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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4화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4화: 동업자의 규칙

약속 장소는 제일기안 본사에서 지하철로 세 정거장 떨어진 한적한 공유 오피스의 세미나실이었다.

서은우가 직접 대관한 방은 아담했다. 사면이 반투명 유리로 차단되어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따뜻한 차가 담긴 보온병과 종이컵만이 단출하게 놓여 있었다.

오전 9시 55분.

문이 열리며 세 사람이 차례로 들어왔다.

가장 먼저 들어선 것은 최민규 과장이었다. 그는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은우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그 뒤를 이어 큰 키의 강지혁이 반듯한 수트 차림으로 들어섰고, 마지막으로 서류 가방을 든 윤세라 변호사가 걸어 들어왔다.

윤세라는 문이 닫히자마자 은우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은우 씨. 윤세라 변호사입니다. 지혁이의 대리인이자, 오늘 계약의 입회인으로 참석했습니다.”

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라와 악수를 나누었다.

“서은우입니다. 장소가 조금 협소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소음이 차단되고 사생활이 보장되는 곳이라 마음에 드네요. 서은우 씨가 직접 고르신 곳답습니다.”

세라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상대의 패를 읽어내려는 프로의 눈빛을 담고 있었다. 은우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지혁은 은우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시선은 은우의 손끝에 머물렀다. 은우는 테이블 위에 단정하게 놓아둔 세 부의 서류 뭉치를 가볍게 톡톡 쳤다.

“전무님이 어젯밤 늦게 보내주신 초안을 읽어보았습니다. 분석할 시간이 넉넉해서 다행이었습니다.”

“수정안을 준비하셨군요.”

지혁의 건조한 목소리가 회의실의 공기를 가볍게 가라앉혔다.

“제안서는 조건이 맞을 때까지만 제안서일 뿐이죠. 제 쪽에서 요구할 조건을 포함해 1차 수정 요구안을 정리했습니다. 한 부씩 보시죠.”

은우는 준비한 서류를 지혁과 세라에게 각각 한 부씩 건넸다. 최민규는 은우의 뒤쪽 서브 테이블에 노트북을 펼치고 기록 준비를 마쳤다.

세라는 서류를 받자마자 펜을 들고 빠르게 훑어내려 갔다. 지혁은 첫 페이지에 적힌 문장들을 차분히 읽었다.

첫머리부터 은우의 단호한 필치가 묻어나는 조항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첫 번째 조항부터 보시죠.”

은우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은 뒤 말했다.

“가장 먼저 짚어야 할 부분은 제7조 배우자 의무입니다. 전무님이 보내신 초안에는 이 부분이 빈칸으로 남아 있더군요. 지혁 씨가 일부러 비워두신 건가요, 아니면 채우기 곤란하셨던 건가요?”

은우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지혁 씨’라는 호칭에 뒤편에 있던 민규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지혁은 미동도 없이 은우를 쳐다봤다.

“어떤 식으로 채워지길 원했습니까?”

“이 계약은 비즈니스입니다. 따라서 모든 조건은 숫자로 환산되거나 명확한 행위로 규정되어야 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수정했습니다.”

은우는 자신이 적어 넣은 제7조의 문장을 정확하게 낭독했다.

“‘배우자 의무는 공식 석상과 가족 모임에서의 역할 수행에 한정한다. 이는 신체적, 감정적 제공을 포함하지 않으며, 사생활에 대한 상호 불간섭을 원칙으로 한다.’ 추가로, ‘거주지는 분리한다’는 내용을 넣었습니다.”

지혁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지막이 물었다.

“거주지 분리라.”

“가짜 결혼이니까요. 한 공간에서 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동의합니다. 하지만 실무적으로 완벽한 분리는 곤란합니다.”

지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은우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신성가의 일원으로서 결혼을 발표하면 언론과 파파라치뿐 아니라, 내 형인 강지성 부사장 측에서 사람을 붙일 겁니다. 주말마다 본가에 드나들어야 하고, 불시에 부모님이 찾아오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다른 주소지에 사는 것은 일주일도 안 되어 덜미가 잡힐 위험이 큽니다.”

세라가 펜 끝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지혁의 말을 거들었다.

“지혁이 말이 맞습니다, 서은우 씨. 법률적으로 위장 혼인 소송이 제기될 경우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실질적 동거 여부입니다. 법적 안전장치를 위해서라도 공동의 주소지와 실질적인 ‘동거의 흔적’은 필요합니다.”

은우는 눈을 가늘게 떴.

“그렇다면 한 침대를 쓰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럴 리가요.”

지혁이 즉시 부정했다.

“공식적인 신혼집을 구하되, 내부 공간을 완전히 분리하는 방안을 제안합니다. 침실과 화장실을 각각 독립적으로 사용하고, 상대방의 개인 영역에는 사전 동의 없이 출입할 수 없다는 조항을 붙이면 됩니다. 흔적은 최소한으로 만들죠. 칫솔 두 개, 외출복 몇 벌, 그리고 필요할 때 같은 공간에 머무는 시늉 정도면 충분합니다.”

은우는 잠시 머릿속으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계산해 보았다. 지혁의 말대로 가문의 감시나 언론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공간 공유의 흉내가 불가피했다.

“좋습니다. 공식 거주지 내 사적 공간의 철저한 분리. 이 조항을 명시하는 조건으로 수락하겠습니다. 세라 씨, 적어주세요.”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주 흥미진진하네요.”

세라는 미소를 지으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민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는 다음 페이지로 서류를 넘겼다.

“다음은 사업 협력 조항인 제12조입니다. 전무님이 W&U 랩의 설립 자금으로 7억 원을 투자하신다고 하셨는데, 이에 대한 세부 구조를 정형화하고 싶습니다.”

지혁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했다.

“구조라면?”

“전무님의 투자는 의결권이 없는 전환우선주(RCPS) 형태로 제한합니다. 투자 지분율은 최대 30%를 넘지 않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지혁 씨나 신성그룹 측이 W&U의 경영권, 인사권,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에 관여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하고자 합니다. 제 회사의 의사결정권은 오직 대표인 저 서은우에게만 귀속됩니다.”

뒤쪽에서 민규의 턱이 아주 살짝 벌어졌다. 7억 원이라는 거금을 투자받으면서 경영권 간섭을 100% 차단하겠다는 요구는 자본 시장에서 지나치게 당돌한 조건이었다. 보통의 창업자라면 투자자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은우는 눈빛 하나 흐려지지 않고 지혁을 직시했다.

지혁은 턱을 괴고 은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불쾌함 대신 호기심과 묘한 평가의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7억은 적은 돈이 아닙니다. 내가 경영권을 완전히 포기하는 대가로, 서은우 씨는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전무님이 후계 평가에서 얻을 ‘안정된 가정’이라는 자격. 그리고 W&U가 성공시킬 신성리테일의 핵심 브랜드 프로젝트 실적입니다.”

은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신성리테일의 브랜드 혁신 프로젝트를 반드시 성공으로 이끌어 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업자로서의 사업적 성과일 뿐, 지분 관계로 얽힌 종속적 성과가 아닙니다. 제가 완벽한 독립성을 유지하고 제 이름으로 성과를 내야만, 전무님 또한 낙하산이나 정략결혼을 통한 권력 세습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제 성공이 곧 전무님의 성공입니다. 제 실력을 믿고 계약을 제안하신 것 아닙니까?”

방 안에는 팽팽한 정적이 감돌았다.

윤세라는 펜을 돌리며 지혁의 반응을 기다렸다. 지혁은 은우의 눈 속에서 타협을 모르는 확신을 읽었다.

결국 지혁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번졌다.

“맞는 말입니다. 서은우 씨가 실패하면 내 평가도 같이 무너지니까요. 좋습니다. 무의결권 전환우선주로 결정하죠. 세라, 조항 다듬어 줘.”

“완료.”

세라가 막힘없이 답했다.

“마지막으로 계약 종료 조건입니다.”

은우의 목소리가 한 톤 더 낮아졌다. 가장 민감하고 차가운 영역이었다.

“1년 뒤 계약이 만료되면 양사는 합의하에 이혼 절차를 밟습니다. 사유는 성격 차이로 대외 발표하며, 쌍방은 언론이나 제3자에게 이 계약 결혼의 실태를 평생 누설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느 한쪽의 귀책사유로 비밀이 누설되거나 상대방의 명예가 실추될 경우, 귀책 당사자는 상대방에게 초기 투자금의 세 배에 달하는 위약금을 지급합니다.”

“세 배라. 21억이군요.”

지혁이 읊조렸다.

“재벌가의 이혼 스캔들로 인해 제가 입을 타격은 제 커리어와 회사 W&U의 존폐와 직결됩니다. 그에 비하면 21억은 지극히 현실적인 안전장치입니다. 전무님에게는 그리 큰 액수도 아닐 테니, 위반하지 않으시면 될 일입니다.”

은우는 지혁의 자금력을 무기로 삼는 동시에 그 자금력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영리함을 발휘했다. 지혁은 그녀의 철저함에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찔리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는 정말로 자신에게 단 1퍼센트의 감정적 여지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좋습니다. 세 배로 하죠. 대신 나도 비밀 조항을 하나 추가하겠습니다.”

지혁이 상체를 테이블 쪽으로 좁혔다.

“말씀하십시오.”

“계약 만료 후 이혼할 때, 신성가 내부에서 서은우 씨의 평판을 고의로 훼손하거나 이혼의 책임을 당신에게 전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경우, 나는 신성그룹 내 모든 권한을 동원해 이를 방어하고 공동 대응하겠습니다. 특히 강지성 부사장의 방해 공작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책임을 지고 차단합니다.”

은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단순히 돈을 지불하는 투자자가 아니었다. 계약 결혼이 끝난 뒤 은우가 마주할 가장 현실적이고 더러운 위험—재벌가에서 쫓겨난 이혼녀라는 낙인과 시댁의 보이지 않는 음해—을 정확히 짚어내고, 그것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은우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혹은 청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영역의 보호였다.

“……그 조항도 추가하죠.”

은우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세라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태블릿 화면을 탭했다.

“양측의 요구사항이 완벽하게 정리되었습니다. 법률적으로도 흠잡을 데 없는 깔끔한 계약서가 완성되었네요. 지혁이가 가져온 초안보다 서은우 씨의 수정안이 훨씬 정교해서 제 일손이 줄었습니다.”

세라는 오피스 한쪽에 마련된 무선 프린터로 문서를 전송했다.

지-잉, 지-잉.

정적만이 감돌던 세미나실에 종이가 인쇄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따끈따끈한 온기가 남아 있는 두 부의 계약서가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였다.

[혼인 및 사업 협력 계약서]

흰 종이 위에 인쇄된 굵은 글씨가 두 사람의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은우는 만년필을 쥐었다. 손끝이 조금 차가웠다. 평생 자신의 이름을 걸고 광고 기획안에 서명해 왔지만, 타인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이 나란히 묶이는 서류에 서명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서은우.

그녀는 정갈한 글씨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맞은편에서 강지혁 역시 거침없는 필체로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강지혁.

두 사람의 이름 위에 붉은 인주가 묻은 도장이 찍혔다. 꾹 내리누르는 압력이 종이를 타고 손가락 끝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세라가 두 부의 계약서를 수거했다. 그녀는 서류를 각각 두꺼운 봉투에 넣고 붉은 왁스를 녹여 인장으로 실링을 마쳤다.

탁.

봉인이 완료되는 소리가 회의실에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이로써 법적 효력을 지닌 동업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세라는 가방을 정리하며 은우와 지혁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다음 단계는 구청이네요. 내일 오전 10시, 강남구청 로비에서 뵙겠습니다. 두 분 다 신분증, 도장, 그리고 주민등록등본을 지참해 주십시오. 혼인신고 접수까지 완료되어야 이 계약서의 모든 효력이 즉시 발생합니다.”

“알겠습니다.”

은우는 봉인된 서류 봉투를 품에 안았다.

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은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서은우 씨.”

은우는 지혁의 단단하고 넓은 손을 잡았다. 손바닥을 통해 온기가 느껴졌지만, 두 사람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운 비즈니스 파트너의 그것이었다.

“내일 뵙죠, 전무님.”

회문을 나서는 지혁의 등을 보며 은우는 봉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내일이면 서은우는 서은우가 아닌, 강지혁의 아내로 세상에 등록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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