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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17화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17화: 눈물 대신 내미는 서류

은우의 서늘한 질문이 넓은 다이닝 홀의 천장으로 흩어졌다.

그녀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흩뿌려진 서류 하단, ‘성원건업’이라는 네 글자에 정확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 이름 옆에는 신성건설의 협력사 공인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성원건업…….”

테이블 맞은편에 서 있던 강숙자 여사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은우의 입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은우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서류 한 장을 들어 올려 숙자와 친척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천천히 돌려 세웠다.

“여기 적힌 성원건업은 신성건설의 토목 및 골조 부문을 전담하는 1차 협력업체입니다. 그리고 제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곳은 성원건업에 건설 현장 안전 매뉴얼과 카탈로그, 홍보 책자 등을 납품하던 인쇄소였지요.”

은우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홀 내부의 소음들을 완벽하게 잠재울 정도로 단단했다.

“3년 전, 신성건설은 헤리티지 빌 분양 부진을 이유로 성원건업에 지급해야 할 공사 대금 180억 원의 결제를 무기한 지연시켰습니다. 그러면서 현금 대신 6개월짜리 어음을 발행해 주었지요. 대기업의 대금 지급이 막히자 성원건업은 연쇄 자금난에 빠졌고, 결국 저희 아버지를 포함한 하청 업체들에게 발행했던 어음들을 전부 부도 처리했습니다.”

친척들 사이에서 다시금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 웅성거림의 성격은 이전의 조롱 섞인 비난과는 전혀 달랐다.

은우는 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 아버지는 성원건업의 부도 어음 때문에 하루아침에 수억 원의 빚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납품을 완료하고도 대금을 받지 못해 생긴 억울한 채무였습니다. 그리고 신성건설은 성원건업이 파산 절차를 밟자, 채무 정리 과정에서 발생한 부실 채권들을 자회사인 채권관리 대행사를 통해 헐값에 사들여 압류 신청을 진행했지요.”

은우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양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즉, 이 서류는 제 부모님이 누군가를 속이거나 사기를 쳐서 생긴 빚의 증서가 아닙니다. 신성건설의 불공정 거래와 하청 쥐어짜기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중소기업 피해자들의 피눈물이 담긴 기록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신성그룹이 협력사에 저지른 법적 리스크의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지요.”

“뭐, 뭐라고……?”

숙자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동정이나 자비를 구하며 눈물을 흘릴 줄 알았던 서은우가, 오히려 이 부채를 신성그룹의 구조적 폭력으로 규정하며 역공을 가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서은우 씨! 지금 그게 무슨 궤변입니까!”

참다못한 강지성 부사장이 테이블을 짚고 일어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이마에 핏대가 굵게 솟아올랐다.

“협력업체들끼리의 거래에서 부도가 난 것을 왜 신성건설 탓으로 돌립니까? 비즈니스 세계에서 하청 관리 실패는 해당 기업의 책임일 뿐입니다. 신성건설은 정상적인 법적 절차에 따라 부실 채권을 회수하려 한 것뿐이에요. 어디서 감히 빚쟁이 집안의 과오를 신성의 탓으로 덮어씌우려 합니까!”

지성의 서슬 퍼런 외침에도 은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지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차가운 음성으로 지성의 말을 잘라냈다.

“형님. 정상적인 법적 절차라고 하셨습니까?”

지혁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안주머니에서 태블릿 PC를 꺼내 들었다. 화면을 가볍게 스와이프하자, 신성건설의 재무 자료와 협력사 결제 현황 지표들이 홀 내부의 대형 스크린으로 전송되었다.

“신성건설은 최근 3년간 1차 협력사들에 대한 대금 지급 기한을 평균 45일 이상 고의로 지연시켰습니다. 하도급법 제13조에 명시된 60일 이내 지급 의무를 위반하지 않기 위해 어음 발행을 남발했고, 그 이자 비용마저 협력사에 전가했습니다. 그 결과 성원건업을 포함한 12개 협력사가 연쇄 부도를 맞았거나 회생 절차를 밟고 있지요.”

지혁의 단호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다이닝 홀을 울렸다.

“이것은 단순한 하청업체의 경영 실패가 아닙니다. 신성건설이 우월한 지위를 남용하여 발생시킨 구조적 리스크입니다. 그리고 신성건설의 재무와 하청 관리를 총괄하는 분은 바로 부사장인 지성 형님, 당신입니다.”

“강지혁 전무!”

“형님께서 이 서류를 큰어머니의 손을 빌려 이 자리에 꺼내놓으신 것은 아주 큰 패착입니다.”

지혁이 지성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 눈빛은 지성으로 하여금 척추가 서늘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신성건설은 다음 달 국토교통부가 주관하는 동반성장지수 평가를 앞두고 있습니다. 만약 이 서류에 적힌 불공정 거래와 연쇄 부도 피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거나 공정거래위원회에 제보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신성그룹의 대외적 이미지는 물론이고, 향후 수십 조 원 규모의 국책 공공 입찰 참여 자격 자체가 제한됩니다.”

지성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르게 가셨다. 그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지혁과 은우를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입 안에서 맴도는 반박의 언어들을 뱉어내지 못했다.

은우가 지혁의 말을 이어받아 쐐기를 박았다.

“마케터로서 덧붙이자면, 최근 글로벌 시장의 화두는 ESG 경영입니다. 대기업이 하청 업체를 쥐어짜 부도로 몰아넣고 그 채권까지 헐값에 사들여 유가족과 피해자를 압박했다는 사실이 대중에 알려지는 순간, 신성그룹의 브랜드 가치는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불매 운동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요.”

은우는 단호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태도로 태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저는 이 채무를 회피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이 채무의 발생 원인이 신성건설의 리스크 관리 부실에 있는 만큼, 저희 아버지가 입은 피해 역시 공정하게 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사로운 집안의 빚쟁이 소동이 아니라, 신성그룹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중대한 경영 리스크입니다.”

다이닝 홀 안은 그야말로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은우의 반격은 완벽했다. 그녀는 자신을 동정의 대상으로 팔지도 않았고, 빚을 탕감해 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오직 철저한 시장 논리와 대기업의 리스크 요인을 들어 숙자와 지성의 목덜미를 움켜쥐었을 뿐이었다.


강태준 회장은 턱을 괴고 앉아 홀 한가운데 서 있는 은우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매서운 눈빛 밑에 서린 것은 노여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를 시험하려던 덫을 역으로 밟아 으스러뜨린 며느리에 대한 깊은 흥미와 흡족함이었다.

태준은 천천히 손을 뻗어 비서가 가져온 채무 서류 사본을 집어 들었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고요한 홀 안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지성아.”

태준의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지성은 어깨를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예, 예. 회장님.”

“신성건설의 대금 결제 지연과 어음 발행 관행이 이 서류에 적힌 대로 사실이냐?”

“그, 그것은…… 건설업계의 관행적인 자금 흐름일 뿐입니다. 결코 고의로 협력사를 쥐어짜려 한 것이 아니라…….”

“닥쳐라.”

태준이 서류를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그 짧은 음마디에 실린 위압감에 지성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신성의 이름을 달고 일하는 자들이 밖에서 협력사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그 채권을 사들여 며느리 쫓아낼 궁리나 하고 있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태준의 시선이 강숙자 여사에게 닿았다. 숙자는 태준의 눈빛을 피하며 실크 한복의 옷소매를 초조하게 매만졌다.

“동서가 가문의 품위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진짜 가문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똑똑히 보시오. 며느리의 사사로운 친가 빚보다, 우리 계열사가 저지른 불법적인 쥐어짜기가 신성에 더 큰 위협이오.”

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비서실장을 바라보았다.

“비서실은 즉시 감사팀을 소집해라. 신성건설의 최근 3년간 협력사 대금 지급 내역과 불공정 거래 의혹에 대해 특별 감사를 실시한다. 만일 하도급법 위반 사항이 발견된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물을 것이다.”

“회장님!”

지성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태준을 불렀지만, 태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이닝 홀을 빠져나갔다.

이명희 여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숙자 여사를 차갑게 내려다본 뒤, 은우의 손을 다정하게 꼭 쥐어주었다.

“은우야. 정말 고생 많았다. 네가 신성을 살렸어. 지혁아, 어서 은우 데리고 들어가서 쉬어라.”

명희의 배웅을 받으며 은우와 지혁은 얼어붙은 친척들을 뒤로하고 홀을 걸어 나왔. 뒤돌아본 지성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고, 숙자는 의자에 주저앉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본가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길, 밤공기가 차갑게 뺨을 스쳤다.

차에 올라타 문을 닫자, 숨 막히던 성북동 저택의 기운이 차단되며 비로소 고요가 찾아왔다.

운전석에 앉은 지혁은 시동을 걸지 않은 채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의 시선은 조수석에 앉아 있는 은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서 대표.”

지혁의 목소리에 은우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온몸의 긴장이 탁 풀리며 은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대담한 마케터라 해도, 가문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부모의 억울한 채무가 난도질당하던 순간의 공포와 모욕감을 완전히 지워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지혁은 말없이 손을 뻗어 은우의 가볍게 떨리는 두 손을 감싸 쥐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온기가 은우의 차가운 손가락 마디마디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지혁의 안경 너머 검은 눈동자에는 깊은 경외감과 함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애틋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신을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상대의 아킬레스건을 찔러 판을 뒤집다니. 내가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완벽한 반격이었습니다.”

“전무님께서…… 판을 깔아주셨잖아요.”

은우는 애써 떨림을 참으며 지혁을 바라보았다.

“신성건설의 구체적인 재무 지표와 법적 조항을 즉석에서 제시해 주지 않으셨다면, 제 목소리는 그저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을 겁니다. 제 계약서 조항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나서 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약 조항 때문만은 아닙니다.”

지혁이 은우의 손을 쥔 힘을 조금 더 굳혔다. 그의 목소리가 낮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누구도 당신을 함부로 깎아내리거나 모욕하게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 아내로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상, 그리고…… 서은우라는 사람 자체를 그렇게 짓밟히게 둘 수는 없었습니다.”

지혁의 고백에 은우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쳤다.

차 안의 좁은 공간 속에서 두 사람의 숨결이 얽히고설켰다.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심장박동이 누구의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빨라지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연대를 넘어선 감정이었다. 계약서의 규칙들이 서서히 무력해지며,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은우는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은 채, 조용히 지혁의 따뜻한 손바닥을 마주 쥐었다. 밤하늘의 은은한 가로등 불빛이 차창을 타고 들어와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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