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5화: 연습은 실전처럼
오전 9시 50분. 강남구청 로비는 월요일 아침 특유의 소란스러움과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신분증과 도장, 그리고 주민등록등본을 손에 쥔 서은우는 로비 구석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발걸음 소리, 대기 번호표를 호출하는 기계음이 고막을 어지럽게 스쳤다.
스스로 내린 철저한 이성적 판단이었고, 어제 완벽하게 밀봉한 계약서의 조항들이 머릿속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음에도 손끝이 조금 차가웠다. 평생 자신의 이름을 걸고 광고 기획안과 사직서에 서명해 왔지만, 누군가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이 완전히 한 몸으로 묶이는 법적 절차는 차원이 달랐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익숙하고 낮게 내리깔리는 목소리에 은우는 고개를 들었다. 단정한 네이비색 수트를 흐트러짐 없이 차려입은 강지혁이 눈앞에 서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와 훤칠한 키 덕분에 주변의 소란이 일순간 뒤로 물러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뒤에는 여전히 긴장감과 피로가 섞인 안색의 최민규 과장이 가죽 서류 가방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도 방금 도착한 참이었습니다.”
은우는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지혁과 시선을 맞추었다. 지혁의 눈빛은 어제 공유 오피스에서 계약서에 서명할 때와 마찬가지로 흔들림 없이 고요하고 건조했다.
“서류는 다 챙겨 오셨겠죠?”
“물론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은우가 손에 쥔 서류들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두 사람은 구청 한편에 마련된 혼인신고서 작성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최민규 과장이 가방에서 미리 작성해 둔 혼인신고서 양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증인 란은 윤 변호사님과 제가 어제 퇴근하기 전에 서명과 날인을 미리 마쳐 두었습니다. 두 분은 본인 인적 사항과 등록기준지, 그리고 부모님의 주민등록번호를 적으시면 됩니다.”
민규가 볼펜을 건네며 낮게 읊조렸다. 은우는 펜을 쥐고 하얀 종이 위의 빈칸을 하나씩 메워나가기 시작했다. 본적지와 부모님의 성명을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갈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이 서류 한 장으로 서은우라는 자연인은 대한민국 재계 5위인 신성그룹의 차남과 법적인 가족으로 묶이게 된다. 감정도 사랑도 없는, 오직 1년짜리 비즈니스 계약을 위한 계약 상대로서.
곁을 슬쩍 보니 지혁 또한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단단하고 길쭉한 그의 손끝이 종이 위를 스칠 때마다 정갈한 글씨체가 하얗게 비어 있던 칸들을 채워나갔다. 지혁은 숨소리조차 규칙적이었고, 그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감정적 동요도 읽어낼 수 없었다.
작성을 마친 지혁이 먼저 펜을 내려놓고 은우를 바라보았다.
“다 적었으면 가죠.”
“네. 접수처로 가시죠.”
두 사람은 혼인신고 접수 창구로 향했다. 대기 번호가 호출되고, 두 사람의 서류와 신분증이 창구 직원 앞에 나란히 놓였다. 직원은 기계적이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도장이 누락된 곳은 없는지, 등록기준지가 정확하게 입력되었는지 확인하는 직원의 눈빛은 무심하면서도 꼼꼼했다.
잠시 후, 직원이 서류를 두드리며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서은우 씨, 강지혁 씨. 본인 확인되었습니다. 혼인신고는 접수하는 즉시 법적 효력이 발생하며, 이 순간 이후로는 취소나 철회가 불가능합니다. 동의하십니까?”
그 질문에 은우의 가슴이 아주 잠깐 덜컥 내려앉았다. 진짜 부부가 되는 것도 아니면서, 평생 한 번뿐일지도 모르는 서약의 순간을 기계적인 창구 직원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다는 것이 기묘한 이질감을 주었다.
“동의합니다.”
지혁의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했다. 은우 역시 호흡을 깊게 가다듬고 직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동의합니다.”
탁, 탁. 서류 위에 접수인이 묵직하게 찍히는 소리가 울렸다. 직원은 접수증 한 장을 출력해 지혁에게 건넸다.
“접수 완료되었습니다. 가족관계등록부 반영까지는 평일 기준 일주일 정도 소요됩니다. 축하드립니다.”
영혼 없는 축하 인사를 뒤로하고 세 사람은 창구를 벗어났다. 접수증을 받아 든 지혁의 손끝에 미세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을 은우는 놓치지 않았다. 이제 법적으로 두 사람은 완벽하게 구속된 동업자이자 부부였다.
“이제 법적인 동업 관계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네요.”
로비를 걸어 나오며 은우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렇군요. 1년짜리 기간제 동업입니다.”
지혁 역시 건조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앞에 닥친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구청 정문을 나서자마자 뒤따라오던 최민규 과장이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 들며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두 분, 잠시만요. 거기 계단 옆에 서서 제 카메라 좀 봐주세요.”
은우가 영문을 몰라 눈을 가늘게 떴다.
“최 과장님, 갑자기 사진은 왜 찍습니까?”
“윤 변호사님이 신신당부하셨습니다. 혼인신고 직후에 두 분이 같이 서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달라고요. 외부에서 파파라치가 찍거나 기자들이 봤을 때, 두 사람의 거리감이 어떻게 보이는지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해서 대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민규의 말에 은우와 지혁은 어색하게 정문 계단 옆에 나란히 섰다.
찰칵.
최민규는 사진을 찍자마자 화면을 확대해 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휴대폰 화면을 은우와 지혁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이것 보세요. 제가 뭐라 말하기도 참 민망한데…….”
화면 속의 은우와 지혁은 나란히 서 있기는커녕, 서로의 어깨 사이에 주먹 두 개는 족히 들어갈 만큼 넉넉한 공간을 두고 서 있었다. 표정 또한 압권이었다. 은우는 면접을 기다리는 신입사원처럼 긴장해 있었고, 지혁은 청문회에 출두한 대기업 임원처럼 무표정하고 딱딱했다.
“이건 부부가 아니라, 법정 앞에서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인과 변호인 같네요. 아니면 7억짜리 약속어음을 두고 다투는 채무자와 채권자거나요. 강지성 부사장 밑에 있는 정보팀이 이 사진을 보면 바로 계약 결혼 브로커부터 수색할 겁니다.”
민규의 뼈아픈 지적에 지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정도인가?”
“그 정도가 아니라 심각합니다, 전무님. 눈빛에서 서로에 대한 경계심과 냉랭함이 뚝뚝 떨어져요. 그리고…… 더 심각한 정보가 방금 들어왔습니다.”
민규가 휴대폰을 스크롤하며 준법지원팀 라인의 메시지 창을 확인하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방금 본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명희 여사님 비서실에서 오늘 오전 혼인신고 접수 여부를 행정 라인으로 확인하자마자 비서실장을 통해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이번 주말, 한남동 본가 만찬에 서은우 씨를 정식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은우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긴장감이 퍼졌다.
“벌써요? 아직 식도 안 올렸는데 호출이라니요.”
“네. 강태준 회장님도 참석하시는 정식 가족 만찬입니다. 두 분이 부부가 된 후 처음으로 가문에 공식 인사드리는 자리죠. 이 상태로 본가에 가셨다가는, 사교계의 독사라 불리는 이명희 여사님의 눈을 3초도 속이지 못합니다. 완벽한 비상사태입니다.”
민규의 다급한 목소리에 지혁이 은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건조한 눈동자 밑에 팽팽한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
“최 과장 말이 맞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사람의 눈빛과 태도를 읽는 데 귀신같은 분들입니다. 특히 어머니는 겉으로는 한없이 우아하시지만, 가문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의 사소한 거동 하나 놓치지 않는 예리한 안목을 가지셨죠. 이대로 갈 수는 없습니다.”
은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승부욕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제일기안에서 아무리 까다롭고 독사 같은 광고주를 만나도 준비 부족으로 프로젝트를 망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결혼 역시 은우에게는 일종의 마케팅 캠페인이자 비즈니스 프로젝트였다.
“그렇다면 대책을 세워야겠네요.”
은우가 명확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부부 연기 실전 훈련에 돌입하죠. 전무님, 어디 조용히 연습할 만한 공간이 없습니까?”
“내 오피스텔로 가죠. 앞으로 대외적인 신혼집으로 사용할 곳입니다.”
지혁의 결단에 따라 세 사람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강남의 한적하고 삼엄한 보안을 자랑하는 고급 주상복합 오피스텔. 지혁이 개인 명의로 소유한 최고급 펜트하우스였다.
넓은 거실에는 미니멀하고 단출한 가구들만이 놓여 있어 다소 삭막한 느낌을 주었지만, 넓은 통창 너머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전망을 자랑했다.
은우는 미리 준비해 둔 책 상자 두 개와 가벼운 코트 몇 벌을 현관 안쪽에 내려놓았다. W&U 랩 관련 전문 서적들과 은우가 좋아하는 향수, 그리고 가벼운 생활 잡화들이었다. 동거의 흔적을 만들기 위해 은우가 직접 챙겨온 최소한의 ‘장치’들이었다.
“이 방은 제가 주로 서재로 쓰고 있는 공간입니다. 안쪽 방을 은우 씨의 사적 공간으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비밀번호는 은우 씨만 알 수 있게 새로 변경해 드리겠습니다.”
지혁이 현관문 옆의 아담한 침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공간 분리는 확실하게 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인 당면 과제를 해결하죠.”
은우는 거실 중앙으로 걸어 나와 지혁을 마주 보았다.
최민규는 거실 테이블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대기업 비서실에서 작성한 ‘위장 부부용 프로필 및 행동 지침’ 문서를 펼쳤다.
“자, 두 분. 첫 번째 과제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거리 좁히기’입니다. 파파라치가 불시에 투샷을 찍거나 가문의 사람들이 지켜볼 때, 연인 특유의 물리적 친밀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합니다. 현재 두 분의 평소 거리는 약 1미터입니다. 이걸 30센티미터 이내로 좁혀야 합니다.”
민규의 지시에 은우와 지혁은 어색하게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 걸음만 더 다가서 보시죠.”
민규가 채근했다. 은우는 심호흡을 한 뒤, 지혁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스윽.
지혁 또한 은우를 향해 반 걸음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지혁의 높은 키와 탄탄한 체구 덕분에 은우는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그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그의 정갈한 턱선과 반듯한 어깨가 시야에 가득 찼다.
“아직도 멀었습니다. 두 분 다 표정이 너무 심각해요. 시선은 어디를 보고 계시는 겁니까? 은우 씨, 지혁 씨의 넥타이를 보세요. 지혁 씨는 은우 씨의 눈을 조금 부드럽게 바라보시고요.”
지혁이 천천히 시선을 내려 은우를 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 은우의 단정한 얼굴이 맺혔다. 은우는 그 시선이 똑바로 닿는 순간, 묘하게 목덜미가 간지러운 기분을 느꼈다. 지혁의 단정한 셔츠 칼라 깃 사이로 흘러나오는 체온이 느껴질 정도였다.
“스킨십 규칙 제4조를 기억하십니까?”
지혁이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신체 접촉은 사전 동의를 원칙으로 한다. 예외적인 긴급 상황이 아니면 동의 후에 진행한다……였죠.”
은우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조항을 암송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10분간, 실전 연습을 위한 신체 접촉에 동의합니까?”
“동의합니다. 어디까지나 비즈니스를 위한 연습이니까요.”
은우의 허락이 떨어지자, 지혁이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그의 넓은 손바닥이 은우의 가녀린 어깨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단단한 손가락이 어깨뼈에 닿는 순간, 은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얇은 실크 블라우스 너머로 지혁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온기가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습니다, 서은우 씨. 몸을 굳히면 가짜인 게 바로 티가 납니다.”
지혁이 낮게 지적했다.
“돌부처가 만지는데 힘이 안 들어갈 리가요. 전무님이야말로 손가락 마디가 바짝 굳어 있으십니다. 무슨 마네킹 어깨를 잡는 줄 알았습니다.”
은우가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지혁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아주 미세하게 스쳤다.
“그럼 팔짱으로 변경하죠. 그게 대외적으로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지혁이 어깨에서 손을 떼고 왼팔을 살짝 구부려 공간을 만들었다. 은우는 그의 단탄한 팔뚝 사이에 자신의 팔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스윽.
두 사람의 몸이 완전히 밀착되었다. 지혁의 탄탄한 이두근과 은우의 옆구리가 부드럽게 맞닿았다. 지혁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시더우드 향과 스킨 냄새가 은우의 코끝을 자극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의 숨소리와 일정한 맥박이 팔뚝을 타고 자신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 상태로 거실을 한 바퀴 걸어보겠습니다. 보조를 맞추시죠.”
지혁의 리드에 따라 두 사람은 넓은 거실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처음 몇 걸음은 보폭이 맞지 않아 발끝이 가볍게 부딪쳤지만, 은우의 날카로운 신체 감각과 지혁의 묵직한 배려가 맞물리면서 서서히 걸음걸이가 자연스러워졌다.
뒤에서 지켜보던 최민규 과장이 연신 휴대폰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 방금 샷은 꽤 그럴듯합니다. 확실히 거리가 좁혀지니까 눈빛에 흐르던 경계심이 친밀감으로 포장되는 느낌이네요. 이 정도면 파파라치 샷 한 장 정도는 충분히 방어할 수 있겠습니다.”
민규의 칭찬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팔짱을 쉽게 풀지 못했다. 맞닿은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 기묘한 열기가 거실 전체에 묘한 정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은우는 헛기침을 가볍게 하며 자연스럽게 팔을 빼냈다.
“좋습니다. 걸음걸이와 거리감은 이 정도로 유지하죠. 다음은 본가에 대한 브리핑이 필요합니다. 전무님, 아버님과 어머님에 대해 제가 반드시 알아야 할 규칙이 있습니까?”
지혁은 거실 테이블에 등을 기대어 서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평생 신성그룹을 키워오신 지독한 실리주의자이자 결과 중심적인 분입니다. 며느리라는 존재가 가문에 어떤 실질적인 도움이나 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시험하고 평가하실 겁니다. 하지만 대놓고 돈이나 배경을 칭찬하는 천박한 짓은 하지 않으시죠. 오히려 당신의 시험을 묵묵히 버텨내고 스스로 논리적인 답을 찾는 사람을 조용히 인정하십니다.”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업 회장들이 흔히 가지는 전형적인 성향이었다. 제일기안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만났던 까다로운 오너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를 꿈꾸셨지만 집안의 뜻에 따라 정략결혼을 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완벽한 귀부인의 예법을 지키시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만의 예술적 자존심과 상처가 있으시죠. 그렇기에 가짜 취향이나 위선, 과시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어설프게 아부하려 들거나, 비싼 명품으로 몸을 휘감아 점수를 따려 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실 겁니다.”
지혁의 조언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용적이었다. 은우는 그의 말을 머릿속에 꼼꼼히 기록했다.
“어머님이 피아니스트를 꿈꾸셨다라…….”
은우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명희의 예리한 안목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예법의 흉내가 아닌, 그녀의 마음속 상처와 취향을 정확히 읽어내는 마케터로서의 진정성 있는 접근이 필요할 터였다.
“알겠습니다. 어떤 태도로 응대해야 할지 대략 감이 잡히네요.”
“주말 만찬까지 남은 시간 동안 가문의 역사와 친척들의 프로필을 완벽하게 외워두셔야 할 겁니다. 최 과장이 준비한 자료를 전송해 드리죠.”
지혁이 민규에게 눈짓하자, 민규가 태블릿을 조작해 파일을 전송했다.
어느덧 창밖의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온종일 혼인신고와 부부 연기 연습, 그리고 본가 브리핑을 이어나간 탓에 두 사람 모두 피로가 쌓여 있었다.
“오늘은 이만하죠. 서은우 씨도 짐을 대충 정리하고 쉬는 게 좋겠습니다.”
지혁이 은우에게 배려 섞인 말을 건넸다.
“네. 감사합니다. 전무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은우는 자신의 임시 침실로 짐 상자를 옮겨놓고 가벼운 코트를 집어 들었다. 오피스텔에 짐만 일부 옮겨두었을 뿐, 본격적인 입주는 주말 만찬 이후로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혁이 현관문 옆에 서서 차 열쇠를 챙겼다.
“본가로 가기 전까지는 대외적인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내가 차로 데려다주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택시를 타면…….”
“강지성 부사장 측에서 사람을 붙였다는 구체적인 징후가 있습니다.”
지혁의 낮은 목소리가 은우의 거절을 부드럽게 가로막았다.
“구청 근처에서부터 수상한 차량 한 대가 우리 동선을 쫓는 것을 민규가 확인했습니다. 지금 따로 나가는 건 위험합니다. 내 차를 타고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안전합니다.”
은우는 그의 단호한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즈니스의 안전과 의심 차단을 위해서라면 그의 제안을 따르는 것이 현명했다.
지혁의 검은색 세단이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은우의 임시 거처가 있는 강남의 한적한 주택가로 향했다.
차 안에는 묵직한 침묵이 흘러내렸다. 지혁은 묵묵히 전방을 응시하며 운전대에 집중했고, 은우는 조수석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들을 눈동자에 담았다.
잠시 후, 차가 은우의 빌라 골목 입구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어두컴컴한 골목길 모퉁이에 낯선 검은색 SUV 차량 한 대가 시동과 라이트를 모두 끈 채 주차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차창 선팅이 너무 짙어 내부의 실루엣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구도가 정확히 은우의 빌라 입구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은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정말이군요. 지켜보고 있네요.”
“강지성 부사장의 정보원일 겁니다. 아니면 그가 고용한 파파라치거나.”
지혁이 사이드미러를 통해 SUV를 예리하게 주시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보이지 않는 서늘함이 서렸다.
“저들이 지켜보고 있다면, 차에서 내릴 때부터 완벽한 부부의 모습을 연출해야겠네요.”
은우가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움 대신 차분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지혁이 시동을 끄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잠시 기다려요. 내가 문을 열어주겠습니다.”
지혁이 차에서 내려 빠르게 조수석으로 걸어왔다. 그는 문을 열고 은우가 내릴 수 있도록 오른손을 뻗어 정중히 에스코트했다.
은우가 차에서 내리자, 두 사람의 거리는 다시 한번 30센티미터 이내로 좁혀졌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골목길, 저 멀리 검은 SUV의 앞유리 너머로 미세하게 카메라 렌즈 같은 작고 둥근 유리 반사광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저들이 지켜보고 있다.
은우가 고개를 들어 지혁을 올려다보았다. 지혁의 눈빛 또한 골목길의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차갑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혁이 예고 없이 은우에게 한 걸음 더 밀착해 다가섰다. 그의 넓은 가슴이 은우의 코앞까지 육박했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지혁의 뜨거운 숨결이 은우의 이마를 스치듯 스며들었다.
은우가 놀라 몸을 살짝 굳히는 찰나, 지혁이 오른손을 뻗어 은우의 가녀리고 차가운 손을 감싸 쥐었다.
단순히 손을 포개어 잡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혁의 단단하고 넓은 손가락들이 거침없이 파고들며 은우의 손가락 사이를 하나씩 비집고 들어왔다. 그들의 손가락이 엇갈리며 굳게 맞물렸다.
깍지.
서로의 체온 및 맥박을 고스란히 공유하는, 연인들만이 할 수 있는 가장 밀도 높은 손잡기였다.
“……!”
갑작스러운 피부의 접촉과 손가락 사이를 가득 메우는 지혁의 뜨겁고 묵직한 체온에 은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골목길의 온갖 소음이 일순간 아득해지고, 오직 맞잡은 손바닥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지혁의 강하고 일정한 심장박동만이 은우의 고막을 거세게 두드리는 것 같았다.
은우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혁은 시선을 검은 SUV 쪽으로 고정해 둔 채, 무덤덤하지만 흔들림 없는 낮은 목소리로 은우의 귀밑머리께에 대고 속삭였다.
“이 정도는 해야 저들이 의심을 안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철저한 비즈니스 파트너의 그것처럼 이성적이었으나, 은우의 손을 단단하게 움켜쥔 그의 손귀 힘은 그 어떤 진짜 연인보다도 강렬하고 뜨거웠다.
맞물린 손끝에서부터 전신으로 차오르는 낯선 온기 속에서, 은우는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1년이 생각보다 훨씬 자신의 심장에 해로울 것임을 직감하며 그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