틱톡에는 에어핏 스파크 관련 숏폼 영상의 조회수가 통합 500만 뷰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대표님이 광고비로 수십억을 살포해 기사를 막는 동안, 소비자들이 직접 유통하는 날것의 위험 정보는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확산되고 있단 뜻입니다. 만약 그 스파크가 영유아가 자는 방에서 진짜 화재로 이어진다면, 그때도 기기 오작동에 따른 개인 과실로 몰아가실 생각입니까?”
은우의 날카로운 일갈에 김성태의 뺨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그, 그건 극단적인 가정이고……!”
“극단적인 가정이 아니라 당장 오늘 오후에 터질 수 있는 실제 위험입니다. 소비자 안전 문제를 은폐하려다 기업 전체가 파산한 글로벌 사례들을 제가 이 자리에서 일일이 나열해 드려야겠습니까? W&U 랩이 제안하는 안심 캠페인은 비용 낭비가 아닙니다. 불통의 기업 이미지를 신속하게 걷어내고, 소비자의 신뢰를 재구축해 향후 버전 2의 시장 점유율을 90% 이상 방어해 낼 유일한 브랜딩 솔루션입니다.”
은우는 정확한 수치와 리스크 비용 분석 자료를 차례로 제시하며 회의실의 공기를 완전히 장악해 나갔다. 임원들의 눈빛이 적대감에서 당혹감과 긴장감으로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은우의 말에는 반박할 수 없는 팩트와 마케팅의 정수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성태는 여전히 자존심을 꺾지 않고 지혁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전무님! 아무리 회장님의 임시 승인이 있었다고 하나, 일개 마케팅 대행사의 의견에 밀려 계열사 대표인 제 권한을 무시하고 무모한 리콜을 강행하시는 것은 이사회에서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지성 부사장님께서도 이번 사태의 조용한 수습을 당부하셨습니다!”
지성 부사장의 이름을 팔아 지혁을 압박하려는 비겁한 폭탄 선언이었다.
바로 그 찰나, 묵묵히 앉아 있던 지혁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지혁이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툭 내려놓는 순간, 회의실 내의 모든 호흡이 멎었다. 지혁의 무표정한 얼굴과 그 너머의 호랑이 같은 서늘한 눈빛이 김성태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김 대표.”
지혁의 단정하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회의실 안을 얼음장처럼 차갑게 적셨다.
“지금 내 아내이자 W&U 랩의 서 대표에게 목소리를 높이신 겁니까? 아니면 회장님의 특별 승인을 받아 이 자리에 선 전략기획실의 권한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전, 전무님. 그게 아니라…….”
“강지성 부사장의 당부가 신성의 법보다 위에 있습니까? 어제 만찬 자리에서 아버님께서 신성건설의 미수금 1,200억 원 장부 왜곡 건으로 부사장 직속 재무팀을 감사하라고 지시하신 사실을 정녕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지혁은 의자를 뒤로 밀며 김성태의 코앞까지 상체를 밀착해 나갔다.
“김 대표가 원가 절감이라는 미명 하에 저가 부품 조달을 최종 결재하며 얻은 리베이트 내역과, 이번 스파크 사태를 은폐하기 위해 살포하려던 홍보비 예산안 초안 역시 내 손에 쥐여 있습니다. 지금 당장 서 대표의 기획안에 서명하고 리콜 절차에 협조하겠습니까, 아니면 오늘 오후에 신성건설에 이어 신성생활 재무 감사팀의 정식 방문을 받으시겠습니까?”
김성태의 얼굴이 단숨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방울져 떨어져 회의 테이블 위를 적셨다. 지혁이 내민 칼날은 은우가 설계한 완벽한 논리 위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의 목덜미를 베어내고 있었다.
회의실 안의 그 누구도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지혁은 만년필을 김성태의 손앞에 탁 던졌다.
“서명하십시오. 3초 줍니다.”
결국 김성태의 사르르 떨리는 손끝이 만년필을 쥐고 리콜 및 안심 캠페인 승인서 하단에 서명을 남겼다.
전쟁 같던 회의가 끝나고 임원들이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나가자, 은우는 비로소 노트북을 닫으며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혁은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은우에게 다가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고했습니다, 서 대표. 정말 완벽한 PT였습니다.”
“전무님의 확실한 백업 덕분입니다. 동업자로서 아주 든든했습니다.”
은우가 지혁을 바라보며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와 파트너십이 한층 더 굳건해진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회의실 문이 다급하게 열리며 최민규 과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태블릿 PC가 쥐여 있었다.
“전무님, 서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방금 전 모 인터넷 경제 매체에서 악의적인 단독 보도가 송출되었습니다!”
민규가 다급하게 화면을 제시했다. 화면 가득 띄워진 헤드라인 기사가 두 사람의 눈동자에 붉은 경고등처럼 박혔다.
[단독] 신성그룹 후계 구도 싸움 점입경개…… 재벌 3세 강지혁 전무, 실적 쌓기용 ‘무리한 리콜 강행’으로 신성생활 파탄 위기 몰고 가나?
기사의 내용은 교묘하고 악의적이었다. 제품의 미세한 결함을 후계자 자질 평가를 앞둔 지혁 부부가 자신들의 ‘정의로운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과장하여 억지 리콜을 강행했으며, 이로 인해 신성생활의 소액 주주들과 협력사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되었다는 프레임이었다.
배후에 강지성 부사장의 검은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48시간의 제한 시간 중 남은 시간은 단 36시간.
제품의 결함이라는 기업의 위기가, 순식간에 두 사람의 탐욕과 경영 자질 부족이라는 오너 리스크로 둔갑하여 여론의 화살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은우와 지혁의 시선이 허공에서 다시 한 번 강하게 마주쳤다.
새로운 심연이 그들의 발밑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