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3화: 아내는 어떻습니까
“결혼이요?”
최민규의 목소리가 호텔 라운지 안쪽에서 반 박자 늦게 튀어나왔다.
강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후계 평가표와 서은우가 두고 간 수첩 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윤세라 변호사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펜 끝으로 평가표의 마지막 항목을 짚었다.
주주 신뢰 및 리더십 안정성.
그 아래에는 가족 행사 참석률과 사생활 리스크가 작은 글씨로 붙어 있었다.
“이 항목 때문에 사람을 구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혼인신고까지 꺼내는 건 처음 보네.”
세라가 말했다.
지혁은 건조하게 답했다.
“필요한 조건이 두 개 있습니다. 신성리테일 혁신 성과. 안정된 가정.”
“그리고 서은우 씨에게 필요한 건?”
지혁은 수첩 사진을 돌렸다.
W&U. 내가 이해한 욕망을, 내 이름으로.
“자기 이름의 회사.”
민규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전무님, 서은우 씨는 고용 제안도 거절했습니다. 그런 분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면 모욕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럴 겁니다.”
“그럼 왜…….”
“모욕인지 거래인지 판단할 기회는 줘야죠.”
세라가 펜을 내려놓았다.
“네가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건 그거야. 결혼은 투자계약보다 지저분해져. 감정이 없어도 가족이 개입하고, 가족이 개입하면 돈보다 오래 남아.”
“그래서 당신이 필요합니다.”
“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상대의 독립 검토권이 필요해. 서은우 씨가 싫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끝. 투자와 혼인도 분리해서 볼 수 있어야 하고. 강제성처럼 보이는 조항이 있으면 나는 빠져.”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규는 아직도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꼭 서은우 씨여야 합니까?”
“후계 평가용 배우자만 필요했다면 누구든 가능했겠죠.”
지혁은 평가표를 접었다.
“하지만 신성리테일을 바꿀 사람까지 필요합니다. 두 조건을 따로 해결하면 둘 다 약점이 됩니다. 한 계약 안에서 서로의 필요로 만들면 협상이 됩니다.”
“상대가 그렇게 봐 줄까요?”
“그걸 확인하러 갑니다.”
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라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강지혁.”
그가 돌아봤다.
“계약서에 적을 수 없는 걸 요구하지 마.”
지혁은 잠시 멈췄다가 답했다.
“그럴 생각 없습니다.”
은우는 호텔 회전문 앞에서 발을 멈췄다.
바깥은 이미 어두웠다. 유리문에는 그녀의 얼굴과 호텔 로비 조명이 겹쳐 보였다.
손에는 되찾은 수첩이 들려 있었다.
W&U.
내가 이해한 욕망을, 내 이름으로.
한 줄을 들킨 것만으로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더 불편한 것은 강지혁이 그 한 줄을 정확히 읽었다는 사실이었다.
“서은우 씨.”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우는 돌아섰다.
강지혁이 다가오고 있었다. 최민규는 몇 걸음 뒤에 멈춰 섰고, 라운지 쪽에는 서류 가방을 든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아직 제안이 남았습니까?”
“있습니다.”
“고용계약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지혁의 시선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들으셨습니까?”
“전무님이 충분히 크게 말씀하셨습니다.”
은우는 수첩을 가방에 넣었다.
“말씀하세요. 단, 삼 분 안에요. 오늘 저는 퇴사, 스카우트, 발주 분쟁, 후계 평가표까지 처리했습니다. 더 긴 제안은 내일로 넘기고 싶습니다.”
지혁은 곧바로 말했다.
“아내는 어떻습니까.”
은우의 표정이 처음으로 비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방금 제가 잘못 들은 겁니까?”
“아닙니다.”
“직원이 되기 싫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배우자가 되라는 뜻입니까?”
“직원보다 배우자가 낮은 위치라고 생각하십니까?”
은우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그 질문은 지금 최악입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지혁은 바로 물러섰다.
“고용 관계가 아니라 계약 관계를 제안합니다. 1년 혼인신고. 공개석상에서 부부 역할. 후계 평가 이후 합의 이혼. 감정과 사생활은 계약 범위 밖에 둡니다.”
“전무님은 지금 가장 위험한 말을 너무 반듯하게 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요. 아직 모르십니다.”
은우는 한 걸음 다가섰다.
“저는 오늘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제 이름의 회사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전무님은 그 욕망을 보고 바로 혼인신고서와 묶어 왔습니다. 저를 사업 파트너로 본 겁니까, 후계 평가표의 빈칸으로 본 겁니까?”
지혁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둘 다 아닙니다.”
“그럼요?”
“서은우 씨가 가진 필요와 내가 가진 필요를 같은 테이블에 올린 겁니다.”
“필요가 명확하다고 결혼을 합니까?”
“사업도 필요가 명확할 때 합니다.”
“결혼은 사업이 아닙니다.”
“그래서 계약이 필요합니다.”
은우는 웃지 않았다.
황당함 다음에는 불쾌함이 왔다. 그다음에는 익숙한 계산이 따라붙었다.
그 순서가 더 싫었다.
자신의 삶이 누군가의 조건표 위에서 너무 빨리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제가 얻는 건요?”
지혁은 기다렸다는 듯 조건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박자 쉬었다.
“W&U 초기 운영자금. 법인 설립과 회계, 법무 지원. 신성리테일 일부 프로젝트 우선 협상권. 투자는 내 개인 자금으로 하고, 경영권은 요구하지 않습니다.”
“투자자가 경영권을 요구하지 않는 이유는요?”
“당신이 원하는 가격에 경영권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까.”
은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제 수첩 한 줄로 너무 많은 걸 아시는군요.”
“한 줄과 오늘 당신이 거절한 계약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럼 이것도 아시겠네요. 저는 누구의 포장지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포장지로 쓰려면 설명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혁은 접힌 평가표를 은우에게 내밀었다.
전에 봤던 항목이었다. 주주 신뢰 및 리더십 안정성. 가족 행사 참석률. 사생활 리스크.
“석 달 뒤 평가에서 이 항목이 공격당할 겁니다. 내게 필요한 건 안정된 가정이라는 외형입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독립 회사의 출발 자금과 빼앗기지 않을 경영권. 서로의 필요가 명확합니다.”
“저는 전무님의 약점을 덮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장식품에게 경영권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말은 좋네요.”
“계약서로 확인하십시오.”
은우는 평가표를 돌려줬다.
“오늘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제가 거절하면요?”
“정가찬 심사도, 오늘한끼 수정안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신성리테일 고용 제안도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그 약속은 계약서에 넣으세요.”
“넣겠습니다.”
너무 빠른 대답이었다.
은우는 빠른 대답을 믿지 않았다.
“제가 요구할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W&U 지분과 경영권은 결혼 조건과 분리합니다. 투자 회수 조건은 명확히 하되 의사결정권은 제게 있어야 합니다. 가족 행사 참석 범위, 사생활 공개 범위, 신체 접촉, 거주지, 이혼 시 명예 훼손 대응까지 전부 조항으로 씁니다.”
민규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지혁은 변하지 않았다.
“가능합니다.”
“가능한지 전무님이 정하지 마세요. 제가 봅니다.”
그제야 지혁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갔다.
“좋습니다.”
은우는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하십시오.”
“저를 설득하려면 결혼이 아니라, 왜 제가 이 거래의 통제권을 잃지 않는지 증명하세요.”
지혁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그게 핵심입니까?”
“저한테는요.”
은우는 회전문 쪽으로 걸었다.
“초안 보내세요. 내일 오전 열 시. 윤세라 변호사, 전무님, 저까지 셋. 최 과장님은 기록만 하십시오.”
민규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는요?”
“제가 정합니다.”
은우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제안자는 전무님이지만, 검토자는 접니다.”
“뭐라고?”
한소라의 목소리가 카페 한쪽을 갈랐다.
은우는 노트북 화면 밝기를 낮췄다.
“목소리 낮춰.”
“야, 목소리가 문제야? 재벌집 전무가 너한테 계약 결혼을 하자고 했다고?”
“정확히는 1년 혼인신고와 공개석상 부부 역할.”
“그걸 더 정확히 말하면 더 이상해져.”
소라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일기안 근처가 아닌, 지하철 두 정거장 떨어진 작은 카페였다. 은우는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소라를 불렀다.
전부를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혼자 판단하기에는 제안의 형태가 너무 이상했다.
소라가 낮게 물었다.
“너 설마 고민해?”
“거절할 이유는 많아.”
“그럼 거절해.”
“수락할 이유도 있어.”
소라가 말을 잃었다.
은우는 노트북에 표를 만들었다.
왼쪽에는 지혁의 필요.
오른쪽에는 은우의 필요.
후계 평가. 안정된 가정. 사생활 리스크 차단.
W&U 설립. 초기 자금. 경영권. 부모님 채무와 분리된 안전망.
“돈 때문에 결혼하겠다는 말로 들리면 때려도 돼.”
“때리기 전에 물어볼게. 너 이거 네가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은우의 손이 멈췄다.
소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너 사람들 문제 보면 해결책부터 찾잖아. 오늘한끼도 그랬고 정가찬도 그랬고. 그런데 네 문제는 자꾸 표로 만들면 안전해진다고 생각해.”
“표로 만들면 최소한 구멍은 보여.”
“구멍이 아니라 낭떠러지면?”
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페 유리창 밖으로 퇴근길 사람들이 지나갔다. 누군가는 통화를 했고, 누군가는 편의점 봉투를 들고 뛰었다.
평범한 저녁이었다.
그 평범함 때문에 은우는 방금 자신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제안을 받아 들고 왔는지 다시 실감했다.
“나도 알아.”
은우가 말했다.
“결혼은 캠페인이 아니야. 실패하면 사과문으로 끝나지 않고, 내 가족과 이름까지 끌려 들어갈 수 있어.”
“그럼 왜 내일 보겠다는 건데.”
“모르면 거절도 제대로 못 하니까.”
은우는 새 줄을 만들었다.
검토 조건.
독립 변호사 선임권.
초안 사전 공유.
W&U 지분·경영권 분리.
신체 접촉 및 거주 조항 명시.
부모와 제3자 보호.
계약 종료 후 명예 훼손 공동 대응.
소라가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너 진짜 무섭다.”
“나도 지금은 내가 좀 그래.”
“무서운 게 아니라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네가 또 네 이름 지키겠다고 네 몸까지 담보로 거는 거 아닌가 해서.”
그 말은 예상보다 깊게 박혔다.
은우는 커서를 멈췄다.
“그래서 조항으로 쓸 거야.”
“뭘?”
“내 몸은 담보가 아니라고.”
소라는 더 말하지 못했다.
은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강지혁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내일 오전 열 시 가능합니다. 장소를 알려 주십시오. 초안은 한 시간 내 보내겠습니다.]
은우는 잠시 화면을 봤다.
그리고 답장을 썼다.
[초안 먼저 보내세요. 저는 제안서가 아니라 빈칸을 봅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파일 하나가 도착했다.
제목은 간단했다.
혼인 및 사업 협력 계약서 초안.
은우는 파일을 열었다.
첫 장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당사자. 목적. 기간. 비밀 유지.
두 번째 장에는 투자금과 W&U 설립 지원이 있었다.
세 번째 장에서 은우의 손이 멈췄다.
제7조 배우자 의무.
그 아래에는 아직 문장이 없었다.
빈칸이었다.
소라가 옆에서 숨을 삼켰다.
은우는 그 빈칸을 오래 바라봤다.
지혁이 일부러 비워 둔 것인지, 세라가 아직 쓰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계약에서 가장 위험한 부분은 적힌 조항이 아니었다.
아직 아무도 정의하지 않은 말.
아내.
은우는 새 문서를 열었다.
제목을 적었다.
수정 요구안 1차.
첫 줄은 망설임 없이 썼다.
배우자 의무는 역할 수행의 범위를 뜻하며, 신체와 감정의 제공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 문장을 쓰고 나서야 은우는 숨을 내쉬었다.
내일의 협상은 결혼을 받아들일지 말지가 아니었다.
누가 그 단어의 뜻을 정하는가.
그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