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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23화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23화: 손끝이 만든 무대

철문 안쪽의 재봉틀 소리가 멈춘 뒤에도 은우는 초인종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드레스 가방 안에는 이명희가 스물셋에 잃어버린 무대가 들어 있었다. 잘못 꺼내면 누군가의 상처를 다시 전시하게 될 물건이었다.

문이 조금 열렸다.

짧게 자른 머리의 여자가 경계 어린 눈으로 은우와 지혁을 번갈아 보았다. 손등에는 색연필 자국과 실밥이 붙어 있었다.

“윤해정 씨 맞으세요?”

“맞는데요. 늦은 시간에 누구시죠?”

은우는 명함을 먼저 내밀지 않았다. 재단이나 신성이라는 이름이 이 문 앞에서 먼저 작동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해정공방에서 만든 드레스를 가지고 왔어요. 고치러 온 게 아니라 만든 사람의 이름을 찾으러 왔습니다.”

해정의 시선이 가방으로 옮겨갔다. 그녀는 한참 망설이다가 문을 넓게 열었다.


작업실은 생각보다 좁았다. 벽 한쪽에는 오래된 재봉틀 두 대가 놓여 있었고 맞은편에는 해체된 재킷과 색 바랜 천 조각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창가에는 버려진 옷의 다음 계절이라고 적힌 작은 보드가 세워져 있었다.

해정은 작업대 위에 가방을 올려두고 지퍼를 천천히 내렸다.

아이보리 실크가 드러나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안감 쪽 라벨을 확인한 손끝이 작게 떨렸다.

“이 바늘땀.”

해정은 드레스의 허리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할머니가 하던 방식이에요. 겉에서는 안 보이게 두 번 감아 마감했거든요. 해정공방 라벨이 붙었다고 다 같은 옷은 아닌데 이건 확실해요.”

“이명희 여사님 드레스입니다.”

해정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신성문화재단 이사장님요?”

“네. 이번 갈라에 입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드리려 왔어요.”

“그분이 왜요?”

은우는 숨기지 않았다.

“갈라 의상 협찬이 전부 막혔어요. 누군가는 이 옷을 낡은 유품이라고 부르며 웃을 거고요.”

“그래서 재단 이름으로 공방을 다시 포장하려고요?”

해정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이 서 있었다.

지혁이 움직이려는 기색을 보였지만 은우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재단 이름보다 해정공방 이름을 앞에 세우려고요. 그래도 싫으시면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해정은 드레스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우리 공방은 이런 집안의 옷을 만들다 사라진 곳이에요. 백화점 납품이 늘면서 손바느질 단가를 맞추라는 계약을 받았죠. 할머니는 옷 한 벌을 망치느니 공방 문을 닫겠다고 하셨어요. 그 뒤로 남은 건 라벨 몇 장과 빚뿐이었고요.”

은우는 작업실 구석의 작은 옷걸이를 보았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코트 세 벌이 걸려 있었다. 천 조각의 색은 낡았지만 선은 새로웠다.

“그래서 여기서 다시 시작하고 계신 거군요.”

“시작만요. 잘 팔리는 옷을 만들라는 말은 너무 많이 들었는데 제가 만들고 싶은 옷을 입을 사람은 아직 못 찾았어요.”

해정은 드레스 가장자리의 변색 부분을 살폈다.

“이대로 입으면 위험해요. 실크가 오래돼서 조명 열을 오래 받으면 결이 상할 수 있어요. 새 천을 덧대면 원래 선이 죽고요.”

은우는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명희가 내준 옷을 갈라의 화제성 때문에 뜯어 고칠 생각은 없었다.

“원본은 지키고 싶어요. 이 옷이 견딘 시간을 바꾸고 싶지는 않아요.”

“그럼 상자에 다시 넣어야 해요.”

“아니요. 상자 밖으로 나오되 다치지는 않게요.”

해정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무슨 뜻이죠?”

은우는 드레스의 허리선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원본 위에 같은 실루엣의 얇은 외피를 새로 만들어요. 원본은 몸에 직접 닿지 않게 보존하고 새 외피가 조명과 움직임을 받아내는 거예요. 멀리서 보이는 선은 이어지지만 가까이 오면 두 시간이 겹쳐 있는 걸 알 수 있게요.”

“같은 천은 없어요.”

“없어도 됩니다. 새 천이어야 해요. 시간이 멈춘 옷이 아니라 다음 계절로 이어지는 옷이어야 하니까.”

해정은 입술을 다물었다. 잠시 뒤 그녀는 작업실 뒤편 서랍에서 낡은 노트를 꺼냈다.

노트에는 손으로 그린 패턴과 작은 천 견본이 붙어 있었다. 한 장에는 아이보리 실크와 거의 같은 색의 손염색 견본이 남아 있었다.

“할머니가 색을 맞추려고 적어둔 거예요. 이 드레스 도안도 있어요.”

은우는 노트를 들여다보며 천천히 웃었다.

“그럼 새로 만들 수 있겠네요.”

“만드는 건 할 수 있어요.”

해정은 재봉틀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갈라 같은 곳은 무서워요. 사람들이 제 옷을 보지 않고 재단가 며느리가 뭘 입었는지만 보겠죠.”


“그래서 옷만 보여주지 않을 겁니다.”

은우는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제작 과정도 보여줄 거예요. 입구에 해정공방의 작업 도구와 손을 먼저 보여주고 드레스 옆에는 제작자 이름을 적겠습니다. 후원자 이름은 기부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확인한 뒤에 보이게 할 거예요.”

해정은 태블릿 화면의 갈라 도면을 훑었다.

“그렇게 해도 결국 저는 재단이 찾아낸 사람처럼 보일 텐데요.”

“그럴 수 있죠. 그래서 계약을 하자는 거예요.”

은우는 메모장을 열었다.

“작업비는 선지급합니다. 갈라 크레딧에는 해정공방 윤해정의 이름을 단독으로 넣고요. 갈라 뒤에는 이 작업실 팝업과 주문 페이지를 연결할게요. 촬영도 해정 씨가 허락한 과정만 공개합니다. 이번 한 번의 미담으로 끝나면 안 되니까요.”

해정의 시선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판매 권리는요?”

“당연히 해정 씨에게 있습니다. W&U 랩이나 재단이 디자인을 가져가지 않아요. 우리는 갈라를 위한 협업을 제안하는 겁니다.”

지혁이 그제야 낮게 물었다.

“제작 기간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사흘은 있어야 해요. 밤을 새우면 이틀도 가능하지만 결과는 장담 못 해요.”

“사흘로 잡으세요.”

지혁의 대답은 단정했다.

은우가 그를 보자 지혁은 시선을 해정에게 둔 채 덧붙였다.

“비용과 작업 안전은 최민규 과장이 지원하겠습니다. 디자인과 공개 범위는 두 분이 결정하십시오.”

대신 해결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바닥을 단단히 다져 주는 말이기도 했다.

해정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재봉틀 옆에 붙어 있던 오래된 라벨 한 장을 떼어 손바닥에 올렸다.

“계약서부터 주세요.”

은우가 눈을 크게 뜨자 해정은 씩 웃었다.

“후원 받는 사람으로 나오진 않을 거예요. 해정공방 윤해정의 작업비와 이름값을 계약서에 적어주세요. 갈라가 끝나도 제 옷을 제가 팔 수 있게요.”

“좋아요. 내일 오전까지 계약서 초안을 보내겠습니다.”

“작업 과정 촬영도 제가 허락한 범위에서만요.”

“당연하죠.”

은우는 손을 내밀었다. 해정은 잠시 후 그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은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소라에게서 파일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언니. 협찬 취소한 숍 직원이 지인에게 보낸 음성 메시지 확보했어. 오혜란 위원 쪽 후원사 담당자가 이번 갈라 의상은 받지 말라고 지시했대. 직접 이름은 안 나왔지만 시간표가 맞아.]

은우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해정이 물었다.

“문제 생겼어요?”

“아니요. 왜 우리가 빨라져야 하는지 확인한 것뿐이에요.”

은우는 화면을 끄고 노트를 다시 펼쳤다.

“오늘은 드레스 상태부터 같이 보죠. 저는 내일 무대가 왜 이 옷을 필요로 하는지 설득하겠습니다.”

해정은 대답 대신 재봉틀 전원을 켰다.

낮고 일정한 모터 소리가 작업실을 채웠다. 낡은 라벨 곁에 새 천이 놓였다.

지혁은 문가에 기대 선 채 은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또다시 누군가가 만들어 둔 문 앞에서 허락을 기다리지 않았다. 다른 문을 만들고 있었다.


다음 날 오전 W&U 랩 회의실 벽면에는 갈라장 도면이 크게 붙었다.

은우는 입구에서 무대까지 이어지는 선을 그었다.

“후원자 월을 없애요. 대신 첫 복도에 제작자들의 손과 도구를 보여주는 영상을 둡니다. 드레스는 끝에서 공개하지 않고 시작점에 둬요. 손으로 만든 시간이 이 행사의 주인공이라는 걸 처음부터 보게요.”

소라는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기부금 사용처는 실시간으로 띄우고요. 후원사 이름은?”

“기부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확인한 뒤에 보이게 해요. 이름이 기부보다 앞에 서면 안 되니까.”

윤해정은 도면 옆에 놓인 계약서를 읽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 아래에는 작업비와 판매 권리 그리고 제작 과정 공개 범위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이렇게 하면 후원사들이 싫어할 텐데요.”

“그래서 후원도 선택하게 할 겁니다.”

은우는 도면에 새 표시를 더했다.

“이름을 남기고 싶은 사람은 제작자 한 팀의 다음 시즌을 지원하면 돼요. 단순한 테이블 후원이 아니라 기술이 이어지는 비용을 내는 거죠. 과시가 아니라 책임을 사게 만드는 겁니다.”

지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잠시 말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자료를 보내십시오.”

통화를 마친 지혁의 표정이 굳었다.

“갈라 개편안 초안이 후원사 실무자에게 넘어갔습니다. 그쪽에서 오혜란 위원에게 전달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럼 어제의 협찬 취소도.”

소라가 말을 흐렸다.

“정황은 충분합니다. 다만 지금은 지시선까지 단정할 수 없습니다.”

지혁은 단호했다.

은우는 도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예상했어요. 그러면 더 공개적으로 하죠. 우리가 숨길 게 없다는 걸 무대로 보여주면 됩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발신자는 오혜란이었다.

[서 대표님. 드레스 하나로 행사의 격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인데 무대 사용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랍니다. 운영위원회가 동선을 다시 검토할 수도 있으니 너무 앞서가진 마세요.]

소라의 얼굴이 굳었다.

“운영위원회까지 끌어들이겠다는 거네요.”

지혁이 낮게 말했다.

“제가 이사회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는 무대를 더 크게 만들게요.”

회의실 창밖으로 햇빛이 길게 들어왔다.

누군가는 낡은 옷을 조롱거리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은우는 그 옷을 입고 이름 없는 손들이 먼저 보이는 무대 위에 설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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