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22화: 옷장 속의 첫 무대
W&U 랩 회의 테이블 위에는 거절 메일이 줄줄이 떠 있었다.
갈라 드레스 협찬 보류 안내.
내부 일정 조정으로 인한 대여 불가.
브랜드 이미지 검토 후 재논의.
문장은 조금씩 달랐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은우가 신성문화재단 갈라에 입을 드레스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소라는 세 번째 메일을 닫으며 노트북 화면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언니. 이건 우연 아니에요. 세 군데가 한 시간 간격으로 같은 소리를 하는데 우연이면 제가 오늘부터 커피 끊어요.”
“그건 너무 큰 희생인데.”
“농담할 때 아니거든요. 드레스 숍만 막힌 게 아니에요. 헤어 메이크업 팀 두 군데도 갑자기 일정을 보류했대요. 스타일리스트 쪽에서는 아예 ‘이번 갈라 담당자는 잡음이 있어서 어렵다’는 말까지 돌고 있고요.”
은우는 소라가 넘긴 메신저 캡처를 천천히 읽었다.
단어들은 우아했다. 품격. 조율. 이미지. 신중한 검토.
하지만 속뜻은 천박할 만큼 분명했다.
네가 샹들리에 아래에 설 자격이 있는지 먼저 허락받으라는 뜻.
“오혜란 위원이군.”
“맞죠? 그쪽 백화점 VIP 살롱하고 명품 협찬 라인이 딱 이렇게 움직인대요. 드레스를 못 구하면 갈라 당일 언니한테 두 가지 프레임이 붙겠죠. 준비 안 된 며느리. 격 모르는 기획자.”
은우는 펜 끝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갈라의 구조를 바꾸겠다고 선언하자마자 돌아온 반격이 드레스라니. 우아한 척하는 세계가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은 생각보다 노골적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지혁이었다.
[상황 들었습니다. 필요하면 오늘 안에 다른 라인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짧고 단정한 문장.
은우는 화면을 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지혁은 해결책부터 밀어 넣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가 요청하면 곧장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의 문장이었다.
[괜찮아요. 이번엔 제가 먼저 답을 찾아볼게요.]
답장을 보내자 곧바로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알겠습니다. 위험하거나 불편하면 바로 말하십시오.]
은우는 그 문장을 조금 오래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소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혁 씨가 구해준대요?”
“구해준다고 하지 않았어. 말하면 준비하겠다고 했지.”
“그게 그 말 아닌가요?”
“달라. 아주 많이.”
은우는 노트북을 닫았다.
“내가 기부보다 과시가 앞선 갈라를 바꾸겠다고 해놓고 내 의상부터 과시의 허가를 받아서 해결하면 메시지가 무너져. 오혜란 위원이 원하는 게 그거야. 서은우도 결국 입장권은 명품 숍에서 받아야 한다는 그림.”
“그럼 뭘 입어요?”
은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답은 없었다. 다만 오혜란이 만든 판 위에서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때 비서실 번호가 화면에 떴다. 발신자는 이명희 여사의 비서였다.
[서 대표님. 이사장님께서 지금 잠시 재단 부속 보관실로 와 주실 수 있는지 여쭙습니다.]
은우는 짧게 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라야. 협찬 취소 메일 원문 전부 저장해 둬. 말 맞춘 흔적도 시간대별로 정리하고.”
“반격용?”
“아니. 아직은 관찰용.”
은우는 코트를 집어 들었다.
“상대가 어떤 언어로 사람을 문밖에 세우는지 알아야 문을 다른 곳에 낼 수 있으니까.”
신성문화재단 본관 뒤편에는 외부인에게 거의 공개되지 않는 낮은 별관이 있었다.
은우가 경비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자 일정하게 조절된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벽면에는 오래된 공연 의상과 재단 초창기 후원 작가들의 작품이 정갈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사진 속 후원자들의 화려한 웃음과 달리 이곳에는 손때 묻은 도구와 빛바랜 천과 낡은 악보가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명희는 안쪽 유리문 앞에 서 있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얼굴은 평소처럼 우아했지만 눈빛은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오 위원님이 움직였지요.”
은우는 숨기지 않았다.
“네. 협찬 드레스와 스타일리스트 라인이 모두 막혔습니다.”
“내가 전화 몇 통을 하면 다시 열릴 겁니다.”
명희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래서 더 무거웠다.
은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제가 갈라를 바꾸겠다는 이유가 사라집니다. 후원자가 자기 이름을 크게 쓰기 위해 오는 밤을 바꾸자고 해놓고 제 이름을 시어머니 권한 뒤에 숨길 수는 없습니다.”
명희는 은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유리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부른 겁니다.”
보관실 가장 안쪽 옷장에는 오래된 흰 천 커버가 씌워진 드레스 한 벌이 걸려 있었다. 명희는 아주 조심스럽게 커버 끈을 풀었다.
아이보리빛 실크 드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장식은 없었다. 허리선은 단정했고 스커트는 물결처럼 부드럽게 떨어졌다. 오래된 옷인데도 선이 무너지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손으로 한 땀씩 올린 작은 진주 장식이 빛을 머금고 있었다.
“제가 스물셋에 맞춘 드레스예요.”
명희의 손끝이 드레스 어깨선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첫 독주회에서 입으려고 했습니다. 그날 무대에 서면 아버지가 제 결혼을 조금 늦춰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어리석었지만 그때의 저는 그 무대가 제 인생을 바꿔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독주회는 취소됐고 결혼식 일정은 앞당겨졌습니다. 이 드레스는 한 번도 무대에 서지 못했어요.”
명희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은우는 그 안에 오랫동안 접어 둔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로 저는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이름 없는 손들이 최소한 자기 무대를 빼앗기지 않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무대가 또 다른 사람들의 과시장이 되었지요.”
명희는 드레스를 은우 쪽으로 돌렸다.
“서 대표. 이 옷을 입어줄 수 있겠습니까?”
은우의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이것은 단순한 드레스가 아니었다. 명희가 포기해야 했던 무대였고 재단의 처음 이유였다. 그런 물건을 건네받는 일은 도움을 받는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여사님. 이건 너무 소중한 옷입니다.”
“그래서 주는 겁니다.”
명희는 희미하게 웃었다.
“오혜란 위원은 드레스로 서 대표를 문밖에 세우려 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드레스로 문을 열어야지요. 비싼 이름으로 여는 문이 아니라 잊힌 이름으로 여는 문.”
은우는 드레스 안쪽을 살폈다. 안감 아래 작은 천 라벨이 남아 있었다.
해정공방.
바늘땀이 고르고 정직했다. 은우는 라벨 위에 손끝을 얹었다.
“이걸 그대로 입지는 않겠습니다.”
명희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은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대로 입으면 여사님의 이야기가 제 방패가 됩니다. 저는 그걸 원하지 않아요. 대신 이 드레스가 왜 이번 갈라에 있어야 하는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남는 손, 무대에 오르지 못했던 옷, 누군가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구조. 그게 ‘손끝에 남는 내일’이니까요.”
명희는 한참 동안 은우를 바라보았다.
“역시 그냥 예쁜 며느리 노릇은 못 하겠군요.”
“그건 계약서에도 없었습니다.”
명희가 처음으로 작게 웃었다.
“좋아요. 마음대로 해 봐요. 대신 이 드레스가 상처받지 않게 해줘요.”
“네. 옷도 여사님의 이야기도 함부로 다루지 않겠습니다.”
은우는 두 손으로 드레스 가방을 받아 들었다. 무게는 가벼웠지만 손끝에 닿는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밤이 깊은 펜트하우스 서재에는 노란 스탠드 불빛만 켜져 있었다.
지혁은 드레스 가방을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놓는 은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가방에 머물렀다가 곧 은우의 얼굴로 옮겨왔다.
“어머니가 내주신 겁니까.”
“네. 스물셋의 이명희가 입지 못한 첫 무대의 드레스래요.”
지혁의 얼굴이 아주 잠깐 굳었다. 그는 어머니가 피아노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물건으로 마주한 적은 없는 듯했다.
은우가 지퍼를 열자 아이보리 드레스가 조용히 펼쳐졌다.
지혁은 가까이 다가와 옷자락 끝을 살폈다. 오래된 실크 가장자리에는 희미한 변색이 있었고 안쪽 솔기에는 몇 번 수선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오혜란 쪽에서 알면 공격할 겁니다. 낡은 옷을 명품 드레스 대신 입는다고 조롱하겠지요.”
“맞아요. 그래서 숨기면 안 돼요.”
은우는 드레스 안감의 라벨을 지혁에게 보여주었다.
“해정공방. 여사님은 이 이름을 잊지 않으려고 보관하셨대요. 저는 이 드레스의 낡음을 감추는 대신 이 옷이 누구의 손에서 왔는지 보여줄 거예요.”
“어머니의 개인사를 전면에 세우겠다는 뜻입니까.”
“아니요. 여사님을 팔지 않을 겁니다. 다만 무대에 오르지 못한 옷이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구조를 만들 겁니다. 이번 갈라가 지원하려는 것도 결국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지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은우는 그가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공격받을 가능성, 명희의 상처가 소문으로 소비될 가능성, 그리고 이 모든 판이 또다시 오혜란에게 이용될 가능성.
“위험합니다.”
“알아요.”
“그럼에도 하겠습니까.”
“네.”
은우는 천천히 드레스 가방을 닫았다.
“대신 이번에는 먼저 말할게요. 위험해지면 지혁 씨에게 바로 알리겠습니다.”
지혁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 약속이면 충분합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은우에게는 어떤 호화로운 드레스보다 더 든든한 안전장치처럼 들렸다. 통제하려 들지 않고 선택을 기다리는 사람. 그녀가 요청할 때까지 손을 뻗지 않지만 요청하는 순간 가장 먼저 붙잡아 줄 사람.
은우는 라벨 사진을 찍어 소라에게 보냈다.
오래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언니. 해정공방 지금은 없어졌는데 장인의 손녀가 브랜드 준비 중이래요. 이름 윤해정. 작은 작업실 주소 찾았어요.]
뒤이어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안 좋은 소식. 오혜란 쪽에서 벌써 말 흘려요. 이명희 여사가 며느리한테 낡은 유품 드레스나 입히려 한다고요.]
은우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다.
“빠르네요.”
“오혜란 말입니까.”
“네. 그리고 우리도 빨라야겠어요.”
은우는 노트북을 열어 윤해정의 작업실 주소를 검색했다. 오래된 골목 끝에 있는 작은 2층 건물이었다. 홈페이지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룩북 사진 몇 장과 문장 하나가 떠 있었다.
버려진 옷의 다음 계절을 만듭니다.
은우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번 갈라에 딱 맞는 사람이네요.”
지혁은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지금 갈 겁니까.”
“가능하면 지금요. 오혜란 위원이 이 드레스를 낡은 옷으로 만들기 전에 우리가 먼저 내일의 옷으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지혁은 아무 말 없이 코트를 걸쳤다.
이번에도 대신 결정하지 않았다. 다만 은우가 갈 방향에 조용히 안전한 동선을 붙여 주었다.
밤 열한 시가 가까운 시간, 두 사람은 성수동의 오래된 골목 앞에 멈춰 섰다.
간판도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작업실 창 너머로 재봉틀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은우는 드레스 가방을 단단히 쥐었다.
오혜란은 드레스 하나로 은우를 무대 밖으로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은우는 그 드레스 하나로 무대의 중심을 바꿀 생각이었다.
“지혁 씨.”
“듣고 있습니다.”
“이번 갈라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은우는 낡은 철문 앞 초인종을 눌렀다.
안쪽에서 재봉틀 소리가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