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8화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8화: 첫 가족 만찬

육중한 두 짝의 마호가니 문이 양옆으로 열리자, 로비보다 한층 더 무겁고 숨 막히는 침묵이 지배하는 다이닝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황금빛 샹들리에는 눈이 시릴 정도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아래를 흐르는 공기는 마치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길게 뻗은 마호가니 식탁의 상석에는 신성그룹의 절대 권력자이자 지혁의 아버지인 강태준 회장이 묵직한 석상처럼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의 짙은 눈썹 아래로 벼려진 호랑이 같은 눈동자가 들어서는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날카롭게 감시했다.

회장의 오른편에는 신성문화재단 이사장이자 지혁의 어머니인 이명희 여사가 우아한 기품을 유지한 채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은우를 향해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엷은 안도의 기색을 보냈으나, 회장의 왼편에 앉은 강지성 부사장의 안색은 그와 정반대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로비에서 은우가 던진 건설 미수금 지표에 허를 찔려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탓이었다.

은우와 지혁은 나란히 명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은식기들이 샹들리에 조명을 받아 차갑게 반짝였고, 격식에 맞춘 코스 요리가 서빙되기 시작했다. 맑은 수프가 개인 접시에 담기고 첫 숟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하자마자, 강지성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냅킨으로 입가를 거칠게 닦아내며 태준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로비에서의 당혹감을 만회하려는 듯, 그의 목소리에는 악의적인 확신이 가득 실려 있었다.

“아버지, 아무래도 지혁이의 이번 결혼은 짚고 넘어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석 달 뒤에 있을 이사회와 후계 평가를 앞두고 마음이 조급했던 모양입니다만, 그래도 가문의 격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제일기안에서 성희롱 논란이나 일으키고 제 발로 기어 나온 평범한 마케터 따위를 신성가의 안주인으로 앉히다니요. 심지어 집안 꼬락서니는 더 가관입니다.”

지성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는 품 안에서 미리 준비해 둔 서류 봉투를 꺼내 테이블 중앙으로 툭 던졌다.

스르륵 흘러나온 서류의 맨 앞 장에는 붉은색 고무인으로 ‘가처분 압류 신청’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서은우 씨 부모님이 운영하는 지방의 작은 인쇄소 압류 서류 사본입니다. 수억 원대 부채를 해결하지 못해 조만간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지경이더군요. 지혁이가 신성리테일의 자금을 유용하든, 개인 자산을 털든 처가의 구차한 빚더미를 정리해 주는 대가로 맺은 파렴치한 계약 결혼이 분명합니다. 아버님을 속이고 가문을 모욕하는 대국민 사기극입니다!”

순간 다이닝룸 안의 모든 움직임이 뚝 멈췄다.

서빙을 돕던 직원들마저 숨을 죽인 채 벽 쪽으로 물러섰다. 지혁의 온몸이 섭씨 영하의 온도로 급격히 얼어붙었다. 숟가락을 쥔 지혁의 손끝에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강한 힘이 들어갔다. 그의 턱관절이 잘게 떨리며, 지성을 향해 칼날 같은 폭언을 내뱉기 직전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바로 그 찰나, 식탁 밑으로 은우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 지혁의 소맷자락을 덮어왔다.

지혁이 놀라 고개를 돌리자, 은우가 조용히 눈을 맞추며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지혁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 정도의 유치한 네거티브는 본인 선에서 가볍게 찢어발길 수 있다는 무언의 확신이었다. 은우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차분한 온기에 지혁의 끓어오르던 분노가 신기할 정도로 가라앉았다. 지혁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은우에게 주도권을 넘겼다.

은우는 허리를 곧게 편 채, 테이블 위에 흩어진 압류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가락 끝으로 서류의 모서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녀의 입가에는 여전히 우아하고 단정하기 이를 데 없는 비즈니스용 미소가 걸려 있었다.

“부사장님, 저희 부모님의 소박하지만 평생을 정직하게 일구어 오신 인쇄소 가업에까지 이토록 깊은 관심을 기울여 주시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은우의 목소리는 유리잔을 부딪치는 소리처럼 맑고 정갈하게 울렸다.

“하지만 기왕 귀한 인력을 써서 뒷조사하셨다면, 사실관계의 선후 정도는 정확히 파악하셨어야 했습니다. 해당 채무는 저희 부모님의 방만 경영으로 발생한 채무가 아닙니다. 신성건설의 하청업체 중 한 곳이 고의적으로 대형 어음을 부도내고 잠적하면서 발생한 일시적인 연쇄 피해일 뿐입니다. 이미 저희 법률 대리인을 통해 불법 채권 추심에 대한 법적 대응과 합법적인 채무 조정 절차를 개시했으니, 부사장님께서 밤잠을 설치며 걱정하실 만큼 가문의 명예를 훼손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은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잔잔한 눈빛으로 지성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화가 날수록 존댓말이 정중해지고 논리가 날카로워지는 은우 특유의 화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오히려 제가 걱정되는 것은 신성그룹의 대외적 신뢰도입니다. 부사장님께서 남의 집안 사소한 가계부를 수집하실 시간에, 본인이 직접 지휘하신 신성건설의 ‘헤리티지 빌’ 미수금 1,200억 원에 대한 회수 대책을 세우셨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지성의 눈썹이 일순 흉하게 뒤틀렸다.

“……뭐라? 네까짓 게 감히 어디서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게냐!”

“허위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번 주 이사회 보고서와 금융감독원 공시 대조표를 비교해 보면 바로 드러날 텐데요. 지난 분기 대대적으로 런칭했던 프리미엄 주거 브랜드 헤리티지 빌은 현재 분양률이 20%도 채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시행사와 부사장님의 무리한 일정 단축 지시로 발생한 공정 지연 미수금 1,200억 원을, 부사장님 직속 재무팀에서 고의로 상각 처리하지 않고 이월시키며 장부를 왜곡해 오셨더군요.”

은우는 식기 하나 흔들지 않는 차분한 자세로 정확한 수치와 전문적인 경영 용어들을 나열해 갔다.

“이 부실 지표가 투명하게 반영되는 순간, 신성건설의 신용 등급 강등은 물론 그룹 전체의 주가 폭락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인의 심각한 경영 실책과 배임에 가까운 장부 누락을 덮기 위해, 고작 피해자일 뿐인 저희 친정의 소액 채무 서류를 아버님 식탁 위에 들이미는 행동은…… 참으로 조잡하고 수준 낮은 주의 분산 마케팅이라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너, 너…… 이 미친 여자가 어디서 감히……!”

지성이 이성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지르려던 찰나였다.

쾅!

식탁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묵직한 소음이 다이닝룸을 찢어발겼다. 강태준 회장이 손바닥으로 식탁을 무겁게 내리친 것이었다. 태준의 얼굴에는 깊은 분노와 함께 지성의 한심함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이 서려 있었다.

“앉아라.”

태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지성의 심장을 얼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지성은 입을 벌린 채 얼어붙었다가, 태준의 서늘한 시선에 짓눌려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태준은 지성을 더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문가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실장에게 나직하게 명했다.

“당장 건설 재무본부장 내 방으로 대기시켜라. 신성건설 미수금 장부 원본과 헤리티지 빌 이월 처리 내역 전부 들고 오라고 해. 10분 준다.”

“예, 회장님.”

비서실장이 바람처럼 방을 빠져나가자, 다이닝룸 안에는 한층 더 차갑고 날카로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혁의 옆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은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은우는 지성의 서류 봉투를 치우지도 않은 채, 태준의 매서운 호랑이 같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받아냈다.

“서은우라고 했나.”

“예, 아버님.”

“네가 신성의 대외비 수치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묻지 않겠다. 그 또한 네 실력의 일부일 테니까. 하지만 네가 내 아들 지혁이와 결혼해 이 가문의 문턱을 넘은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는 내 직접 들어야겠구나. 지혁이의 배경을 디딤돌 삼아 친정 빚을 갚고 신분 상승을 꿈꾸는 속물적인 욕망 외에 다른 목적이 있나?”

태준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본질을 시험하려는 오만한 실리주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어설픈 거짓 눈물이나 사랑의 증명 따위는 통하지 않는 자리였다. 이명희 여사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찻잔을 들었고, 지혁은 주먹을 꽉 쥔 채 은우의 입술을 주목했다.

은우는 잠시 호흡을 고른 뒤, 단호하면서도 명확한 어조로 거침없이 답변을 쏟아냈다.

“아버님, 저는 지혁 씨를 사랑해서 이 결혼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신성의 자금으로 제 개인적인 부채를 해결할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폭탄 같은 은우의 첫마디에 지성의 얼굴에 순간 비열한 희열이 감돌았으나, 은우의 논리는 멈추지 않았다.

“저는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지혁 씨와 철저한 계약을 맺었습니다. 지혁 씨에게는 이번 후계자 자질 평가를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 안정된 가정을 입증할 유능한 동반자가 필요했고, 제게는 제일기안을 벗어나 제 이름으로 된 독립 마케팅 회사 ‘W&U 랩’을 세우기 위한 초기 자금과 확실한 첫 번째 대기업 레퍼런스가 필요했습니다. 이 결혼은 양측의 명확한 니즈를 정확히 교환하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비즈니스적 협업’입니다.”

은우는 태준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감정에 기반한 관계는 언제든 흔들리고 깨어지기 쉽지만, 서로의 효용 가치와 계약에 기반한 파트너십은 그 어떤 결속보다 견고합니다. 저는 제 마케팅 능력으로 신성리테일의 브랜드 혁신 성과를 만들어 지혁 씨의 가치를 완벽하게 입증해 보일 것입니다. 그 대가로 저는 회사의 경영권과 크리에이티브의 완전한 독립성을 보장받았습니다. 가짜 사랑을 연기하는 것보다, 서로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동업 관계가 신성의 미래에도 훨씬 더 실리적인 선택이 아닙니까?”

은우의 거침없고 명료한 비즈니스 동업론이 다이닝룸의 높은 천장을 때렸다.

지혁은 은우의 당당함에 경탄하는 한편, 사랑이나 감정 따위는 배제한 ‘철저한 계약 관계’라는 그녀의 선 긋기에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씁쓸한 낙차가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지혁 스스로 제안한 조건이었음에도, 막상 은우의 입을 통해 직접 흘러나오는 명확한 경계선은 그의 마음을 은근히 찌르고 지나갔다.

그러나 태준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태준의 굳어 있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이내 나직하고 허탈한 헛웃음이 식탁 위에 내려앉았다.

“허…… 동업이라. 서로의 효용 가치를 교환하는 견고한 계약이라.”

태준은 턱을 괸 채 은우를 깊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사랑이니 운명이니 하는 달콤한 거짓말로 내 눈을 속이려 드는 하찮은 연극보다 백배는 낫군. 적어도 네가 네 밥값 이상의 능력을 증명할 생각이라는 점은 마음에 든다. 좋다. 1년의 기한 동안 네가 약속한 성과를 지혁이와 함께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 내 직접 지켜보마.”

태준의 사실상의 혼인 묵인 선언에 지성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명희는 조용히 차를 머금으며 은우를 향해 우아하게 눈짓했다. 로비에서의 도발부터 식탁 위의 잔혹한 시험대까지, 은우는 오직 자신의 실력과 담대함만으로 신성가의 본진을 완전히 장악해 내고 있었다.

식사가 거의 마무리되고 마무리 홍차가 서빙되려던 그 순간이었다.

문이 갑작스럽게 벌컥 열렸다.

수행비서인 최민규 과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급히 다이닝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민규는 태준과 지혁에게 빠르게 다가가 태블릿 화면을 제시하며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귓속말이었으나 다이닝룸의 고요한 공기 탓에 은우의 귀에도 내용이 고스란히 얹혔다.

“회장님, 전무님. 긴급 사태입니다. 그룹 계열사인 신성생활의 신제품 가습기 ‘에어핏’에서 심각한 전류 누전 및 작동 중 스파크가 발생한다는 소비자 폭로 글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인터넷 주요 커뮤니티마다 환불 요구와 비난 여론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으며, 실시간 검색어와 경제 뉴스에 관련 보도가 송출되기 시작해 관련 주가가 급락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지혁이 즉시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초기 대응 상황은?”

“신성생활 임원진은 일단 제품 결함을 부정하고, 기기 오작동에 따른 개인 과실로 몰아가며 언론 노출을 통제하려 하고 있습니다.”

민규의 보고에 지성이 흙빛 안색을 지우고 기회를 잡았다는 듯 쏘아붙였다.

“지혁아, 신성생활의 신제품 라인은 네 전략기획팀에서 런칭 승인해 준 게 아니냐? 런칭하자마자 이런 치명적인 불량품 사태가 터지다니, 네가 자랑하던 브랜드 혁신의 실체가 고작 대국민 전류 스파크였단 말이냐?”

태준의 이마에 굵은 내천(川) 자 주름이 잡혔다. 제품의 하자보다 위기를 은폐하려는 계열사 임원들의 구태의연한 태도가 회장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 팽팽한 위기의 순간, 은우가 자리에서 단호하게 일어났다.

“아버님, 문제를 숨기거나 개인 과실로 덮으려는 낡은 언론 플레이는 신성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완전히 살해하는 행위입니다. 소비자는 제품의 일시적 결함보다, 기업의 기만적인 대처에 백배는 더 분노하고 등을 돌립니다.”

은우의 단호한 일갈에 태준이 시선을 돌려 은우를 바라보았다.

“그럼 네 대안은 무엇이냐?”

“제게 48시간을 주십시오.”

은우는 지혁과 시선을 교환하며 강한 동업자적 신뢰를 나눈 뒤, 태준을 향해 당당하게 선언했다.

“신성이 결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전량 리콜을 감행하는 동시에, 소비자가 직접 제품 개선 과정에 아이디어를 내고 참여하는 신뢰 개선 캠페인을 기획하겠습니다. W&U 랩의 첫 프로젝트로 이 위기를 신성의 가장 강력한 마케팅 성공 사례로 바꾸어 보이겠습니다. 48시간 뒤, 완벽한 수습 기획안을 회장님 앞에 가져오겠습니다.”

은우의 서늘하고 맑은 눈동자에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지혁 역시 은우의 곁에 나란히 서며 태준을 향해 단단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도 서 대표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책임지고 리테일 및 유통 라인의 전방위 백업을 지원하겠습니다. 아버님, 기회를 주십시오.”

태준은 두 사람의 한 치의 틈도 없는 단단한 연대와 은우의 거침없는 기세를 흥미롭게 응시했다. 마침내 태준이 묵직하게 턱을 끄덕였다.

“좋다. 딱 48시간을 주마. 만약 실패한다면, 이 결혼의 효용 가치도, 네 회사의 존재 이유도 신성 안에서 영원히 사라질 거다.”

진짜 시험대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은우와 지혁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며 서로를 향한 투지와 깊은 신뢰가 스파크처럼 튀어 올랐다. 48시간의 시간제한 속에서, 두 사람의 첫 비즈니스 전쟁이 화려하게 막을 올리고 있었다.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