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20화: 쇼윈도 아래의 심박수
"정말입니까? 출근 동선을 우회하는 대신 정면으로 나가겠다고요?"
지혁의 단정한 눈썹이 가볍게 좁혀졌다. 아침의 평화로움이 최민규 과장의 긴급 보안 문자 한 통으로 깨진 직후였다. 셔츠 단추를 서너 개 풀고 아일랜드 식탁에 기대어 아침 커피를 마시던 지혁은 어느새 평소의 철저하고 냉철한 전략기획 전무의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은우는 45도로 비스듬히 돌려진 머그잔 손잡이를 가볍게 감싸 쥐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네. 강지성 부사장님이 사람을 붙였다는 건, 우리가 이 한남동 펜트하우스에 입주하자마자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겠다는 뜻이에요. 만약 여기서 우리가 지하 주차장의 외진 동선으로 피하거나 차량을 가리는 등 적극적으로 도망치면 어떻게 될까요?"
지혁은 은우의 말을 경청하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우리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확신을 주겠지. 각방을 쓴다거나, 쇼윈도 부부라는 심증을 굳히고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겁니다."
"정답이에요. 마케팅에서도 똑같아요. 라이벌 회사가 우리 제품의 약점을 캐내려 할 때, 가장 나쁜 대처는 소극적으로 해명하거나 숨는 거예요. 오히려 그들이 주목하는 카메라 렌즈 앞으로 직접 걸어 나가서 완벽하게 조율된 브랜드 가치를 보여줘야 해요. 노이즈를 진정성으로 뒤집는 순간이죠."
은우는 아침 햇살이 비쳐드는 다이닝룸을 지나 안방 드레스룸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강 부사장님이 보낸 파파라치라면, 그들이 원하는 구도를 우리가 선제적으로 설계해 주는 게 빨라요. 전무님, 오늘 넥타이는 어떤 걸로 하실 건가요?"
지혁은 은우의 뒤를 따라 드레스룸으로 들어섰다. 은우의 화사한 카멜색 코트와 지혁의 묵직한 차콜 슈트가 한데 섞여 있는 옷장 앞에서, 지혁은 네이비와 블랙 실크 넥타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차콜 슈트에는 네이비가 무난할 겁니다."
"아니요, 오늘은 더 화사하게 가죠. 실버 그레이 톤으로 하세요. 잉꼬부부처럼 화려하고 행복해 보이는 인상을 줘야 하니까요."
은우는 옷장 구석에서 은은한 광택이 도는 실버 그레이 색상의 실크 타이를 골라 지혁에게 건넸다. 지혁이 타이를 받아 목에 걸려 하자, 은우가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더 좁혀 들어왔다.
"제가 해 드릴게요. 파파라치가 언제 망원 렌즈로 창문 너머를 들여다볼지 몰라요.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지혁의 몸이 순간적으로 단단히 굳어졌다. 은우는 지혁의 화이트 셔츠 깃 아래로 매끄러운 실크 타이를 밀어 넣고, 꼼꼼하게 매듭을 짓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한 뼘도 되지 않았다. 은우의 머리칼에서 풍기는 잔잔한 라벤더 향기가 지혁의 콧끝을 부드럽게 스쳤다.
은우가 윈저 노트 매듭을 조이며 지혁의 셔츠 단추를 채워줄 때, 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은우의 하얗고 곧은 손가락 끝이 목덜미와 가슴팍에 가볍게 스칠 때마다, 얇은 셔츠 천 너머로 지혁의 뜨거운 체온이 은우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실루엣은 영락없이 다정한 부부의 아침 풍경이었다.
"연습이라고 생각하세요."
은우가 지혁의 굳어 있는 검은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속삭였다.
"전무님은 저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내로 바라보셔야 해요. 눈빛에 차가운 숫자 대신 온도가 담겨야 합니다. 지금처럼 그렇게 로봇처럼 긴장하고 있으면 안 돼요."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혁의 목소리가 턱 막힌 듯 가라앉아 울렸다. 노력 수준이 아니라,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억누르느라 온몸의 근육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은우는 지혁의 타이를 살짝 잡아당겨 매듭을 완성하고는 그의 칼깃을 두어 번 톡톡 쳐서 정리했다. 실크 타이의 보드라운 감촉이 지혁의 셔츠 깃 위에서 매끄럽게 정돈되었다.
"됐어요. 아주 멋진 남편의 모습이네요. 그럼 이제 나가볼까요?"
펜트하우스 공동 현관을 나서는 순간, 맑고 서늘한 아침 공기가 두 사람의 뺨을 스쳤다.
은우는 자연스럽게 지혁의 오른쪽 팔에 팔짱을 끼었다. 단단하게 단련된 지혁의 이두근이 은우의 옆구리에 밀착되었다. 두 사람은 약속된 동선대로 단지 내의 우아한 조경 산책로를 가로질러 주차 구역으로 향했다.
바스락, 바스락.
발밑에서 밟히는 마른 잎사귀 소리 너머로, 저 멀리 단지 외곽 도로변에 대기 중인 검은색 카니발의 짙은 유리창 틈새로 미세한 반짝임이 스쳐 지나갔다. 망원 카메라의 렌즈가 반사된 빛이었다. 은우는 그 방향을 향해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오히려 지혁의 얼굴을 다정하게 올려다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지혁 씨, 오늘 날씨가 참 맑네요."
일부러 목소리를 한 톤 높여 나긋나긋하게 불렀다. 사적인 공간 밖에서 처음으로 내뱉은 '지혁 씨'라는 호칭에 지혁의 귀끝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지혁 역시 지성의 공격에 물러설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걸음을 늦추고 은우를 내려다보며, 평소의 냉정함을 깨끗이 지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네요. 주말에 같이 한적한 외곽으로 드라이브라도 다녀와야겠습니다."
지혁은 왼손을 뻗어 은우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손가락 끝이 은우의 살결에 부드럽게 스치는 순간,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묘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은우는 그의 눈동자에 담긴 다정함이 너무나 깊어서 순간 숨을 멈췄다. 이게 단지 비즈니스 연기일 뿐인지 헷갈릴 정도로 지혁의 눈빛은 진심 어린 온도로 가득 차 있었다.
찰칵, 찰칵, 찰칵.
주변의 정적 사이로 미세하게 셔터가 터지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스며드는 것 같았다. 파파라치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약점이라도 잡은 듯이 셔터를 연신 누르고 있을 터였다. 은우는 그들이 원하는 완벽한 프레임을 위해 지혁의 품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좋아요. 드라이브 가요. 맛있는 곳도 꼭 알아봐 둬요."
은우는 지혁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었고, 지혁은 그런 은우의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 안으며 발걸음을 맞추었다. 두 사람의 보폭은 자로 잰 듯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차량이 주차된 곳으로 거의 다다랐을 때,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단지 내 배달 전용 구역에서 급하게 빠져나오던 배달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한 배기음을 내며 코너를 돌았다. 보행자 통로와 차량 진입로가 교차하는 사각지대였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스마트폰 화면의 배달 정보를 확인하느라 전방을 주시하지 못했고, 빠른 속도로 은우가 서 있는 길목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했다.
"어……!"
위험을 인지한 은우가 다급히 몸을 피하려 했으나, 얇고 높은 구두 굽 끝이 보도블록 틈새에 단단히 끼어 버렸다. 중심이 무너지며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찰나, 오토바이의 거친 굉음이 귓가를 찢을 듯이 다가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서은우!"
지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지혁은 계약서의 규칙이나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반사적으로 은우의 허리를 강하게 낚아채 자신의 품 안으로 세차게 끌어당겼다.
끼이이익- 콰아앙!
오토바이는 아슬아슬하게 두 사람의 옷자락을 스치며 방향을 틀어 급제동했다.
하지만 은우에게는 오토바이의 소음도, 운전자의 다급한 사과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온 감각은 지혁의 단단한 품 안에 갇혀 있었다. 지혁은 은우를 자신의 넓은 가슴에 온전히 파묻은 채, 두 팔로 그녀의 등과 허리를 으스러질 듯이 세차게 감싸 안고 있었다.
지혁의 화이트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과 함께, 그의 가슴에서 가파르게 폭발하는 심장 박동 소리가 은우의 귓가로 고스란히 흘러들어왔다.
쿵, 쿵, 쿵, 쿵.
미친 듯이 질주하는 심박수였다. 지혁의 넓은 어깨와 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은우는 지혁의 어깨너머로 도로변 검은색 카니발의 유리창 틈새에서 플래시가 연속해서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파파라치가 이 극적인 포옹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 지혁이 은우를 움켜쥔 손길은, 카메라를 의식한 위장이 아니었다. 손가락 끝이 은우의 카멜색 코트 자락을 구기며 강하게 파고드는 힘은 본능적인 공포와 강렬한 보호욕 그 자체였다. 지혁에게선 은은한 우디 계열의 코롱 향과 아침에 마신 에스프레소의 쌉싸름한 향이 뒤섞여 났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지혁의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있었고, 은우의 정수리에 닿는 숨결은 뜨거웠다. 그는 은우의 양 어깨를 떨리는 손으로 감싸 쥐고 품에서 살짝 떼어내며 그녀의 얼굴과 몸을 빠르게 살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은우가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와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괜찮아요. 하나도 안 다쳤어요."
은우는 지혁의 가슴팍에 가만히 손을 얹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지혁은 그제야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굳어 있던 얼굴을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한 손은 은우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 들고 있었다.
"차에 타십시오."
지혁은 은우를 조수석에 안전하게 태우고, 서둘러 운전석으로 돌아와 시동을 걸었다. 차가 주차 구역을 신속하게 빠져나와 한남동 언덕길을 내려가는 동안, 차 안에는 무겁고 뜨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창밖의 한강 풍경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지만, 두 사람 다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은우는 여전히 손가락 끝에 남아 있는 지혁의 셔츠 감각과 귓가를 맴도는 강렬한 심장 소리에 가슴이 일렁였다. 단순히 돌발 사고에 놀란 반응이라 하기에는, 지혁의 심박수는 너무나 오랫동안 가파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은우는 두 뺨에 차오르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창문을 살짝 내렸다. 서늘한 강바람이 밀려들어와 차 내부의 밀도 높은 공기를 흩뜨려 놓았다.
"전무님."
은우는 일부러 차분하고 이성적인 마케터의 톤을 가장하며 먼저 침묵을 깼다.
"방금 사고는 위험했지만, 결과적으로 파파라치에게 최고의 컷을 준 셈이 되었어요."
지혁은 가죽 운전대를 쥔 채 묵묵히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하얗게 질린 손가락 마디 위로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강지성 부사장님이 보낸 파파라치라면 오늘 찍은 사진들로 우리 사이에 균열이 있다는 식의 기사를 준비했겠죠. 하지만 방금 전무님이 저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모습은 그 어떤 화보보다 더 극적이었어요. 진짜 사랑에 빠져 눈이 돌아간 남편의 모습 그 자체였으니까요."
은우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 사진들이 노출되면 여론은 계약 결혼설이나 불화설을 의심하는 대신, 신성그룹 후계자의 로맨틱한 헌신으로 돌아설 거예요. 강 부사장은 자기 돈을 들여 우리를 가장 완벽하게 브랜딩해 준 꼴이 된 거죠."
지혁은 은우의 냉철한 분석을 묵묵히 듣고 있더니, 차가 신호 대기에 걸려 멈춰 서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은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안경 너머 검은 눈동자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낮게 억눌린 감정이 목소리에 실려 나왔다.
"서 대표는 방금 그 찰나의 순간에도 마케팅적인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까?"
"……네?"
은우는 예상치 못한 지혁의 질문에 당황해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나는 서 대표가 다칠 뻔한 그 순간, 머릿속으로 아무런 계산도 하지 못했습니다."
지혁의 깊은 눈동자가 은우의 흔들리는 시선을 단단히 붙들었다.
"내 안에는 오직 당신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카메라가 찍고 있든, 강지성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든…… 그런 건 단 한 순간도 내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지혁의 직설적인 고백은 건조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묵직한 진심은 은우의 가슴 깊숙한 곳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그러니 비즈니스 핑계는 대지 마십시오. 방금 전의 포옹은…… 계약서 조항에 적힌 방어 의무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다시 파란불이 켜지자 지혁은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려 차를 출발시켰다.
은우는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손끝이 가볍게 떨려와 무릎 위에 놓인 가방 손잡이를 꽉 쥐었다. 지혁은 계약이라는 편리한 핑계 뒤로 숨지 않고, 자신의 온전한 진심을 똑바로 내보이고 있었다. 그 진심을 자각하는 순간, 은우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마음 주변에 둘러놓았던 방어벽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만 같았다.
차는 어느덧 W&U 랩의 새로운 사무실이 입주한 강남의 건물 앞에 도착했다.
지혁은 차를 세우고 은우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아까보다 부드럽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여전히 짙은 여운이 배어 있었다.
"들어가십시오.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오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지혁 씨."
은우는 '전무님' 대신 그의 이름을 다시 한번 조용히 불렀다. 지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조용히 번졌다.
차 문을 열고 내린 은우는 W&U 랩의 세련된 간판이 걸린 빌딩 안으로 걸어가며, 가방 속 휴대폰을 꺼내 달력을 보았다. 달력 한편에는 1년 뒤로 약속된 계약 종료일이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가짜의 흔적으로 시작된 이 동거의 끝에 진짜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면, 자신은 그 계약의 마지막 페이지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은우의 요동치는 심박수는 사무실의 계단을 모두 올라갈 때까지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