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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19화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19화: 각도와 온도

한남대교를 건너 단숨에 도달한 한남동의 언덕배기. 서울의 심장부이면서도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멀찍이 격리된 그곳에 신성그룹이 소유한 초고층 고급 펜트하우스 단지가 우뚝 솟아 있었다.

지혁의 차가 지하 주차장의 전용 구역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차의 미세한 구동음이 꺼지자, 차 안에는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남았다. 은우는 조수석에서 내려 뒤쪽 트렁크로 걸어가 캐리어를 쥐었다. 제일기안을 퇴사하고 W&U 랩을 설립하는 어수선한 일정 속에서도 기어이 짐을 꾸려 온 참이었다.

“서 대표, 짐은 내가 들겠습니다.”

차에서 내린 지혁이 자연스럽게 은우의 손에서 캐리어 손잡이를 넘겨받았다. 은우가 사양하려 손을 뻗었지만, 지혁의 단단한 손가락은 이미 캐리어 두 개를 가볍게 들어 올린 뒤였다. 전용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는 그의 넓은 어깨를 보며 은우는 묘한 긴장감을 삼켰다.

띡, 카드를 접촉하자 세대 전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일반 입주민들과 동선이 완전히 분리된, 오직 이 펜트하우스 세대만을 위한 리프트였다. 숫자가 조용히 상승하는 동안 거울로 된 엘리베이터 내벽에 비친 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잠깐 얽혔다가 흩어졌다.

문이 열리자마자 은우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압도적인 크기의 거실이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지는 전면 통창 너머로 한강의 검은 물결과 올림픽대로를 수놓은 차량들의붉고 하얀 헤드라이트가 보석처럼 흩어져 있었다. 거실 바닥은 최고급 카라라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있어, 얇은 구두 굽을 통해 서늘한 냉기가 발바닥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화이트 앤 그레이 톤의 공간에는 이탈리아제 가죽 소파와 미니멀한 단색 러그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러나 공간 전체에서 풍기는 인상은 지나칠 정도로 차가웠다.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사람이 살아가며 만들어내는 온기나 생활의 냄새는 단 한 줌도 느껴지지 않았다.

“넓네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요.”

은우가 조심스럽게 거실 한가운데로 걸어 나오며 감탄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사생활을 철저히 보장받기 위해 매입한 곳입니다. 가족들은 물론 형님도 이곳의 상세한 내부 구조까지는 모릅니다. 가사 도우미도 일주일에 두 번, 내가 지정한 시간에만 출입하도록 엄격하게 계약해 두었습니다.”

지혁은 캐리어를 거실 한쪽에 내려놓으며 정장 재킷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단정히 걸쳤다. 화이트 셔츠의 소매를 두어 번 걷어 올리는 그의 동작은 자로 잰 듯 깔끔했다.

“공식적으로 우리는 이 집을 같이 쓰는 부부입니다. 하지만 사적인 영역은 철저히 구분될 겁니다.”

지혁이 거실을 가로질러 복도를 가리켰다.

“복도를 중심으로 동쪽 끝이 내 침실과 드레스룸, 그리고 서재입니다. 서쪽 끝에 있는 침실과 드레스룸, 욕실이 서 대표의 공간입니다. 거실과 주방은 공용 영역으로 하되, 사전에 일정을 조율해 겹치지 않도록 조치할 수 있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무님.”

은우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계약서 제4조에 명시된 '사적 공간 철저 분리' 조항이 완벽하게 실현될 수 있는 구조였다. 물리적인 거리가 확보되자 가슴을 짓누르던 긴장감이 조금은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식사는 하고 왔습니까?”

“네, 소라와 사무실 근처에서 가볍게 먹고 왔어요. 전무님은요?”

“회사에서 해결했습니다.”

지혁은 담담하게 대꾸하며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은우에게 메신저 창을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최민규 과장이 작성해 보낸 빼곡한 텍스트 파일이 띄워져 있었다.

“그럼 바로 작업을 시작해야겠군요. 최 과장이 보낸 ‘흔적 만들기 리스트’입니다.”

은우는 지혁이 내민 휴대폰 액정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짜 부부 생활감 연출 가이드 - 최민규 과장]

  1. 현관: 부부 커플 슬리퍼 및 외출용 신발 교차 배치.
  2. 욕실(메인 및 안방 욕실): 칫솔 2개(커플용 디자인), 남녀 헤어 밴드, 은우 님의 화장품 일부 노출.
  3. 드레스룸: 안방 드레스룸에 은우 님의 실내복 및 자주 입는 코트 2~3벌을 전무님 의류 사이에 믹스 매치하여 거치.
  4. 거실: 은우 님의 개인 소품(머그컵, 책, 필기구 등) 자연스럽게 배치.

“형님이 언제 사람을 보낼지 모릅니다. 관리사무소 직원을 매수하거나, 도우미의 눈을 빌려 우리가 각방을 쓰는지 확인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에 최소한 안방 침실과 드레스룸만큼은 우리가 완벽히 공간을 공유하는 것처럼 꾸며야 합니다.”

지혁의 어조는 비즈니스 브리핑을 하듯 냉철했지만, 은우의 귀에는 '안방 침실 공유'라는 단어가 묘하게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알겠어요. 연습도 실전처럼 해야 하니까요.”

은우는 애써 평정심을 가장하며 캐리어를 열었다. 그녀의 짐가방 안에서 몇 가지 개인 소품들과 옷가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은우의 짐에서 은은한 라벤더 향이 피어올라 거실의 무미건조한 공기를 부드럽게 채웠다.

두 사람은 먼저 지혁의 침실 안쪽에 위치한 마스터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블랙 크롬 프레임으로 짜인 널찍한 옷장이 나타났다. 지혁의 옷들은 마치 자로 잰 듯 톤별로, 종류별로 완벽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네이비, 차콜, 블랙. 모노톤의 슈트와 빳빳하게 다려진 화이트 셔츠들이 빈틈없이 늘어선 모습은 지혁의 성격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여기에 걸면 될까요?”

은우가 자신이 가져온 파스텔 톤의 니트와 부드러운 코트 몇 벌을 들고 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쪽 구역을 비워 두었습니다. 편하게 거치하십시오.”

지혁이 정장 슈트 라인의 중간 지점을 가리켰다. 은우는 조심스럽게 옷걸이를 들어 그의 차가운 네이비 슈트와 그레이 셔츠 사이에 자신의 부드러운 카멜색 코트와 아이보리색 카디건을 걸었다.

스르륵, 옷감들이 서로 맞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 가깝게 들렸다. 지혁의 무채색 옷자락 틈으로 은우의 밝고 부드러운 옷가지들이 섞여 들어가자, 텅 비어 있던 드레스룸에 묘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내복도 몇 벌 섞어두는 것이 자연스럽겠네요.”

은우가 캐리어 깊숙한 곳에서 실크 소재의 얇은 슬립과 부드러운 면 잠옷을 꺼냈다. 가볍고 매끄러운 실크 슬립이 지혁의 거친 질감의 리넨 셔츠 바로 옆에 걸리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설명하기 힘든 긴장감이 스쳤다.

은우는 슬며시 뺨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옷걸이 고리에 고정했다. 지혁 역시 무의식적으로 목울대를 크게 움직이며 살짝 헛기침을 내뱉었다.

“욕실로 가죠.”

지혁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톤쯤 가라앉아 있었다.

마스터 침실 안쪽의 부부 욕실. 이탈리아산 대리석으로 꾸며진 욕실 세면대 위에 지혁은 자신이 쓰던 칫솔 옆에 은우의 분홍빛 칫솔을 나란히 꽂았다. 커플용으로 제작된 유리 컵에 두 개의 칫솔이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부부의 내밀한 일상을 연상시켰다.

은우는 세면대 거울 앞 선반에 자신이 평소 사용하는 스킨과 로션 병들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머리를 묶을 때 쓰는 자그마한 벨벳 머리핀 몇 개를 자연스럽게 흩뜨려 놓았다. 지혁은 그 머리핀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걸 이렇게 두는 게 더 자연스럽습니까?”

“그럼요. 너무 칼같이 정리되어 있으면 오히려 꾸며낸 티가 나요. 누군가 급하게 외출하며 던져놓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흩어져 있어야 진짜 사는 집 같죠.”

“그렇군요. 마케팅적으로도 ‘생활감’의 디테일이 설득력을 갖는 법이니까요.”

지혁은 은우의 논리에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세면대 선반 위에 흩어진 작은 분홍색 머리핀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삭막하기만 했던 자신의 욕실에 은우의 화장품 향기와 작은 소품들이 채워지는 변화가 생소하면서도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본적인 침실 셋업을 마친 두 사람은 공유 영역인 거실과 주방으로 나왔다.

거실 테이블과 주방을 정리하려던 은우는 문득 지혁의 엄청난 정리 정돈 상태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인 잡지 세 권은 정확히 모서리가 일치하게 겹쳐져 있었고, 서재 책장의 책들은 키순과 색상별로 분류되어 수직으로 꽂혀 있었다. 심지어 거실의 리클라이너 체어 각도조차 소파와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전무님, 혹시 강박증 같은 게 있으신가요?”

은우가 책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강박이라기보다는, 질서가 잡혀 있는 상태가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모든 행동과 물건의 위치를 보고해야 하는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이기도 합니다.”

지혁의 무덤덤한 대답에 은우는 잠시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신성그룹의 엄격한 가풍 속에서 어린 시절 납치 미수 사건까지 겪으며 자란 지혁이었다. 부모의 과보호와 형의 견제 속에서 자신만의 안전지대를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성향이 생겼을 터였다.

은우는 가방에서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꺼냈다. 동글동글하고 넓적한 초록색 잎사귀가 싱그러운 작은 몬스테라 화분이었다.

“거실 코너에 이걸 놓을게요. 너무 무채색만 가득해서 차가워 보였거든요.”

은우가 화분을 거실 모퉁이, 조명이 잘 드는 소파 옆에 놓으려 하자 지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위치는 소파와 벽면의 대칭 비율을 깨뜨립니다. 게다가 거실의 인테리어 톤앤매너와 맞지 않는 초록색이군요.”

“원래 공간의 매력은 완벽한 대칭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서 오는 법이에요. 이 화분이 공간에 숨통을 틔워주고 대화의 주제를 만들어 줄 겁니다. 비즈니스 미팅 때도 삭막한 방보다는 화분 하나가 있는 방이 협상 성공률을 12%나 높여준다는 통계도 있어요.”

은우가 마케터 특유의 당당한 논리를 들이대자, 지혁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12%라니, 구체적인 수치군요.”

“그러니까 한 번만 제 말을 믿어보세요.”

지혁은 투덜거리듯 한숨을 내쉬면서도, 은우가 화분을 들고 끙끙대자 서둘러 다가와 화분을 대신 받아 들었다. 그리고 은우가 지정한 소파 옆 코너에 정확히 내려놓았다. 초록빛 잎사귀가 대리석 바닥에 닿자, 정말로 거실 전체의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지혁은 화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나쁘지는 않군요.”

“그렇죠?”

은우가 환하게 웃었다.

주방으로 이동한 은우는 커피 머신 옆에 두 사람이 사용할 커플 머그잔을 꺼내놓았다. 지혁은 머그잔의 손잡이가 정확히 오른쪽 90도를 향하도록 손으로 각도를 맞추었다. 은우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컵을 톡 건드려 손잡이를 45도 비스듬한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이건 또 왜 돌리는 겁니까? 대칭이 맞지 않습니다.”

지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컵의 손잡이가 90도로 되어 있으면, 물을 마시려고 쥘 때 손목을 꺾어야 해요. 하지만 45도로 비스듬히 돌려두면 인체공학적으로 손가락이 가장 자연스럽게 손잡이를 쥘 수 있죠. 각도의 완벽함보다 중요한 건 사용자의 편리함이에요. 마케팅에서도 브랜드를 고객에게 제안할 때 가장 편안한 각도로 내밀어야 하는 것처럼요.”

지혁은 은우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자신의 손을 뻗어 45도로 돌아간 컵 손잡이를 쥐어 보았다. 과연 손가락이 컵 손잡이 안으로 부드럽고 편안하게 들어왔다. 손목에 아무런 무리도 가지 않는 각도였다.

지혁은 말없이 컵을 내려놓았다. 그의 귀끝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군요.”

그는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서재로 걸어 들어갔다. 은우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차갑고 완벽해 보이는 남자였지만, 자신이 제시하는 논리적인 실리와 편안함 앞에서는 은근히 부드럽게 꺾이는 면이 있었다.

은우가 정리를 마친 뒤 샤워를 하러 자신의 욕실로 들어간 사이, 지혁은 슬그머니 주방으로 다시 걸어 나왔다. 그는 싱크대 위에 놓인 다른 머그잔들의 손잡이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45도 각도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대칭을 중요시하던 그의 손길이 은우가 가르쳐 준 '온도의 각도'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늦은 밤, 샤워를 마치고 편안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은우는 침대에 누웠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W&U 랩의 첫 프로젝트와 들꽃 브랜드의 기획안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결국 은우는 태블릿 PC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유 서재에서 자료를 조금 더 검토할 생각이었다.

조용히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선 은우는 그만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원래는 지혁의 중후한 블랙 원목 책상만 덩그러니 놓여 있던 서재 안쪽 창가 자리에, 완전히 새로운 업무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우가 제일기안 팀장 시절부터 허리 통증을 방지하기 위해 갖고 싶어 했던 최상급 브랜드의 화이트 오크 모션 데스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눈의 피로를 최소화해 준다는 은은한 노란빛의 최고급 디자이너 스탠드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대학 시절부터 은우가 아이디어를 스케치할 때 고집하던 특정 브랜드의 연필과 노트 세트가 단정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은우는 멍하니 그 자리에 걸어가 손끝으로 책상의 매끄러운 나무 표면을 쓸어내렸다.

단순히 비즈니스 파트너의 의무나 가짜 동거 흔적을 만들기 위한 셋업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세심하고 사적인 배려가 듬뿍 담겨 있었다. 은우가 스쳐 지나가듯 말했던 취향들을 누군가 기억하고 준비해 두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풍경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 솟구쳐 올랐다.

그때 서재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지혁이 안경을 쓴 채 들어섰다. 셔츠 단추를 편안하게 풀고 얼음물이 담긴 유리잔을 든 모습이었다. 그는 서재 책상 앞에 서 있는 은우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잠이 오지 않습니까?”

지혁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전무님…… 이 책상이랑 소품들은 다 뭐예요?”

은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혁은 머쓱한 듯 유리잔을 가볍게 흔들며 시선을 비스듬히 내렸다. 얼음이 잔 벽에 부딪쳐 짤랑이는 소리가 났다.

“최 과장을 통해 서 대표가 업무를 볼 때 선호하는 집기들을 파악해 두라고 지시했습니다. W&U 랩의 대표로서 앞으로 이곳에서 야간 업무를 할 일이 많을 텐데, 몸에 맞지 않는 책상에서 일하다 건강을 해치면 신성리테일의 프로젝트에도 차질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는 또다시 비즈니스 핑계를 댔지만, 안경 너머의 검은 눈동자에는 은우가 이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할지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필기구 브랜드는 제가 대학생 때 공모전을 준비할 때부터 쓰던 거예요. 구하기 꽤 까다로운 단종 모델인데…… 이것도 최 과장님이 찾으신 건가요?”

은우가 지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다가섰다. 지혁은 더는 핑계를 대지 못하겠다는 듯 헛기침을 내쉬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 필기구는 예전에 서 대표가 떨어뜨렸던 수첩 사이에 꽂혀 있던 것을 보았습니다. 마침 내 서재 창고에 여분이 있어서 놓아둔 것뿐입니다.”

거짓말이었다. 단종된 필기구를 구하기 위해 수소문한 흔적이 포장 케이스 뒤에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은우는 그의 서툰 핑계 이면에 숨겨진 지극한 다정함을 읽어냈다.

도움을 받으면 빚을 지는 것이라 믿었고,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하지 않으면 언제든 가치 없이 버려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은우가 무언가를 증명하기도 전에, 오직 그녀의 편안함과 성취만을 위해 이토록 세심한 배려를 묵묵히 쏟아붓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지혁 씨.”

은우가 ‘전무님’이 아닌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지혁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은우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불과 두 걸음. 서재의 은은한 조명 아래서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서 대표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건 처음이군요.”

“이곳은 회사나 본가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비즈니스 파트너이기 전에, 제 마음을 이토록 깊게 헤아려 주는 동업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어요.”

은우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단단했다. 지혁은 안경을 천천히 벗어 책상 위에 놓았다. 그의 가라앉은 눈빛이 은우의 얼굴 전체를 훑어내렸다.

“동업자라니, 여전히 선이 명확하군요.”

“계약 조건이니까요.”

“하지만 때로는 그 계약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지혁의 나직한 음성이 은우의 심장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서자, 지혁의 짙은 그림자가 은우를 온전히 덮어왔다. 밤의 고요함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며 터질 듯한 텐션이 흘렀다.

“서 대표가 내 방에 네 코트와 실내복을 걸어두었을 때, 그리고 칫솔을 나란히 꽂았을 때…… 나는 그것이 가짜 흔적이 아니라 진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혁의 고백은 덤덤했기에 오히려 가슴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은우는 마른침을 삼겼다. 그의 눈빛 속에 담긴 열기가 너무나 뜨거워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 온기에 온전히 기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지혁 씨.”

“늦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쉬는 게 좋겠군요. 내일부터 진짜 전쟁이 시작될 테니까요.”

지혁은 더 깊은 감정을 억누르듯 부드럽게 한 보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은우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서재를 나섰다.

서재에 홀로 남은 은우는 자신의 가슴팍을 꾹 눌렀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가짜 동거의 흔적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첫날 밤,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진짜 감정의 흔적이 깊게 새겨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펜트하우스의 넓은 거실창 너머로 눈부신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은우는 잠결에 찌푸린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걸어 나왔다. 편안한 면 소재의 슬리브리스와 실내복 바지 차림에 머리는 대충 집게핀으로 틀어 올린 내추럴한 모습이었다.

주방 커피 머신 앞에는 이미 지혁이 서 있었다. 그는 정장 바지에 화이트 셔츠 차림이었지만, 아직 재킷을 입지 않고 셔츠 깃의 단추를 두 개쯤 풀어놓아 평소의 빈틈없는 모습과는 다른 흐트러진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주방에는 에티오피아 원두 특유의 싱그럽고 쌉싸름한 산미가 향기롭게 감돌았다.

“잘 잤습니까?”

지혁이 커피 머신에서 갓 추출된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고개를 돌렸다.

대충 묶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은우의 하얀 목덜미와 실내복 차림을 마주한 지혁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혁은 서둘러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담긴 컵을 은우에게 내밀었다.

그 컵의 손잡이는 정확히 45도 각도로 은우를 향해 돌려져 있었다.

은우는 그 45도 각도의 컵을 받아 쥐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아주 잘 잤어요.”

“서재의 책상은 쓸만했습니까?”

“네. 덕분에 기획안 검토가 아주 수월했어요. 컵 각도도 그렇고, 지혁 씨는 참 습득력이 빠르시네요.”

은우의 장난 섞인 칭찬에 지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짐짓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그의 귓가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은우는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주방 아일랜드 식탁에 나란히 앉아 아침 커피를 나누어 마시는 모습은, 영락없이 평화로운 신혼부부의 일상 그 자체였다. 이 거대하고 차가웠던 공간에 두 사람만의 온도가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진동- 진동-.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지혁의 휴대폰이 묵직하게 울렸다. 지혁이 화면을 확인하자 미간이 단번에 좁혀졌다. 최민규 과장으로부터 온 긴급 보안 문자였다.

[전무님, 펜트하우스 단지 출입구 건너편 도로변에 검은색 카니발 차량 한 대가 어제 늦은 밤부터 계속 대기 중인 것을 보안실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차량 번호 조회 결과, 지성 부사장님이 사적으로 이용하시는 사설 정보 업체(파파라치) 소유의 차량입니다. 오늘 아침 두 분이 출근하시는 모습을 노리고 카메라를 장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혁은 휴대폰을 은우에게 건넸다. 은우는 문자를 읽어 내려가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행동이 아주 빠르네요. 친족회와 감사 건으로 타격을 입자마자 우리 결혼의 실체를 파헤치려고 파파라치부터 붙인 모양이에요.”

지혁이 단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하 주차장 동선을 우회해 회사 차량을 안쪽까지 진입시킬까요? 파파라치를 따돌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아니요.”

은우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차갑고 예리하게 빛났다.

“마케터는 위기를 피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들이 파 놓은 함정을 가장 화려한 홍보 무대로 바꾸어 놓죠. 그들이 카메라를 들고 대기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카메라 렌즈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다정한 부부의 쇼를 보여주면 돼요.”

은우는 지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준비되셨나요, 전무님? 진짜 부부 연기 실전 말이에요.”

지혁은 은우의 당당하고 반짝이는 눈빛을 마주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서 대표.”

창밖 먼 도로변, 검은색 카니발의 짙게 썬팅된 창문 너머로 망원 렌즈의 끝이 미세하게 번뜩였다. 하지만 그들이 겨눈 렌즈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짜 부부라는 진실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조율된 두 사람의 완벽한 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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