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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16화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16화: 친족회의 폭풍

성북동 신성그룹 본가로 향하는 차창 밖으로 붉은 노을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타들어 가는 하늘빛은 마치 다가올 폭풍을 예고하듯 묵직하고 붉은빛을 도로 위에 뿌려댔다.

지혁의 펜트하우스 드레스룸에서 우아한 네이비 빛깔의 트위드 원피스를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만 해도 은우는 평소처럼 담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남구청에서 혼인신고를 마치고 서류상으로 완벽한 부부가 된 이후 처음으로 참석하는 ‘분기별 친족회’라는 단어는 묘한 중압감을 선사했다. 한남동 저택이 시부모님만의 사적인 거처라면, 성북동 본가는 신성가라는 거대한 혈연 공동체가 모여 서열을 확인하고 권력을 나누는 공적인 전장이기 때문이었다.

옆자리에서 스티어링 휠을 잡은 지혁의 손끝이 평소보다 미세하게 경직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옆머리 아래로 굳게 다문 입술선이 그의 내면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었다.

“서 대표.”

지혁이 신호 대기에 걸려 차를 멈추자,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오늘 친족회는 단순히 친척들이 모여 안부를 묻고 식사나 나누는 자리가 아닙니다. 신성가 내부의 지분 싸움과 계열사 후계 구도에 관한 날 선 이권들이 오가는 비공식 이사회나 다름없지요. 특히 큰어머니 강숙자 여사는 지성 형님을 차기 회장으로 세우기 위해 오래전부터 집안 임원진과 사교계를 움직여 온 인물입니다.”

지혁의 안경 너머 검은 눈동자가 은우를 향했다. 그 짙은 눈빛 속에는 파트너의 평판을 우려하는 비즈니스적 계산을 넘어선, 한 여자를 향한 날 것 그대로의 염려와 지독한 보호 본능이 깃들어 있었다.

“지성 형님이 에어핏 가습기 사태로 감사실 조사를 받으며 입지가 좁아지자, 큰어머니가 형님의 든든한 방패를 자처하며 나설 겁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지혁 씨와 나를 흔들기 위해 선택할 가장 약한 고리는…… 바로 서 대표, 당신의 배경입니다.”

은우는 지혁의 경고에 흔들림 없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무릎 위에 단정하게 모은 손가락 끝을 톡톡 두드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제 배경을 공격하겠다는 뜻이겠군요. 학벌이든, 집안의 재정 상태든.”

“그들이 가진 가장 강력하고 저열한 무기지요. 나약하게 기죽을 필요는 없지만, 그 위선적인 화법에 당신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즉시 나설 테니 서 대표는 내 뒤에 서 있어요. 내 선에서 정리할 테니까.”

“전무님.”

은우는 고개를 돌려 지혁을 똑바로 응시했다. 은우의 눈망울은 흔들림 없이 깊고 맑았다.

“저는 평생을 광고대행사에서 온갖 클라이언트와 싸우며 살아남은 마케터입니다. 마케터는 상대방의 숨은 욕망을 읽고, 그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사람이에요. 상류사회의 낡고 위선적인 격식쯤은 충분히 읽어내고 대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약서 제9조를 기억하시죠? 외부의 공격에 맞서 서로의 명예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공동 의무입니다. 저 역시 제 싸움을 남의 뒤에 숨어서 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지혁은 은우의 단호한 선언에 짐짓 놀란 듯 눈을 살짝 넓혔다. 이내 그의 입꼬리에 깊은 신뢰와 묘한 설렘이 서린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역시 서 대표답군요.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 모양입니다.”

지혁이 손을 뻗어 은우의 차가운 손등을 가볍게 덮었다. 닿아온 손바닥의 단단하고 뜨거운 온기가 은우의 손등을 타고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비즈니스로 조인한 계약 결혼이었지만, 지혁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이 미묘한 심장박동의 변화는 더는 계약의 조항만으로 통제하기 힘든 영역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은우는 조용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성북동 본가는 한남동 저택과는 또 다른 위압감을 풍겼다.

수십 년의 세월을 버텨낸 웅장한 대리석 건물과 높게 솟은 정원수들은 신성그룹의 견고한 역사와 권력을 시각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본관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한 샹들리에 조명 아래 이미 모여 있던 신성의 친척들이 두 사람을 향해 싸늘하고도 예리한 시선들을 일제히 쏟아냈다.

“저애가 지혁이가 데려온 그 애라는 거지?”

“배경도 없고 학벌도 지방대라더니, 얼굴 하나 믿고 신성가 문턱을 넘었군.”

“제일기안인가 하는 곳에서 갑질하다 쫓겨났다더니, 형님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애를 들이셨는지 모르겠어. 집안 망신이야.”

귀가 찌릿할 정도로 들려오는 은밀한 속삭임들. 은우는 그들의 조롱 섞인 시선 속에서도 등허리를 꼿꼿이 든 채, 완벽하게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이닝 홀로 향했다.

그때, 다이닝 홀 중앙에서 친척들과 대화를 나누던 이명희 여사가 은우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어머, 은우야! 왔니?”

명희의 화사한 목소리가 홀 안의 침묵을 단숨에 찢어발겼다. 명희는 친척들이 보란 듯이 은우의 두 손을 덥석 쥐고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오늘 옷이 참 우아하고 예쁘구나. 역시 우리 은우는 안목이 남달라. 지혁이 너는 맨날 칙칙한 정장만 입고 다니더니, 은우 덕에 사람 몰골이 좀 나는구나.”

“어머니, 저도 나름 신경 쓰고 입은 겁니다.”

지혁의 투덜거림에 명희는 콧방귀를 뀌며 은우를 상석 부근의 자리로 이끌었다. 시어머니의 노골적인 편애와 비호에 주변 친척들의 안색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테이블 맞은편 상석에 앉아 있던 우아한 실크 한복 차림의 여인, 지성의 외가이자 가문의 큰어머니인 강숙자 여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싸늘한 음성을 흘려보냈다.

“동서. 아무리 며느리가 예뻐도 가문의 격식이라는 게 있는 법이네. 친족회 자리에 검증되지도 않은 사람을 이렇게 덥석 상석 근처에 앉히다니, 보는 눈들이 많지 않은가.”

숙자의 날카로운 눈길이 은우의 얼굴에 가차 없이 꽂혔다.

“제일기안에서 무슨 소란을 피우다 나왔는지는 관심 없지만, 신성의 며느리가 되었다면 그에 걸맞은 품위와 조신함을 먼저 배워야 하는 법이지. 얼굴만 번지르르하다고 해서 다 신성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홀 안의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지혁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며 숙자를 향해 입을 열려던 찰나, 은우가 먼저 지혁의 소매를 가만히 붙잡았다. 그리고 숙자를 향해 한 치의 찌푸림도 없이 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큰어머니. 지혁 씨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가문의 품격과 예법에 대해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마케팅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포장보다 내용물의 진정성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저 역시 신성가에 어울리는 실질적인 가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하고 있으니, 앞으로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근조근하면서도 논리적으로 뼈를 때리는 은우의 존댓말 대답에 숙자의 눈썹이 꿈틀했다. 감히 배경도 없는 어린것이 자신을 마케팅 이론으로 훈계하려 들다니.

숙자는 찻잔을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며 차가운 실소를 터뜨렸다.

“진정성이라…… 입바른 소리는 아주 잘하는구나. 과연 그 진정성이라는 게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군.”


본격적인 친족회가 시작되자, 강태준 회장이 홀 안으로 입장하여 상석에 앉았다. 그의 묵직한 존재감에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회의는 지주사 지분 구조 개편과 계열사 실적 보고 등으로 딱딱하게 진행되었다. 지혁은 전략기획실 전무로서 최근 에어핏 가습기 사태를 신속하게 수습하고 주가를 방어한 성과를 담담하게 보고했다.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혁의 보고를 경청했다. 지혁의 입지가 확고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강지성 부사장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지성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쥔 채 숙자에게 눈짓을 보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회의가 마무리될 즈음, 강숙자가 헛기침을 하며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 회의를 마치기 전에, 가문의 품위와 신성의 경영 안정성을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대한 사안이 있습니다.”

태준의 엄격한 시선이 숙자에게 향했다.

“말해 보시오.”

“지혁이의 갑작스러운 결혼에 관한 일입니다. 우리는 지혁이가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 경영에 전념하기를 바랐지만, 이번에 들이민 배우자의 배경은 신성그룹의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리스크 덩어리입니다.”

숙자의 서슬 퍼런 선언에 이명희 여사가 벌떡 일어섰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은우가 에어핏 사태를 해결한 공을 뻔히 보고서도 그런 심한 말씀을 하시다니요!”

“동서,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게. 에어핏 사태 수습은 마케터로서의 기술일 뿐이네. 가문의 며느리가 되려면 흠결 없는 배경이 최우선이거늘, 서은우 대표의 친가 상태가 어떤지 동서는 알고나 있는가?”

숙자가 비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가 즉시 두꺼운 서류 봉투를 테이블 중앙에 올려놓았고, 숙자는 그 봉투를 찢어 내부의 서류들을 강태준 회장과 친척들 앞에 흩뿌렸다.

“이것 보십시오. 서은우 대표의 부모가 운영하는 인쇄소의 법적 부채 명세서와 법원에 접수된 가처분 압류 신청서 사본입니다. 빚만 수억 원에 달해 당장 내일 부도가 나도 이상하지 않은 파산 직전의 가문입니다!”

사방에서 헉, 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친척들은 서류를 돌려보며 경악과 조롱 섞인 웅성거림을 키워나갔다.

“세상에, 파산 직전 집안의 딸이었다니!”

“신성가 며느리라는 타이틀을 달아서 친가 빚이라도 갚아보려 한 속셈 아니야? 완전 사기극이네!”

“저런 애를 집안에 들여놓았다니, 신성그룹 주주들이 알면 주가가 어떻게 되겠어?”

강숙자는 기고만장한 태도로 은우를 매섭게 쏘아붙였다.

“서은우. 네가 신성의 안주인 행세를 하며 뒤에서는 네 친가의 더러운 빚더미를 감추려 했더구나! 돈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지혁이에게 접근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중대한 결격 사유를 숨길 수가 있지? 회장님! 이 혼인은 신성의 명예를 더럽히는 사기극입니다. 당장 혼인을 무효로 처리하고 이 여자를 쫓아내야 합니다!”


장내는 극도의 혼란과 비난의 열기로 휩싸였다.

“아니, 형님! 어떻게 이런 치사한 짓을……!”

이명희 여사가 분노로 온몸을 떨며 소리쳤고, 지혁은 주먹을 쥔 채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생전 처음 보는 극도의 분노로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큰어머니! 적당히 하십시오! 제 결혼은 사적인 영역이며, 은우 씨의 집안 사정은 신성그룹의 가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악의적인 사생활 폭로로 제 아내를 모욕하는 것을 더는 묵과하지 않겠습니다!”

“지혁이 너 지금 감히 이 큰애미한테 소리를 지르는 거냐? 저 여우 같은 년한테 홀려서 가문의 명예도 내팽개치겠다는 거야?”

강숙자가 지혁과 대치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친척들의 비난 어린 눈초리가 은우에게 쏟아졌고, 강지성은 뒤에서 슬며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 상황을 관조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은우의 심장 역시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부모님의 인쇄소가 당한 억울한 채무가 가문 전체의 구경거리가 되어 짓밟히는 순간. 과거 빚쟁이들이 인쇄소 문을 두드리며 부모님을 핍박하던 어두운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살가죽이 뜯겨 나가는 듯한 모욕감이 은우의 전신을 옥죄어 왔다.

하지만 은우는 눈물이 고이거나 두려움에 떠는 대신,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뜨거운 분노를 차갑고 정교하게 벼려냈다. 위기일수록 머릿속은 더욱 냉정하고 맑아졌다.

그녀는 지혁의 옷소매를 당겨 그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지혁이 의아함과 염려가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자, 은우는 그에게 나직하게 눈짓을 보냈다.

‘제게 맡기세요.’

그 눈빛에 담긴 단단한 확신에 지혁은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입을 다물었다.

은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나뒹구는 부모의 채무 가처분 서류 한 장을 우아하게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은우는 서류를 천천히 훑어본 뒤, 테이블 맞은편의 강숙자 여사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입꼬리에 서서히 걸리는 것은, 절망도 눈물도 아닌…… 지극히 매혹적이고 차가운 미소였다.

“혼인 무효라니요. 저를 가문에서 축출하기 위해 이렇게 사적인 채무 기록까지 정교하게 수집해 오시다니, 큰어머니의 지극한 관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은우의 목소리는 너무나 맑고 고요해서, 요란하던 홀 안을 순식간에 진공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은우는 서류를 양손으로 가볍게 쥔 채, 숙자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꿰뚫듯 노려보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큰어머니. 이 서류를 이 자리에 내놓으시기 전에, 이 빚이 과연 ‘누구’ 때문에 시작되었는지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보셨습니까?”

은우의 서늘한 질문이 공중에 매달렸다.

서류의 하단에 서명된 채권자의 이름과 그들이 사용한 어음 발급처. 은우의 날카로운 눈길이 닿아 있는 그곳에는, 신성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신성건설’ 협력업체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숙자의 얼굴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순간, 은우의 날카로운 반격의 서막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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