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21화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21화: 기부의 얼굴

W&U 랩의 첫 아침은 생각보다 훨씬 소란스러웠다.

은우가 사무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소라가 노트북을 번쩍 들어 보였다. 화면에는 한남동 펜트하우스 단지 앞에서 찍힌 사진들이 줄줄이 떠 있었다.

지혁이 은우를 품 안으로 끌어안은 순간이었다.

은우의 카멜색 코트 자락은 그의 손에 구겨져 있었고 지혁의 얼굴에는 평소의 차가운 계산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안경 너머 검은 눈동자는 카메라가 아니라 오직 은우의 안위를 향해 있었다.

기사 제목은 노골적이었다.

신성그룹 차남 강지혁 전무, 신혼 아내 향한 본능적 보호.

계약 결혼 의혹? 사진 한 장이 답했다.

“언니. 이거 강지성 쪽에서 흘린 거 맞죠? 그런데 댓글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혔어요. 다들 영화 포스터 같다고 난리예요.”

소라의 목소리에는 흥분과 걱정이 반쯤 섞여 있었다. 은우는 화면을 천천히 훑었다.

강지성은 분명 균열을 잡으려 했을 것이다. 각방 의혹이나 불화설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토바이 사고라는 돌발 변수와 지혁의 반사적 행동이 모든 프레임을 뒤집어 놓았다.

“강 부사장님이 자기 돈으로 우리의 브랜드 필름을 찍어준 셈이네.”

은우는 담담히 말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사진 속 지혁의 눈빛을 볼 때마다 차 안에서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당신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심장이 쓸데없이 다시 빨라졌다. 은우는 태블릿을 내려놓고 숨을 가다듬었다.

“소라야. 기사 반응 캡처해 두고 악성 댓글은 법무 라인에 넘길 수 있게 분류해 줘. 우리가 먼저 퍼뜨리지는 않아. 하지만 누가 계약 결혼설을 다시 꺼내면 이 사진들이 자연스럽게 방어 자료가 되게 만들어.”

“알겠어요. 그런데 언니 얼굴 지금 좀 빨개요.”

“실내가 덥네.”

“아직 난방 안 켰는데요.”

은우가 소라를 조용히 바라보자 소라는 재빨리 노트북 뒤로 숨었다. 그때 은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이명희 여사 비서실이었다.

[서 대표님. 이사장님께서 오늘 오후 신성문화재단 갈라 준비 회의에 참석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쭙고 싶어 하십니다.]

은우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신성문화재단 갈라.

매년 사교계와 재계 인사들이 모여 거액의 후원금을 약정하는 행사였다. 화려한 드레스와 샴페인 타워와 협찬사 로고가 넘치는 밤. 그러나 명희 여사가 단순히 얼굴마담이 필요해서 자신을 부르지는 않았을 터였다.

“자료 먼저 받을 수 있을까요. 지난 3년 치 예산표와 후원금 집행 내역, 좌석 배치표까지요.”

[이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다며 이미 보내두셨습니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메일 알림이 도착했다. 은우는 첨부 파일을 열었다. 화려한 갈라 포스터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예산 항목이었다.

플라워 장식. 샴페인 협찬 대응 의전. VIP 테이블 전용 기프트. 포토월 제작. 셀럽 초청비.

은우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기부 행사가 아니라 과시 행사용 런웨이네.”

소라가 옆에서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낮게 욕을 삼켰다. 은우는 펜을 집어 들고 예산표 위에 빨간 선을 긋기 시작했다.

오늘의 전장은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였다.


오후 세 시, 신성문화재단 회의실은 고요한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긴 타원형 테이블 상석에는 이명희 여사가 앉아 있었다. 회의실 벽면에는 역대 자선 갈라 사진들이 정갈하게 걸려 있었다. 진주 목걸이와 실크 드레스를 걸친 후원자들이 샴페인 잔을 들고 웃는 사진들이었다.

후원 대상인 무명 공예가나 청년 예술가의 얼굴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은우는 그 사진들을 지나쳐 테이블 끝에 놓인 자료철 앞에 섰다. 회의실 오른편에는 재단 실무 이사들과 후원위원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오혜란이었다.

국내 주요 백화점 VIP 살롱과 명품 브랜드 협찬망을 쥐고 있는 사교계 실세. 그녀는 검은 실크 블라우스 위에 진주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미소는 우아했지만 눈빛은 평가표처럼 차가웠다.

“서 대표. 올해 갈라를 어떻게 보았나요?”

명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질문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은우는 노트북을 연결했다. 첫 화면에는 지난 3년간의 갈라 예산 구조가 간단한 막대그래프로 정리되어 있었다.

“후원금 총액은 매년 늘었습니다. 하지만 행사 운영비도 같이 늘었습니다. 특히 장식과 의전, VIP 기프트 비용이 증가하면서 실제 창작 지원금으로 전환되는 비율은 떨어졌습니다.”

회의실 안이 술렁였다. 재단 실무 이사 한 명이 곧장 반박했다.

“서 대표님. 갈라의 품격이 있어야 후원자들이 지갑을 엽니다. 최고급 장식과 의전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입니다.”

“맞습니다. 후원자는 자신이 존중받는다고 느껴야 돈을 씁니다.”

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슬라이드로 넘겼다.

“문제는 존중의 방식입니다. 지금 구조에서는 후원자가 자기 이름이 얼마나 큰 테이블 카드에 적히는지만 확인합니다. 하지만 돈이 누구의 작업실로 가는지, 그 돈이 어떤 손을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지 알 수 없습니다.”

스크린에 낡은 작업대 사진이 떠올랐다. 칠이 벗겨진 나무 상판 위에는 흙 묻은 손자국과 오래된 줄자가 놓여 있었다.

“올해 갈라의 이름을 바꾸겠습니다. 손끝에 남는 내일.”

은우가 리모컨을 눌렀다. VIP 등급별 좌석표가 사라지고 후원 분야별 테이블 배치도가 나타났다.

“테이블은 후원 분야별로 재배치합니다. 도예, 섬유, 목공, 금속, 지역 공방. 후원자는 자신이 지원할 분야의 작가와 같은 테이블에 앉습니다. 포토월에는 협찬사 로고를 크게 붙이지 않습니다. 대신 후원금이 들어갈 작업대와 장비 목록을 공개합니다.”

은우는 잠시 숨을 골랐다.

“전통 가마 보수비. 청년 공예가 공동 작업실 임대료. 지역 장인의 온라인 판매 교육비. 후원자가 약정하면 그 자리에서 투명 집행 보드에 반영됩니다.”

“그럼 후원자 이름 노출은요?”

누군가 날카롭게 물었다.

“이름은 남깁니다. 다만 샴페인 타워 옆이 아니라 누군가의 작업대 옆에 남깁니다. 후원자가 사고 싶은 건 허영이 아니라 자기 돈이 바꾼 결과입니다. 우리가 그 결과를 더 우아하게 보여주면 됩니다.”

명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은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평가와 오래 눌러둔 감정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내가 이 재단을 처음 만든 이유가 그것이었지요.”

명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름 없는 손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손보다 후원자의 장갑이 더 크게 보였어요.”

회의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은우는 명희의 말에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이번 갈라는 기부자의 얼굴이 아니라 기부가 닿는 얼굴을 보여줘야 합니다.”


“낭만적인 말은 좋네요. 하지만 사교계 행사를 너무 모르시는군요.”

오혜란이 서늘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녀는 완벽하게 손질된 손톱으로 자료철을 가볍게 두드렸다.

“후원자들이 갈라에 오는 이유는 선행만이 아닙니다. 같은 급의 사람들끼리 서로를 확인하고 위상을 인정받기 위해서죠. 그런데 테이블을 공방별로 섞고 협찬사 로고를 줄인다니요. 이러면 격이 떨어집니다.”

은우는 혜란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격은 비싼 꽃값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혜란의 입매가 굳었다.

“서 대표님은 아직 이런 자리에 서본 경험이 많지 않으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죠. 갈라의 격은 아주 작은 것에서 무너집니다. 좌석 순서, 드레스 코드, 협찬 브랜드, 포토콜 동선. 그런 걸 모르고 숫자만 들이대면 행사가 싸구려 캠페인이 됩니다.”

지혁이 회의실 뒤편에서 한 걸음 움직였다.

은우는 그 기척을 느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나서면 그녀는 보호받는 아내가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획자로서의 은우였다.

“오 위원님 말씀이 맞습니다. 갈라의 격은 작은 것에서 무너집니다.”

은우는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는 포토콜 동선을 바꾸자는 겁니다. 지금처럼 후원자가 드레스와 주얼리를 보여주고 지나가면 사진은 하루짜리 화제가 됩니다. 하지만 후원자가 자신이 지원할 작가의 작품을 들고 입장하면 이야기가 생깁니다. 누가 무엇을 입었는지가 아니라 누가 어떤 손을 살렸는지가 남습니다.”

은우는 다음 자료를 넘겼다. 후원자 입장 동선 옆에 작가의 작업 사진과 짧은 소개 문구가 붙어 있었다.

“드레스 코드는 유지합니다. 협찬 브랜드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대신 브랜드 협찬품 하나당 작가 지원금 매칭을 의무화합니다. 비싼 이름을 더 비싸게 보이게 하는 밤이 아니라 비싼 이름이 책임을 지는 밤으로 만들자는 겁니다.”

혜란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다시 찔렀다.

“말은 아주 좋네요. 그런데 서 대표님 본인은 그 밤에 어떤 자격으로 서실 건가요? 신성가 며느리? W&U 대표? 아니면 이사장님이 아끼는 새로운 장식품?”

회의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지혁의 얼굴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그러나 은우는 손에 든 리모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소리는 작았지만 충분히 선명했다.

“저는 이번 갈라의 문제를 해결하러 온 기획자로 섭니다.”

은우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리고 오 위원님이 말씀하신 그 질문 자체가 이번 행사의 문제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우리는 늘 누가 어떤 자격으로 샹들리에 아래에 서는지만 따졌습니다. 이제는 누가 그 빛 아래로 들어오지 못했는지 봐야 합니다.”

혜란의 미소가 조금씩 사라졌다.

명희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충분합니다.”

단 두 음절이 회의실 전체를 정리했다.

명희는 은우의 자료철을 덮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올해 갈라는 서 대표안으로 갑니다. 재단 실무팀은 오늘부터 예산표를 다시 짜세요. 플라워 장식은 절반으로 줄이고 VIP 기프트는 전면 재검토합니다. 오 위원님.”

명희의 시선이 혜란에게 닿았다.

“협찬사는 서 대표가 제시한 매칭 구조에 맞춰 다시 접촉하세요. 불편해하는 브랜드가 있다면 굳이 붙잡을 필요 없습니다.”

혜란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사장님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전혀 따르지 않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은우는 재단 복도 끝 창가에 잠시 멈춰 섰다.

유리창 너머로 늦은 오후의 빛이 건물 사이를 비스듬히 가르고 있었다. 회의실에서는 이긴 것처럼 보였지만 승리감은 크지 않았다. 갈라의 구조를 바꾸는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사교계는 표면적으로 우아했고 실제로는 촘촘했다. 그 촘촘한 망을 쥔 사람들이 움직이면 작은 흠 하나도 곧장 조롱거리가 될 수 있었다.

“서 대표.”

지혁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는 회의 내내 한 번도 은우의 말을 끊지 않았다. 나서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음을 은우는 안다. 혜란이 자격을 운운했을 때 그의 손등에 힘줄이 섰던 것도 보았다.

“아까 왜 참으셨어요?”

은우가 먼저 물었다.

지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나서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서 대표가 내 보호가 아니라 자기 논리로 그 자리를 이겨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은우의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믿어주신 거네요.”

“믿었습니다.”

지혁의 대답은 짧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은우는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계산하셨네요.”

“이번에는 했습니다. 서 대표가 다치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은우는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눌렀다. 지혁의 말은 여전히 직선으로 날아와 방어벽의 빈틈을 정확히 건드렸다.

그때 은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소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언니. 방금 이상한 연락 받았어요. 갈라 드레스 협찬 리스트에 있던 숍 세 군데가 전부 일정을 보류하겠대요. 이유를 물어도 내부 사정이라고만 해요.]

은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혁이 화면을 보고 낮게 물었다.

“오혜란 쪽입니까?”

“아마도요.”

은우는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갈라의 메시지를 바꾸자마자 사교계는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반격했다. 여자의 자격을 옷으로 평가하고 무대에 서기 전부터 망신을 주는 방식.

은우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드레스라.”

지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필요하면 내가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니요. 이번에도 제가 해볼게요.”

은우는 고개를 들었다. 창밖의 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날카롭게 걸렸다.

“기부보다 과시가 앞선 갈라를 바꾸겠다고 했는데 제가 입을 옷부터 과시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면 말이 안 되죠.”

지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위험해지면 바로 말하십시오.”

“그건 계약서 조항인가요?”

“아니요.”

지혁의 시선이 흔들림 없이 은우에게 머물렀다.

“내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은우는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복도 끝으로 저녁 그림자가 길게 내려앉았다.

갈라의 첫 판은 열렸고 사교계의 진짜 텃세는 이제 막 칼끝을 드러내고 있었다.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