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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7화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7화: 이름 없는 가치

은우의 서늘하고 맑은 시선이 원목 테이블 위에 단정하게 나열된 네 개의 백자 찻잔을 천천히 훑었다.

성북동 신성미술관 3층 다실 안에는 오직 무쇠 솥에서 찻물이 끓어오르는 낮고 부드러운 소리만이 흐르고 있었다. 창바깥으로 보이는 대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리며 창가에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은우의 맞은편에 앉은 이명희 여사는 고요히 끓어오르는 수증기 너머로 팔짱을 낀 채, 미동조차 없이 은우의 안색을 살폈다. 조금이라도 흔들리거나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인다면, 그 즉시 신성의 문턱 밖으로 밀어내겠다는 명백한 거부감이 그녀의 칼날 같은 눈빛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은우는 결코 성급하게 손을 뻗지 않았다. 제일기안 마케팅 팀장 시절, 수천억 원짜리 프로젝트의 PT를 앞두고 심사위원들의 날카로운 검증을 마주했을 때처럼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앞의 찻잔들은 언뜻 보기에는 모두 비슷하게 수수하고 투박한 백자였다. 하지만 은우의 눈에는 사물이 지닌 미세한 형태적 왜곡과 질감의 차이가 렌즈를 확대한 것처럼 선명하게 들어왔다.

첫 번째 잔.
그것은 지나치게 대칭적이었으며, 빛을 반사하는 흰 표면이 거울처럼 매끄러웠다. 현대식 정밀 기계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깎아낸 듯한 완벽한 원형의 미학이었다. 하지만 그 완벽한 규칙성 때문에 도리어 가마의 온기를 타지 않은 인공적인 차가움이 묻어났다.

두 번째 잔.
유약 표면에 미세한 빙열(氷裂) 무늬가 촘촘하게 퍼져 있었다. 천 년 전 관요에서 구워낸 골동품처럼 세월의 깊이를 흉내 냈지만, 은우의 시선에 비친 그 미세한 균열들은 도리어 규칙적이고 획일적이었다. 유약의 팽창 계수를 억지로 조절해 연출한, 인사동 골목의 흔한 복제품에서 느껴지는 조급함이었다.

세 번째 잔.
굽 부분이 덜 다듬어진 것처럼 거칠고 투박했다. 일부러 자연스러운 전통의 가치를 모방하려 애쓴 흔적이었으나, 정작 손으로 쥐었을 때 손가락 끝이 닿는 안쪽 굽의 모서리가 다듬어지지 않아 지나치게 거칠고 뾰족했다. 그것은 사용하는 사람의 손길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전통적이어 보이기만’ 하도록 빚어낸 관상용 복제품이었다.

은우가 마침내 네 번째 잔을 향해 부드럽게 오른손을 뻗었다.

가만히 손바닥 안으로 들어오는 백자의 곡선은 완벽한 대칭을 이루지 않고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나 잔을 가볍게 쥐어 올린 순간, 은우의 손끝에 닿은 감촉은 놀라우리만치 부드럽고 따뜻했다.

굽 부분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보이지 않는 안쪽 모서리까지 둥글고 부드럽게 다듬어져 있어, 손가락으로 잔을 지탱했을 때 무게 중심이 아래로 묵직하게 가라앉으며 가장 편안한 각도를 만들어냈다.

빛깔 또한 인공적인 순백색이 아니었다. 은은하고 온화한 유백색(乳白色). 마치 가을 햇살 아래 잘 건조된 부드러운 면사나, 우유를 아주 미세하게 섞은 듯 부드럽고 포근한 온기가 맴도는 우윳빛이었다.

은우는 네 번째 찻잔을 조심스럽게 들어 명희의 정면으로 제시했다.

“이 네 번째 잔이 바로 이사장님께서 후원하시는 무명 공예가분의 진짜 작품입니다.”

명희의 단정하게 모아 쥔 하얀 손끝이 순간적으로 단단하게 굳어졌다. 다실을 지배하던 서늘한 긴장감이 은우의 흔들림 없는 선언에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명희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은우는 네 번째 잔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채, 조목조목 이성적인 분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잔은 오차 없는 정밀 가마에서 생산된 완벽한 대칭형 복제품입니다. 기술적으로는 훌륭하지만, 흙을 빚은 사람의 고민이 담기지 않아 잔을 쥘 때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듭니다. 두 번째 잔의 빙열은 냉각 속도를 억지로 변형시켜 만들어낸 인위적인 무늬에 불과합니다. 진짜 세월을 견딘 흔적이 아니라, 대중에게 골동품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기성 브랜드의 얕은 포장지와 같습니다.”

은우가 잔의 바닥면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세 번째 잔 역시 겉보기에는 전통적인 투박함을 살린 듯하지만, 굽의 안쪽 마무리가 날카롭습니다. 정작 이 잔에 차를 담아 입술에 댈 사람의 손가락 통증을 배려하지 않은 위선적인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 네 번째 잔은 다릅니다.”

은우는 손가락 끝으로 유백색 표면의 미세한 굴곡을 짚었다.

“전기가마가 아닌 전통 장작가마에서 구워냈기에, 불길과 소나무 재의 편차가 만들어낸 깊이 있는 유백색을 띠고 있습니다. 완벽한 백색이 아니기에 더 온화한 분위기를 뿜어내지요. 무엇보다 보이지 않는 굽 안쪽까지 둥글고 부드럽게 다듬어져 있습니다. 이는 잔을 감상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이 매일 편안하게 차를 마시기를 바란 공예가의 오랜 정성과 배려입니다. 마케팅으로 치면, 겉포장만 화려한 브랜드가 아니라 소비자의 본질적인 사용 경험에 집중한 진짜 가치입니다.”

은우의 차분하고 거침없는 설명이 끝난 뒤, 다실 안에는 기묘할 정도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명희는 오랜 시간 동안 말없이 은우의 안색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은우는 그 검증의 시선에서 도망치지 않고, 꼿꼿하게 등줄기를 편 채 명희와 시선을 눈빛으로 맞받았다.

이윽고 명희의 굳어 있던 얇은 입술 끝이 서서히 호선을 그리며 풀려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상대의 어설픈 대답을 비웃는 실소가 아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짙은 감탄과 흥미의 표시였다.

“……놀랍구나, 정말로.”

명희가 작게 탄식하며 무쇠 솥 옆의 찻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그동안 내 비위를 맞추겠다며 사교계의 숱한 명문가 자제들이 이 다실을 다녀갔다. 그들은 내 취향을 공부한답시고 도자기의 역사나 유명 작가의 이름, 값비싼 골동품의 연도만 읊어대며 나를 흡족하게 만들려 애썼지. 하지만 잔 하나에 담긴 제작자의 태도와 손님을 향한 깊은 배려를 마케팅의 언어로 해석한 것은 네가 처음이다.”

명희가 은우의 빈 잔에 따스한 온기가 피어오르는 황차를 가득 채워주었다. 이번에는 잔을 건네는 손길에 아까와 같은 얼음 같은 차가움은 묻어나지 않았다.

“네 말이 맞다. 그 잔은 내가 오래전부터 조용히 후원해 오던 무명 옹기장이 '송필우' 작가의 초기작이다. 평생 명예나 이름값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쓰는 사람의 손길을 생각하며 정직하게 흙을 만지던 분이지. 세상 사람들은 겉면에 인쇄된 로고와 이름값에만 가치를 매기지만, 진짜 안목이란 숨겨진 본질을 정확하게 알아채는 힘이다. 너는 그 힘을 지니고 있구나.”

명희가 차를 한 모금 부드럽게 머금은 뒤, 은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번 테스트는 완벽하게 합격이다. 내 아들의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네 실력으로 입증해 보였어. 하지만 서은우 씨, 안목이 훌륭한 것과 이 거칠고 숨 막히는 신성가에서 살아남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당장 이번 주말에 있을 본가 만찬은 오늘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텐데, 버틸 수 있겠나?”

“어머님이 염려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은우가 찻잔을 두 손으로 조심히 받쳐 들며 평온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저는 숨어 다니거나 피해를 보며 자리를 유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지혁 전무님의 완전한 동업자로서, 제 몫의 방어선은 제가 확실하게 증명하고 지켜낼 것입니다.”

명희는 은우의 결연한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은근히 미소를 지었다.

면담이 모두 마무리되었을 때, 명희는 송필우 작가의 찻잔 두 개가 정갈하게 담긴 작은 오동나무 상자를 은우에게 직접 선물로 내밀었다. 은우는 이를 단순한 선물이 아닌, 자신을 향한 이사장님의 첫 번째 거래의 보증이자 암묵적인 지지로 받아들이며 기꺼이 상자를 품에 안았다.


신성미술관의 거대한 노출 콘크리트 철문을 밀고 나오자, 늦은 오후의 가라앉은 바람이 은우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이 일시에 풀어지며 몸에 은근한 피로감이 몰려오던 찰나, 은우의 시선에 로비 입구 한편에 서 있는 단정한 그림자가 포착되었다.

네이비색 롱 코트를 단정하게 걸치고, 로비의 거대한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남자. 강지혁이었다.

지혁은 회사 비서실의 긴급 회의가 예정되어 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미술관 로비 한복판에서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한 채 입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마에 아주 미세하게 맺힌 땀방울과 굳게 다물린 입술이 그가 이곳으로 얼마나 급박하게 차를 몰고 달려왔는지 웅변해 주는 듯했다. 은우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지혁의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 눈빛이 단숨에 봄눈 녹듯 느슨해졌다.

“전무님? 이 시간에 여기 어떻게…….”

은우가 놀란 눈으로 다가서자, 지혁은 조금 쑥스러운 듯 주먹으로 가볍게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회의를 최소한으로 단축하고 최 과장의 차로 서둘렀습니다. 어머니께서 단독으로 불러내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회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계약서 제9조에 명시된 명예와 신변의 방어 조항을 생각하면 당연히 내가 동행했어야 했는데…….”

지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은우가 들고 있는 작은 오동나무 상자로 가 닿았다. 그의 목소리 끝자락에는 감추지 못한 긴장과 염려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어머니가 많이 압박하시던가요?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렸다면 지금이라도 내가 직접 들어가서 어머니께……”

“아닙니다, 전무님.”

은우가 조용히 미소를 짓고는 오동나무 상자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오히려 선물을 받았습니다. 어머님께서 평생을 아끼며 후원해 오신 송필우 작가님의 백자 찻잔 세트입니다. 제 안목을 증명하는 테스트였는데, 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지혁의 두 눈동자가 흔치 않게 크게 동요했다.

“합격…… 했다고요? 어머니의 그 까다로운 감별 시험을?”

“네. 도자기의 화려한 이름값이 아닌 그 뒤에 숨겨진 공예가의 진심을 알아챈 덕분입니다. 어머님께서 제 분석 방식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지혁은 안도감과 신선한 경탄이 뒤섞인 오묘한 표정으로 은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머니 이명희 여사가 상류사회 사교계에서 얼마나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인물인지 누구보다 뼈저리게 아는 지혁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예고 없이 단독으로 소환해 내민 시험을, 아무런 도움도 없이 홀로 돌파하고 심지어 마음까지 열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지혁에게 커다란 전율을 선사했다.

“……역시 서은우 씨군요. 내가 주제넘게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

지혁의 건조한 입가에 드물게 엷고 다정한 낙차가 걸렸다.

“가시죠. 차로 모시겠습니다. 가는 동안 그 놀라운 시험 과정을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두 사람은 최민규 과장이 대기시켜 놓은 세단의 뒷좌석에 나란히 올랐다. 차가 부드럽게 성북동 언덕길을 내려가는 동안, 은우는 명희와 주고받았던 대화와 찻잔의 형태, 그리고 이를 통해 입증한 자신의 철학을 담담하게 복기했다.

지혁은 턱을 괸 채 은우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창밖의 풍경 대신 은우의 차분한 옆얼굴을 시선으로 좇았다. 사물의 숨겨진 맥락을 짚어내는 명석함, 그리고 기꺼이 자신의 전장에 홀로 나아가 승전보를 챙겨오는 그 당당함.

지혁은 어젯밤 차에서 내리며 은우의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단단히 끼어 밀착했던 순간을 불현듯 떠올렸다.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흘러들던 맥박의 파동이 아직도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이 여자는 단순한 쇼윈도 배우자가 아니었다.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신성이라는 거대한 진흙탕 속을 뚫고 나갈 유일하고도 신뢰할 수 있는 동업자였다.

“주말 본가 만찬은 오늘 미술관과는 공기 자체가 다를 겁니다.”

지혁이 낮고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강지성 부사장이 이미 사람을 풀어 서은우 씨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인쇄소의 상세 채무 현황과 거래선 부도 내역을 완전히 수집한 상태입니다. 만찬 자리에서 아버님 앞에 그 자료를 들이밀며, 이 결혼이 단순한 비즈니스 거래이자 사기극이라고 공격할 심산입니다.”

은우는 잠시 창밖의 붉은 노을빛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돌려 지혁을 마주 보았다.

“강지성 부사장의 공격은 참 얄팍하고 낡았습니다. 상대의 단점만을 돋보이게 하려는 전형적인 네거티브 마케팅이지요. 하지만 마케팅의 기본 공식 중 하나는,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보다 내 결함을 숨기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점입니다.”

은우의 입가에 벼려진 미소가 떠올랐다.

“전무님, 계약서에 따라 제 명예를 지켜주시는 것은 든든하지만, 이번 만찬은 제가 직접 칼을 쥐게 해주십시오. 강 부사장의 뒤통수를 찌를 정밀한 데이터는 이미 확보해 두었습니다.”

“어떤 데이터 말입니까?”

“신성건설이 지난 분기에 의욕적으로 런칭했던 프리미엄 주거 브랜드 '헤리티지 빌'의 미분양 수치와 가려진 미수금 1,200억 원에 관한 지표입니다. 부사장이 재무 계열사를 쥐고 흔들면서도 정작 자신의 대표 프로젝트가 안고 있는 파산을 내부 보고서에서 누락시켰더군요. 아버님 앞에서 그 미수금 지표를 아주 정중하고 우아하게 꺼내 들 생각입니다.”

지혁은 은우의 냉철하고도 한 치의 오차가 없는 대비책에 깊은 감탄을 삼켰다. 그녀는 이미 눈앞의 위기를 사냥할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좋습니다. 서은우 씨가 공격을 주도하면, 나는 뒤에서 윤 변호사와 함께 법률적 방어선과 주주들의 여론 동향을 빈틈없이 단속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단단한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며 비즈니스적 파트너십을 넘어선 끈끈한 연대의 고리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주말 저녁, 서울 한남동의 나지막한 언덕배기에 요새처럼 솟아 있는 강태준 회장의 저택 앞.

삼엄한 보안 요원들의 감시망을 지나 들어선 넓은 정원은, 수백 년은 족히 묵은 듯한 거대한 소나무들과 은은한 황색 정원등이 자아내는 압도적인 무게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리석으로 뒤덮인 로비에 발을 들이자마자, 웅장하지만 숨이 막힐 듯한 차가운 정적이 온몸을 내리눌렀다.

지혁과 은우가 나란히 들어서며 코트를 건네려던 그 찰나, 복도 안쪽의 어둠 너머에서 말끔한 더블 수트 차림의 남자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걸어 나왔다.

강지성 부사장이었다.

겉으로는 사교적이고 부드러운 엘리트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매 너머에는 지혁을 어떻게든 후계 구도에서 떨어뜨리겠다는 적의와 지독한 권력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이구, 우리 동생과 제수씨께서 드디어 본가 만찬에 발을 들이시는군.”

지성이 비아냥거리는 음성으로 다가와 은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학벌도 배경도 보잘것없는 분이 신성가라는 이 무거운 왕관을 머리에 얹으려니, 매일 밤잠은 제대로 설치고 계시는지 심히 염려가 됩니다. 듣자 하니 친정 인쇄소가 부도 직전이라 수억 대의 빚더미에 앉아 있다던데, 내 동생 지혁이가 참 속이 넓어서 그런 지저분한 처가 뒷수습까지 기꺼이 맡아주는 모양입니다?”

지성의 조롱조 섞인 목소리가 웅장한 로비 대리석 벽에 부딪히며 냉혹하게 퍼져 나갔다.

지혁의 온몸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어지며 눈동자가 차가운 분노로 급격히 빙결되었다. 지혁이 주먹을 쥐고 나서려던 찰나, 은우가 그의 단단한 팔뚝을 가볍고 부드럽게 제지하며 한 걸음 앞으로 당당하게 나아갔다.

은우의 고운 입술 끝에는 여전히 정중하고 예의 바른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겨울바람처럼 서늘하게 지성의 눈동자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부사장님, 저희 친정의 소박하고 정직한 인쇄소 가업에까지 이토록 깊고 따뜻한 관심을 가져주시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은우의 목소리는 로비의 무거운 침묵을 가르며 얼음물처럼 투명하게 울렸다.

“하지만 다른 가문의 소소한 사정을 수집하실 아까운 시간에, 신성건설의 프리미엄 브랜드인 '헤리티지 빌'의 미분양 미수금 1,200억 원에 대한 회수 대책을 먼저 수립하시는 것이 그룹 부사장이라는 직책에 더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다가오는 이사회에서 이 부실 지표가 주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된다면, 과연 가문의 신뢰가 어느 분의 리더십으로 향하게 될지 제가 다 걱정이 됩니다.”

지성의 입가에 걸려 있던 여유만만한 실소가 순간적으로 보기 좋게 바스러졌다. 그의 눈동자가 당혹감과 겉잡을 수 없는 살기로 검붉게 물들었다.

바로 그 순간, 응접실 안쪽의 웅장한 원목 문이 육중한 마찰음을 내며 천천히 열렸다.

“식사 준비가 모두 끝났다. 다들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너라.”

문 너머 어둠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강태준 회장의 묵직하고 거대한 음성이 저택 로비 전체를 무겁게 덮쳐왔다.

은우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지성을 향해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지혁의 팔에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안쪽의 만찬장으로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진짜 칼바람이 부는 전쟁터로 향하는 은우의 눈동자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망설임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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