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18화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18화: 내가 선택한 사람

차창 밖으로 성북동의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이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지혁의 차량 조수석에 앉아 있던 은우는 제 손등 위에 포개어진 커다란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굳은살이 옅게 박힌 단단한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뜻밖에도 너무나 따뜻해서, 친족회의 긴장감으로 차갑게 식어 있던 손끝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스스로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던 심장박동이 조금씩 빨라졌다. 은우는 숨을 멈추고 손가락을 미세하게 움찔했다.

“……전무님.”

지혁의 시선이 조수석으로 내려앉았다. 그는 자신이 은우의 손을 생각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듯, 아주 조심스럽게 손가락의 힘을 풀었다. 하지만 손바닥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은 채, 마치 은우의 손끝이 다시 떨리지 않도록 단단히 지탱해 주듯 온기만을 남겨두었다.

“차가운 밤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손이 많이 차갑군요.”

지혁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 엔진의 부드러운 구동음이 차 안의 미묘한 침묵을 기분 좋게 덮어 나갔다.

그때 지혁의 정장 안주머니에서 묵직한 진동음이 울렸다. 지혁은 핸즈프리를 연결해 전화를 받았다. 최민규 과장의 다급하면서도 고무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무님! 방금 감사팀에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회장님 직속 비서실 감사과 인력들이 신성건설 재무팀 서버실에 들이닥쳐 최근 3개년 결제 데이터와 어음 발행 대장 원본을 전부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수고했습니다, 최 과장. 감사팀의 보안은 철저히 유지하도록 조치해 줘요.”

[걱정 마십시오! 비서실장님이 직접 지휘하는 건이라 부사장님 라인에서도 전혀 개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통화가 끊어지고, 은우는 떨림을 진정시킨 목소리로 물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훨씬 빠르시네요. 회장님도, 전무님도요.”

지혁은 묵묵히 스티어링 휠을 돌려 성북동의 경사진 비탈길을 내려갔다.

“아버지는 한 번 결정을 내리시면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 분입니다. 신성의 이름을 더럽히는 불공정 행위가 가문의 시끄러운 싸움으로 비화되는 것보다, 사전에 리스크를 도려내는 것이 기업 경영 방어에 유리하다는 계산을 끝내신 거지요. 서 대표가 그 판을 아주 명확하게 깔아주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저 눈앞에 있는 팩트를 짚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것을 진짜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휘두르신 건 전무님입니다.”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지혁은 잠시 신호 대기에 걸려 차를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은우를 깊게 응시했다. 밤하늘의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은 유난히 깊고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비즈니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네?”

“그 차가운 홀 안에서, 누구도 당신을 함부로 깎아내리거나 모욕하게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 아내로 그 자리에 서 있는 이상, 그리고…… 서은우라는 사람 자체가 그렇게 짓밟히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요.”

지혁의 나직한 고백에 은우의 가슴속이 요동쳤다.

계약서 조항을 핑계로 자신을 향해 흔들림 없는 안전망이 되어주겠다는 남자의 존재가, 언제부턴가 차가운 비즈니스 관계의 경계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었다.


같은 시각, 태평로에 위치한 신성건설 부사장실의 공기는 무겁다 못해 얼어붙어 있었다.

쾅!

두꺼운 크리스탈 재질의 양주잔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강지성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치며 집무실 한가운데 서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의 맞은편에 서 있는 비서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감사팀이…… 재무본부 장부를 압수해 가? 그것도 회장님 직속 비서실장 지휘 아래?”

“예, 예. 부사장님. 방금 전 재무팀 사무실에 비서실 감사과 인력들이 들이닥쳐 하도급 대금 지연 내역과 이면 계약서까지 전부 복사해 갔습니다. 회장님의 전격 특별 명령이라 저희로서도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지성은 이마를 짚으며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딩동.

비서의 손에 들린 태블릿 PC에 연락이 빗발쳤다. 친족회에서 은우의 폭로로 망신을 당한 숙자 여사로부터 온 격앙된 문자들과 친척들의 연락이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지성은 휴대폰을 집어 들고 지혁의 번호를 거칠게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기 너머로 지혁의 건조하고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말씀하십시오, 형님.]

“강지혁! 네놈이 지금 제정신이냐? 집안의 일을 회사로 끌고 들어온 것도 모자라, 감사팀을 지휘해 내 목을 치겠다는 거야? 신성건설이 흔들리면 그룹 전체 신뢰도가 어떻게 될지 머리가 안 돌아가?”

[형님.]

지혁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지성의 분노를 비웃듯 서늘했다.

[신성건설이 흔들리는 것은 감사팀 때문이 아닙니다. 하청업체인 성원건업에 180억 원의 결제를 무기한 지연시키고 어음 부도를 방치한 형님의 독단적인 재무 관리 때문이지요. 이를 방치했다가 다음 달 동반성장 평가에서 최하 등급을 받고 공공 입찰 자격이 박탈되었다면, 그 손실은 감사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깟 빚쟁이 집안 계집애의 궤변에 놀아나 친형의 뒤통수를 쳐? 네가 그 영악한 년한테 속아서 신성을 팔아먹고 있는 줄도 모르고!”

[강지성 부사장님.]

전화기 너머 지혁의 음성이 순간 완전히 가라앉았다. 수화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침묵에 지성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제 아내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한 번만 더 예의를 갖추지 않은 언사로 서은우 씨를 모욕한다면, 성원건업 외에 다른 협력업체들에 대한 강압적 이면 계약서 사본을 공정위에 직접 제출하겠습니다. 이것은 경고가 아닙니다. 내 아내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권리 행사입니다.]

뚝.

전화가 가차 없이 끊겼다. 지성은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늘 자신의 그늘 아래서 조용히 서류만 보던 얌전한 동생이 아니었다. 지혁의 등 뒤에는 사람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읽어내고 판을 뒤흔드는 서은우라는 강력한 마케터가 결합해 있었다.

지성은 이를 부득 갈며 깨진 유리 조각들을 짓밟았다. 절대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틀 뒤, 성북동 신성그룹 본가의 동쪽 별채에 위치한 클래식한 분위기의 티룸.

우아한 샹들리에 조명 아래, 영국식 애프터눈 티 세트와 최고급 도자기 잔들이 화려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이 방의 주인인 이명희 여사는 소파 상석에 앉아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강숙자 여사를 비롯해, 신성가의 여론을 쥐고 흔드는 백모와 숙모 등 종친 가문의 핵심 인물들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은우도 차분한 미소를 지은 채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찻잔이 소서에 부딪히며 내는 챙강 하는 맑은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방 안의 긴장감은 팽팽했다.

“명희 동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빚더미에 오른 집안의 딸을 우리 신성가의 며느리로 공식 인정하겠다는 건가? 친족회에서 소란을 피운 것도 모자라, 우리 계열사인 신성건설에 감사 칼날을 들이대게 만들다니. 가문의 품위가 말이 아니네.”

강숙자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앙칼진 목소리로 은우를 겨냥했다. 다른 친척들도 숙자의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맞아요, 형님. 신성건설 임직원들이 지금 난리가 났다면서요. 며느리 하나 잘못 들여서 집안 싸움이 회사로 번진 꼴이잖아요.”

은우는 그들의 비난 섞인 시선 속에서도 척추를 곧게 펴고 앉아 평정심을 유지했다. 비난의 언어들에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은우는 조용히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우아한 태도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큰어머니, 그리고 숙모님. 품위를 걱정하시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마케터인 제 관점에서는, 신성건설의 하청 대금 미지급 사실이 외부 공정위 고발이나 언론 폭로를 통해 먼저 터졌다면 어땠을지 아찔할 따름입니다.”

은우의 조용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티룸 안에 가득 찼다.

“다음 달로 예정된 국토부 동반성장지수 평가에서 최하 등급을 받고, 향후 수십 조 원 규모의 공공 토목 입찰 참여 자격이 박탈되었다면 신성이 입었을 손실은 수천억 원에 달했을 겁니다. 제가 친족회에서 부채 서류를 들어 이 리스크를 미리 밝혀낸 덕분에, 감사팀이 선제적으로 문제를 바로잡아 가문의 더 큰 불명예를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 너 지금 그게 무슨……!”

강숙자가 안색을 붉히며 버럭 하려 했으나, 이명희 여사가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는 바람에 가로막혔다. 그 작은 행동 하나에 티룸 안이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명희의 차가운 눈빛이 강숙자를 쏘아보았다.

“동서.”

명희의 우아하고 단호한 음성이 티룸에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품위라는 것은 남의 집 아픈 과거를 파헤쳐 모욕 주는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품위는 가문의 위기를 직시하고, 그것을 해결할 줄 아는 능력에서 나오는 법이지요.”

“명희 동서, 그게 무슨…….”

“은우의 말이 백번 옳소. 은우가 친족회에서 제기한 신성건설의 하청 쥐어짜기 문제가 만약 감사팀이 아닌 외부 언론을 통해 먼저 터졌다면 어땠을 것 같소? 신성건설의 주가는 반토막이 났을 것이고, 그룹 전체가 윤리경영 위반으로 대중의 불매 운동 표적이 되었겠지요. 은우는 지혁의 아내로서, 그리고 신성의 일원으로서 그 엄청난 리스크를 사전에 발견하고 회장님께 경고해 신성을 구한 겁니다.”

친척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들이 빚쟁이의 딸이라며 무시했던 서은우가 실은 수천억 원 규모의 경영 위기를 막아낸 구원자라는 사실을 명희가 명확한 수치와 실리를 들어 증명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명희는 은우의 손을 가볍게 쥐어 잡으며 모두를 둘러보았다.

“서은우는 학벌이나 배경 따위의 얄팍한 잣대로 평가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를 읽는 눈이 있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비범한 능력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이명희가 직접 안목을 시험하고, 신성의 며느리로 직접 선택한 내 사람입니다.”

내가 선택한 사람.

그 한마디가 티룸 내부의 모든 의구심과 험담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명희의 선언은 명확했다. 은우를 모욕하는 것은 곧 그녀를 선택한 이명희 여사의 안목을 모욕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를 방조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였다.

강숙자는 명희의 서슬 퍼런 눈빛에 짓눌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고, 다른 친척들도 눈치를 보며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명희는 은우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은우야. 차가 좀 식었구나. 남쪽 보성에서 새로 올라온 햇차란다. 목을 따뜻하게 축이려무나. 앞으로 가문 안의 자질구레한 소음들은 신경 쓸 것 없다. 네 뒤에는 이 어미가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어머니.”

은우는 목구멍이 찌르르하게 조여오는 듯한 뭉클함을 느꼈다.

학벌이 없어서, 배경이 없어서, 평생 자신의 쓸모와 유능함을 매 순간 증명해 보여야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인생이었다.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은우의 마음 깊은 곳에 단단한 성벽을 쌓고 있었다.

그러나 이 차가운 재벌가에서, 남편의 부모가 자신을 '선택한 사람'이라 칭하며 온몸으로 방패가 되어주고 있었다. 비록 시작은 가짜 계약이었지만, 그들이 내미는 온정은 서은우라는 사람의 인생을 통틀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든든한 구원과도 같았다.


본가 만찬과 차담을 모두 끝마치고 저택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밤바람이 머리칼을 흩날렸다.

정원에 대기해 둔 차량 보닛 앞에 기대어 서 있던 지혁이, 저 멀리서 걸어오는 은우를 발견하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안경 너머 검은 눈동자에는 걱정 섞인 안도감이 가득 묻어 있었다.

“어머니의 부름에 친척들이 또 험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습니까?”

은우는 지혁의 물음에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어머니께서 아주 완벽한 방패가 되어주셨어요. 제가 신성건설의 하청 리스크를 막아낸 공신이라며, 친척들 앞에서 기를 확실하게 죽여주셨거든요.”

지혁은 은우의 대답을 듣고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가 누군가를 지키기로 마음먹으시면 무서운 분이긴 합니다.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하셨을 겁니다. 서 대표의 가치는 신성의 그 어떤 가문 어른들보다 빛나니까요.”

“전무님도 참…….”

은우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지만, 가슴속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설렘의 불꽃이 튀고 있었다. 지혁은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은우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 공식적인 스캔들은 정리되었으니, 계약의 다음 단계로 진행해야 합니다.”

“다음 단계라면…….”

“신혼집 입주 말입니다. 당장 다음 주부터 한남동 펜트하우스에서 같이 지내야 합니다. 가짜 부부의 흔적을 파파라치와 형님의 감시망에 보여주려면, 사소한 생활 습관부터 서랍 속 물건들까지 완벽하게 맞춰두어야 하니까요.”

지혁의 단정한 목소리가 은우의 귓가에 닿았다.

한 공간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하며, 완벽한 부부의 일상을 연기해야 하는 다음 단계. 머릿속으로 공과 사를 명확히 나누려 다짐했지만, 지혁과 한 집에서 매일 마주할 생활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연습은 실전처럼 해야죠.”

은우는 요동치는 심장을 감추며 단단히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마주한 차량 문 틈 사이로, 앞으로 닥쳐올 기묘한 신혼 생활의 긴장감과 설렘이 밤안개처럼 짙게 내려앉았다.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