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6화: 예고 없는 시험대
어두운 골목길, 지혁의 차가 남기고 간 붉은 미등 잔상이 밤안개 너머로 서서히 허물어졌다.
낡은 빌라의 현관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선 서은우는 신발장 옆에 가만히 멈춰 섰다. 차갑게 가라앉은 방 안의 공기가 뺨을 스쳤지만, 오른손 끝에는 여전히 낯설고 이질적인 온기가 고스란히 얽혀 있었다.
지혁의 단단하고 넓은 손가락이 자신의 마디마디를 거침없이 비집고 들어오던 순간의 압도적인 촉감. 손끝을 관통하며 온몸으로 퍼져나가던 맥박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화장실로 걸어가 차가운 물을 거세게 틀었다. 은우는 수전에서 떨어지는 냉수 아래로 오른손을 밀어 넣었다. 차가운 마찰 속에서도 지혁이 남겨놓은 뜨거운 열감은 깊은 낙인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고 살갗 아래에 머물렀다.
“……연기 한번 지독하게 잘하네.”
은우는 흐르는 물소리에 목소리를 묻으며 거울 속의 자신을 가만히 응시했다. 차분하게 다듬으려 해도 불규칙하게 날뛰는 심장의 고동을 숨길 수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연출이었을 뿐이라고, 자신에게 몇 번이고 다짐하며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어냈다. 1년 동안 작동할 이 차가운 계약서 뒤에서, 자신의 심장만큼은 철저히 사수해야 한다는 붉은 경고등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깜빡였다.
다음 날 오전, 은우는 강남의 임시 공유 오피스로 출근해 W&U 랩 법인 설립을 위한 세부 서류들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있었다. 한소라가 보내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예비 구인 명단과 세무 법인 계약서를 정리하던 찰나, 책상 한구석에 놓인 휴대폰이 묵직한 진동을 울렸다.
화면에 선명하게 찍힌 발신인은 강지혁이었다.
“네, 전무님.”
은우가 통화 버튼을 누르며 차분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서은우 씨. 어젯밤에는 별일 없이 무사히 들어갔습니까?
수화기 너머 지혁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무겁고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미세한 떨림이 섞인 건조함 속에서 지혁 역시 어제의 기억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흔적이 묻어났다.
“네. 차에서 내린 후 바로 들어왔습니다. 미행 차량도 제가 빌라 계단을 올라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동을 걸고 사라졌습니다.”
― 다행이군. 하지만 방심하기에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가 강남구청에서 혼인신고를 접수한 사실이 벌써 본가와 신성가 내부에 완전히 전파되었습니다.
은우는 결재 서류 위에 얹어두었던 만년필을 꾹 쥐었다.
“벌써요? 아직 행정 시스템에 완전히 등록되기도 전일 텐데요.”
― 강지성 부사장의 비서실이 법원과 구청의 정보 라인을 집요하게 캐물은 모양입니다. 아침부터 가문 친척들의 단체 대화방이 터져 나갈 정도로 소란스럽다고 최 과장이 보고하더군요.
지혁이 억누른 숨을 내쉬는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귓가에 닿았다.
― 지금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 서은우 씨의 신상 프로필이 돌고 있습니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점부터 시작해, 부모님의 인쇄소가 떠안고 있는 부도 채무액까지 노골적인 숫자로 떠돌아다니는 중입니다. 지혁이 제 발등을 찍었다는 둥, 신성의 문턱이 낮아졌다는 둥의 험담이 가득합니다.
은우는 잠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상류사회라는 거대한 폐쇄회로가 자신을 어떤 가차 없는 잣대로 조각내고 있는지 충분히 그려졌다. 하지만 은우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성적이고 차분했다.
“예상했던 범위 안의 소음입니다. 광고 대행사 시절에도 신제품을 런칭하면 경쟁사들은 온갖 도용 의혹이나 흠집 내기 찌라시를 뿌리곤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노이즈가 아니라, 우리 브랜드를 최종 검증할 최고의 의사결정권자들의 눈빛입니다.”
수화기 너머의 지혁은 은우의 단단하고 담담한 태도에 잠시 말을 잃은 듯 침묵했다. 이내 그의 건조한 목소리 밑으로 깊은 안도와 잔잔한 경탄이 스며들었다.
― 역시 서은우 씨답군. 강지성 부사장이 조만간 W&U 랩의 투자 건이나 이 결혼의 절차를 문제 삼아 이사회에서 공격해 올 테지만, 법률적 방어와 내부 정치는 내가 확실하게 처리할 테니 염려 마십시오. 계약서 제9조에 의거해, 서은우 씨의 명예와 평판은 내 권한을 다해 방어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전무님. 저 역시 제 몫의 계약 조건을 철저히 이행하기 위해 집중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은우는 만년필 끝으로 서류 상단을 가볍게 두드렸다. 신성이라는 낡고 삼엄한 요새 속으로 완전히 걸어 들어왔음이 실감 났다.
오후 1시, 은우는 사무실 구석에서 법인 인감 서류를 정리하던 중 친구 한소라의 전화를 받았다.
― 야, 서은우! 뉴스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너 진짜 그 독사 소굴 같은 대재벌가로 시집간 거야? 혼인신고 진짜 한 거지?
소라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응, 어제 오전에 강남구청에서 서류 접수 끝냈어. 절차상 아무 문제 없다.”
― 미쳤어, 정말. 그 강지혁 전무라는 사람 얼굴만 잘생겼지, 그 집안사람들 다 괴물들이라며. 며느리 뼈까지 발라 먹는 곳에서 네가 어떻게 버티려고 그래? 무슨 일 생기면 계약서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나한테 당장 연락해. 알았지?
“알았어. 나 서은우야. 호랑이 굴에 기어들어가도 호랑이 목줄 채워서 나올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은우는 소라를 안심시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액정 화면 위로 저장되지 않은 낯선 유선 번호가 길게 떠올랐다. 은우는 직감적으로 호흡을 조절하며 전화를 받았다.
“서은우입니다.”
― 서은우 씨 되십니까?
서늘하고 일말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중년 여성의 단정한 목소리였다.
― 저는 신성문화재단 이사장 비서실의 김 비서관이라고 합니다. 이명희 이사장님께서 오늘 오후 3시, 성북동 신성미술관 3층의 사적 접견실에서 서은우 씨와 단독으로 면담하기를 원하십니다.
귓가에 차가운 파동이 울렸다. 예고도 없고 배려도 없는, 전형적인 상류사회의 습격이었다. 주말 본가 만찬이라는 공식적인 일정 전에, 사교계의 실세이자 지혁의 어머니인 이명희 여사가 은우의 목덜미를 직접 낚아채려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 오후 3시 말씀이십니까?”
― 네. 이사장님의 개인 일정 사이에 긴급하게 비워둔 시간이니 늦지 않게 와주십시오. 이동 수단은 제공되지 않으니 직접 움직이셔야 합니다.
질문을 던질 틈도 주지 않은 채 툭 하고 연결이 끊겼다. 명백하게 우위를 점하려는 기선제압의 방식. 은우는 즉시 지혁에게 이 사실을 공유했다.
보고를 받은 지혁의 음성이 순식간에 차갑게 빙결되었다.
― 어머니가 나를 거치지 않고 당신을 단독으로 불렀다고요?
“네. 성북동 미술관 다실로 3시까지 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 당장 멈추십시오. 내가 어머니 비서실을 통해 이번 약속을 전면 취소시키고 주말 본가 일정으로 통합하겠습니다. 아니면 지금 당장 회의를 취소하고 내가 미술관으로 동행하겠습니다. 어머니의 예법과 안목은 사람의 자존심을 가장 우아하게 부수는 무기입니다. 혼자 가서는 안 됩니다.
지혁의 말 속에는 감추지 못한 조급함과 강한 방어 기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신을 감싸 쥐려는 지혁의 태도에 은우는 오히려 척추를 곧게 세웠다.
“아닙니다, 전무님. 약속을 피하거나 미루면 저는 시작하기도 전에 신성가에서 도망친 패배자가 됩니다. 그리고 전무님이 동행하시면, 제 첫인상은 남편의 등 뒤로 숨어 눈치만 보는 무능한 존재로 고착될 뿐입니다.”
― 하지만 어머니는 사교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이것은 제 첫 번째 독자 프레젠테이션이자 광고주 미팅입니다. 상대가 까다롭다고 해서 PM이 도망친다면 그 프로젝트는 파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명희 여사님은 지혁 전무님의 선택이 신성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직접 검증하려는 겁니다. 제 발로 걸어가서 제 가치를 증명하고 오겠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지혁의 무거운 숨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은우의 단단하고 논리적인 굳집에 결국 설득당한 지혁이 마침내 나지막하게 허락했다.
― ……알겠습니다. 하지만 미술관 입구까지는 최 과장의 차로 이동하십시오. 무슨 돌발 상황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나에게 먼저 연락을 넣어야 합니다.
“네, 걱정 마십시오.”
오후 2시 50분. 성북동의 가파른 언덕길 가장 깊숙한 곳에 요새처럼 솟아 있는 신성미술관에 도착했다.
노출 콘크리트의 차가운 질감과 불투명한 통유리로 뒤덮인 모던한 건물은,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는 듯한 거만함을 풍기고 있었다. 최민규 과장이 건네는 조심스러운 격려를 뒤로하고 차에서 내린 은우는 자신의 수트 깃을 단정하게 매만졌다.
화려한 로고가 박힌 명품 백이나 보석 대신, 제일기안 시절 가장 규모가 컸던 경쟁 PT 때 입었던 남색 테일러드 수트와 검은색 스틸 시계만을 착용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정장 차림의 김 비서관이 기다렸다는 듯 은우를 향해 다가왔다.
“이쪽입니다. 이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미술관 내부의 프라이빗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자, 일반 관람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거대한 원목 문이 나타났다.
문이 열리자, 은은하고 묵직한 침향의 내음과 함께 정갈하게 꾸며진 다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전면 통유리창 너머로는 성북동의 대나무 숲과 맑은 연못 정원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걸려 있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다도용 원목 테이블 뒤, 단아한 개량 한복을 입은 이명희 여사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무쇠 솥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물을 다루고 있었다.
이명희 여사.
쉰 여덟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품 있는 미모였으나, 그녀의 얇은 입술과 고요한 눈동자 깊은 곳에는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함이 서려 있었다.
“앉아라.”
명희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찻잔을 따뜻한 물로 헹구며 낮고 명징하게 읊조렸다.
은우는 기죽지 않고 걸어가 명희의 맞은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명희를 마주 보았다. 시선을 흘리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는 은우의 당당함에, 명희의 하얗고 정갈한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정지했다.
명희는 황차를 우려내 투명한 유리 숙우에 담은 뒤, 은우의 앞으로 찻잔을 밀어놓았다.
“서은우라고 했나.”
“네, 어머님. 서은우입니다.”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은우의 첫 대답에 명희의 입가에 얇고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벌써 나를 어머님이라 부르는구나. 혼인신고서 한 장 접수했다고 해서 신성가의 높은 문턱을 온전히 넘었다고 착각하지 마라.”
찻물 위로 피어오르는 흰 김 사이로 명희의 칼날 같은 눈빛이 은우의 안색을 샅샅이 훑었다.
“지혁이가 네 부모의 수억 원대 빚을 정리해 주는 대가로 널 이 결혼 시장의 매물로 삼았다는 사실을 모를 것 같으냐. 지방 국립대에 대행사 기획 팀장 출신인 여자가, 신성가의 며느리 자리가 요구하는 거대한 무게를 감당하려 들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명희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은우의 배경을 가차 없이 도려내는 칼끝과 같았다. 대개의 평범한 이들이라면 모멸감에 눈을 피하거나 손가락을 굳혔을 터였다.
하지만 은우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차를 가볍게 음미하고 목구멍으로 넘긴 은우는 잔을 내려놓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사장님 말씀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제 배경과 학벌은 신성이 정해둔 기준선에 미치지 못하며, 부모님의 부채 또한 제가 짊어져야 할 차가운 현실의 짐이 맞습니다.”
명희의 짙은 눈썹이 살짝 위로 솟아올랐다. 비굴하게 부정하거나 구차하게 변명할 것이라 여겼던 예상이 빗나간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는 지혁 전무님에게 짐이 되기 위해 혼인 서류에 날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반대?”
“지금 신성리테일에 필요한 것은 고여 있는 가문의 혼맥을 덧대는 허울 좋은 결혼이 아닙니다. 강지성 부사장의 거센 견제 속에서 브랜드를 혁신하고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는 실질적인 마케팅 솔루션입니다. 저는 제일기안에서 바닥을 치던 브랜드들을 수없이 회생시켰습니다. 지혁 전무님은 제 화려한 간판이 아니라, 신성의 위기를 기회로 바꿀 제 명석한 실력을 선택한 겁니다.”
은우의 목소리는 한없이 정중했으나 논리는 벼려진 칼날처럼 서슬 퍼랬다. 스스로의 쓸모와 가치를 완벽하게 장악한 사람만이 낼 수 있는 곧은 목소리였다.
명희는 찻잔을 쥔 채 은우의 고요한 동공을 깊게 탐색했다. 겉치레 가득한 교태나 숨 막히는 아부로 무장한 여느 명문가 자제들과는 확실히 질감이 다른 여자였다.
“실력이라…….”
명희는 작게 독백하듯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는 다실 벽면에 부착된 어두운 원목 수납장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명희가 백색 비단 보자기에 싸인 상자를 꺼내 들고 돌아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보자기가 걷히자, 네 개의 조그만 백자 다기(찻잔)들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겉보기에는 모두 수수하고 투박한 백자 찻잔이었으나, 아주 미세한 유약의 발림과 불꽃이 닿은 태토의 그을음, 그리고 그립감이 조금씩 달랐다.
첫 번째 잔은 지나치게 대칭적이고 매끄러운 인공미를 풍겼고, 두 번째 잔은 유약의 표면에 미세한 빙열(氷裂) 무늬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세 번째 잔은 굽 부분이 다소 거칠고 투박했으며, 네 번째 잔은 온화한 유백색 빛깔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명희는 자리에 다시 앉아 차가운 손끝으로 네 개의 찻잔을 하나씩 짚었다.
“네 입바른 실력과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이 진짜인지, 이 자리에서 증명해 보이거라.”
명희의 날카로운 음성이 다실의 침묵을 찢어 발겼다.
“이 네 개의 다기 중 단 하나만이 내가 오랫동안 후원해 온 무명 공예가가 흙을 빚어 구워낸 단 하나의 진품이다. 나머지 셋은 시중 인사동 골목에서 단돈 몇만 원에 널려 있는 조잡한 복제품들이지.”
명희가 팔짱을 끼며 은우의 얼굴을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네가 사물의 본질과 숨겨진 가치를 꿰뚫는 눈을 가졌다면, 어떤 것이 그 무명 작가의 진품인지 골라내고 그 이유를 설명해라. 만약 네 안목이 그저 남들의 기준을 베끼는 싸구려 수준에 불과하다면, 지혁이의 사정이 어찌 되든 나는 이 혼인을 승인하지 않고 널 밀어낼 것이다.”
명희의 얼음 같은 질문과 함께, 네 개의 백자 찻잔이 은우의 눈앞에 선명한 대결 구도를 그리며 놓였다.
은우는 심호흡을 깊이 내쉬며 눈앞의 찻잔들을 응시했다.
그녀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진짜 시험대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